윤정한과 이석민의 의의의 공통점 첫 번째, 로맨티시스트다. 두 번째, 시간 여행자다.
두 번째가 너무 의의인데? 충격적인데? 로맨티시스트란 걸 완전히 잊어버리겠는데? 하지만 잊지 말자. 중요한 건 첫 번째이다. 애초에 두 시간 여행자가 우연히 만나 눈을 마주치고 까만 눈동자에, 맑은 흰자에 다이빙하는 것부터 운명적으로 낭만이라는 물살을 일으키지 않는가. 첨벙, 상체 주위로 물이 튀고, 하얀 거품을 뱉어내는 파도는 기필코 달의 바다마냥, 행성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야 만다. 둘이 낸 상처는 곧 사랑이라 불렸다.
자, 그렇다면 시간 여행자는 뭔데? 엄밀히 따지자면, 시간 여행자까지는 아니고, 과거로 잠깐 다녀올 수 있는 정도다. 과거로 돌아가 실제로 역사를 바꾸는, 엄청난 짓을 벌이는 건 더더욱 아니다. 공룡 시대로 가 킹콩과 티라노의 싸움을 보고 오지도 않는다.(윤정한은 킹콩과 티라노가 도대체 어떤 연유로 먼 옛날에 싸우게 되었는지 굳이 따지지 않았다) 둘은 얌전하다. 시간 여행을 본인의 낭만을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지, 세상을 뒤집으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석민은 겁이 많아 과거를 바꾸고 역사를 새로 짜겠다는 결심을 할 수 없고, 윤정한은…, 그는 제 안의 낭만도 종종 비관적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어 죽겠는데 그거까지 신경 써야 해? 싶었다. 그런 영화들 많잖아, 사소한 날갯짓 하나가 어마어마한 폭풍이 되어 인생을 전부 덮어버리는, 비장하고, 애절하고, 슬픈. 정한은 솔직히 저거 다 시간 여행자가 아니니까 상상할 수 있는 거대한 착각이라 여겼다. 우리는 의외로 단순하게 살아. 어머니가 시간 여행자의 소란한 슬픔에 관한 영화를, 어린 정한의 손을 잡고 상영관 맨 앞줄로 보러 갔던 날, 건조하게 마른 얼굴이 간만에 주름이 지도록 크게 웃던 날, 소년은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미숙한 나이의 낭만 대부분을 버렸다. 비 능력자를 비웃은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선입견을 비웃은 거다.
예를 들면, 어바웃 타임 있잖아. 거기서 주인공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길 반복하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이 만든 결과에 맞닥뜨리게 되지. 안타깝게도, 단순히 주인공의 탓이 아니다. 시간이 무서운 거라 그래. 시간 여행자 가문의 대충 17대손 윤정한은-모계로부터 내려오므로 2022년 3월에 당선될 대한민국 대통령과는 아무 관계 없다-윤정한은 어머니에게서 시간의 두려움을 배웠으며 동시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가만히 있으라는 건 아니란다, 라는 모순을 입력 당했더랬다. 어느 사건이든 이유에서 피어나고,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세상이 허락해서 그런 거야. 그게 매우 사소할 뿐이야. 그렇다고 특별하다 생각하면서 자만하진 말고. 왜케 해야 하는 게 많을까요…. 난 그냥 이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뭐를 해야 하고, 뭐를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훈계부터 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살짝 뭉개졌지만, 정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외롭지 않을 거야. 언젠가 집에서 갓 튀긴 팝콘을 깨작깨작 씹으며 영화를 봤는데, 시간을 여행하는 주인공은 외로웠고,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두려워 아예 입을 닫아버렸으며, 그 꼴을 보는 어머니의 연한 눈썹은 조용히 실룩거렸다. 나는 네 아빠를 만났잖아, 외롭지 않아, 저 주인공은 자기가 기회를 전부 차버렸잖니, 너는 똑똑하니까 기회가 다가온 순간 반드시 잡을 거야, 정한아. 우리는 외롭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해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돌리고 새로운 우주를 희생해야 하지 않나.
윤정한은 운이 좋기로 유명했다. 보통의 존재는 제 운이 긍정적인 쪽으로 폭발하면 몹시 흥분하며 방방 뛰는데, 정한은 적당히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주니, 오히려 관심을 크게 받고야 말았다. 허허, 정한은 세련된 용모에 배치되기 힘든 웃음소리를 내고 이정도야, 뭐, 마른 어깨를 으쓱이곤 했고. 그가 (편의상) 시간 여행자임을 아는 독자는 혹시? 싶을 것이다. 아니다. 정한은 그냥 운이 좋았다. 시간을 거슬러 선택의 갈림길에 도로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나 행운이 그의 편이라는 진부한 이야기인가? 그것들은 정한을 비껴갔다. 넌 운명이랑 덜 엮이는 게 낫겠다는 듯, 그다지 정한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래, 마음대로 해여. 그 무렵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우연히 정한이 입학하기 직전 해, 복장 규정이 폐지되고 정한은 하나로 질끈 묶어도 머리 꼬랑지가 목을 넘어 날개뼈 사이에 닿을 만치 기를 수 있었다. 교사들이 엉망진창인 눈빛으로 제자를 노려보았지만, 중년남이었던 학생 주임은 매섭게 노기를 쏘며 장식품이 된 회초리를 휘둘렀지만, 실질적으로 그를 제재할 게 무엇이 있는가. 정한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에이, 선생님, 어울리잖아요, 능글거리곤 했으며 몇몇 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는 어휴, 너니까 봐주지, 했다. 아무튼, 정한은 머리를 기르기 위해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시험을 비롯한 그 무엇도 그가 시간을 건넜다는 이유로 얻은 성과가 아니었고, 남들에게 정한은 그저 운이 좋은 녀석이었을 뿐이다.
윤정한이 제 운에 고마워하게 된 것은, 이석민을 만나고부터였단다. 군대 다녀온 직후라-아무리 운이 좋다고 해도 군 면제는 받기 어려웠다-겨우 다시 길러 아직 짧은 머리를 겨울 막바지의 칼바람이 흐트러뜨리던 때로, 정한은 제게 순수하게 감탄을 연발하는, 그렇지만 제게만 그러는 게 아닌 상냥하고 바보 같은 이석민이 좋았다, 정도로만 설명하겠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어느 사건이든 연유가 발아해야 하지만 사랑만큼은 예외였다. 말하고 싶은 건, 정한이 그를 좋아하게 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석민이 주저주저하다, 발간 눈을 하고, 형나사실형이좋은데그전에고백할게있어, 띄어쓰기 하나 없이 열여덟 글자를 폭풍처럼 쏟아냈다는 것이며, 그 앞도 고백 아니니, 석민아, 지적해야 하나 고민하던 정한은 나도 석민이가 좋아, 고백할 건 뭔데? 오직 석민을 향해서만 고인 다정을 힘껏 퍼내다가, 나 시간 여행자야, 혀엉…, 말해야 할 것 같았어어…, 이 소리에 최초로 당황에 잘생긴 낯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나돈데? 당황하면 사람은 제 입술을 통제할 수 없다. 더 듣고 나서 차분히, 저 커다란 손을 잡고 설명해야 했거늘. 정한의 흐릿한 세상이 비로소 투명해지는 충격이었다. 그런 충격을 가한 본인은 정작, 믿어달라는 표정을 드러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연한 입술을 타고 흐른 얼빠진 대답이 들리자, 석민은 형도 나 좋아해…? 반쯤 화색이 돌았다. 어, 그것도 맞고 시간 여행자도 맞아. 어? 응? 어? 이거 혹시 상황극인가요? 석민은 입을 떡 벌렸다. 이석민은 윤정한의 한없이 소중한 바보라, 바보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서 처음엔 싫었다는 말도 못 하는 착한 바보라, 정한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고 속고 봤는데, 이건 아무래도 다짜고짜 믿기 힘들지. 형,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짐짓, 어울리지 않는 엄숙한 목소리로 억울해한다. 왜 내 진심을 무시하고, 이런 순간까지 장난을…. 처음 남자를 좋아해 보는 이석민의 순정이 울자, 정한이 다급하게 한 걸음 더 발을 디뎌, 기다란 그림자의 뿌리로 몸을 옮겼다. 사랑도 함께. 진짜야, 석민아,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속임수고. 장난하냐? 뭐 증거를 하나 줘야지, 형. 증거? 내 삶이 증거 아닌가.
이석민은 정한이 형 바보지, 우리 모두의 바보가 아니다. 기억의 파도에 푹 젖어 알아보기 힘들어, 내내 겨울바람에 말리고 있던 눅눅한 페이지가 있다. 술기운에 밀어나 저만치 구석에, 존재감 없이 놓여있던 기억을 알아챈다. 형 있잖아, 그날 기억나나, 혹시? 손이 시렸다. 이 추운 날 역시 안에서 대화해야 했다. 몸이 덜덜 떨린다.
정한은 아주 오랜만에, 시간을 건넌다.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고, 어느 순간에 존재를 잠시나마 딛길 바라는지 집중한다. 찬 바람이 멎고 습한 공기가 마른 뺨에 닿자, 숨이 가쁘게 튀어나왔다. 추위에 거침없이 요동치던 몸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어디서 매미가 울고, 언 살갗을 더위가 녹여내고, 다 녹아내릴 즈음, 그는 이석민과 마주친다. 그러니까, 현재의 석민이 지정해준, 과거의 술 취한 이석민과. 나 전에 형이랑 술 먹고 혼자 집 가다가 또 집 근처 골목에서 형이랑 만난 거야. 술 너무 먹어서 헛것이 보이나 싶고 무서웠는데, 형이 뭐라고 막 그랬어, 그 뒤로 필름 끊겨서 기억 안 나. 난 꿈인 줄 알아서 말 안 했거든, 근데 혹시…. 정한은 여름인데도 얼어붙은 석민을 바라본다. 형 눈빛이 진짜 다정했어. 새삼스레, 난 널 늘 똑같은 눈으로 봤어, 석민아. 정한은 어떤 소리의 형태를 만들어, 눅눅하고 더운 공기 속으로 감추었다. 석민이 정한이 형? 묻는다. 이거 기억해, 기억하고 다시 나한테 말해줘야 해.
눈을 뜬 정한은 석민과 동시에 입을 연다. 이제 믿지? 짧은 두 마디에 어마어마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난 그 날 이후로 내가 형을 좋아하나, 생각했던 것 같아. 꿈이라고 믿으려 해도 형 눈빛이 자꾸 기억나서. 좋아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야. 낭만성 짙은 두 번째 고백에 눈동자가 귀퉁이부터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래서 고백하고 싶었고, 형한테 비밀을 말해야 했어. 왜? 말 안 하면 속이는 거잖아. 그렇지만 난 너한테 말 안 하려 했는데. 아니, 형도 말했을걸. 석민의 눈매가 잔뜩 휜다. 입꼬리와 맞닿을 듯이. 형은 숨기는 거 없지 않아?
그래, 윤정한은 말하지 않는 속내가 이다지도 깊어 심장까지 물기가 침범한 바람에 꿉꿉해져, 미간에 가끔 힘이 실리곤 했다. 이러다 수영도 할 수 있겠어, 그 전에 내가 가라앉나? 나는 바깥에 있는데, 안에서 가라앉을 수 있나? 노란 머리카락 끝자락이 흔들렸다. 상상하면 괜히 소름이 등에서 얇은 팔뚝까지 달렸기 때문에. 다만 불안과 별개로 굳이 누군가에게 이해를 썩 원치 않는 성정이, 감정이 넘치지 않게끔 목구멍을 틀어막았으며 별 불만이 없었다. 사람들은 윤정한의 속을 궁금해했고, 단정하게 거리 둔 그의 그림자라도 한 번 밟아보려 온갖 애를 썼고, 너는 참 비밀이 많다, 는 말로 슬쩍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그런 건 속에 파도는 무슨 물결도 일으키지 못했더랬다. 반쯤 잠긴 심장이 코웃음 치다가, 아, 왜인지 알아야 마땅한 답답함에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올 무렵, 석민이 심장을 들어 올렸던 것도 같다. 정한은 오직 이석민에게만 유치해졌다, 약해졌다, 흐흐, 마음을 놓고 물장구를 쳤다. 형은 숨기는 거 없다는 맑은 눈동자로 물방울이 튀었다. 석민은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
정한은 그 후 말 그대로 조금 더 행복해졌다. 혼자 지탱하기 어려운 삶-심지어 시간 여행자라는-을 같이 들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그래, 긍정적인 것도 가끔은 괜찮져어, 전보다 더 자주 웃었다. 원래 잘 웃었으나, 웃음과 미소는 다른 법이다. 허무함을 감추려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게 웃는 것보다 덜 힘들다. 정한은 감정을 완연히 내보이면 곧 드러날 취약한 상태가 영 고까워, 일부러 미소 짓는 편에 가까웠으나, 석민은 정한을 웃게 했다. 와하하, 유치하게, 환하게, 체력 약한 몸을 마구 흔들 만큼, 숨을 못 쉬어 기침할 만큼. 정한이 기침을 마지막 잎새 보는 사람처럼 하면, 석민이 무섭다는 듯 바라보곤 했지만.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서.
윤정한은 턱을 치킨다. 뾰족한 코 끝자락에 입을 맞추고 거두면, 웃음이 뒤따라왔다.
*
죽겠다. 무슨 문학 밈의 러시아 문학처럼. 정한은 시들시들, 제 몸의 한 부분씩 누런 갈색으로 변하는 기분이 들어, 말단 부위 이곳저곳을 확인한다. 평범하다. 그는 식물이 아니기에 실제로 말라비틀어져 마지막엔 툭, 땅으로 떨어지지 않을 테다. 하지만 너 없으면 나는 골골거리는걸. 정한이 목구멍에 이미 버릇이 되어 달라붙은 기침을 목이 찢길 정도로 강하게 뱉자, 승철이 으, 구겨진 눈으로 친구를 흘겨본다. 석민이 어디 갔냐, 윤정한 죽어가는데. 요즘 잘 안 보이지 않아? 싸웠나? 홍지수는 눈매를 구기지 않는다. 대신 예쁘게 웃으며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싸웠네, 싸웠어, 으이구. 김민규의 불쑥 튀어나온 말머리가 버르장머리 없지만, 정한은 저 주변을 서성이는 호기심 꾸러기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궁금해하기 전에 너네 할 일이나 해. 저와 달리 여전히 시험 기간에 허우적대는 인민들을 가엽게 쳐다봐 주고, 정한은 낡고 찢긴 소파에 등을 더욱 파묻었다. 품이 많이 죽어 천이 헐거워진 소파보다 석민의 탄탄한 허벅지가 훨씬 좋다고, 그가 바라는 감각은 살갗에만 겨우 남아있거늘, 소리 없이 푸념해 본다. 소리가 없어도 남들에겐 다 들린다. 정한의 커다란, 붕어같이 너무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엔 이석민이 대롱대롱 달려있으므로.
둘은 결코 자주 싸우는 편이 아니다. 사이가 조금, 징그러울 정도로 좋아, 김민규는 붙어있는 둘을 볼 때 손가락 네 개를 안쪽으로 말고 나머지 엄지를 세워 아래로 내리는, 소위 붐따를 하며 지나갔고, 최승철은 정한아, 너 그러다 석민이 잡아먹겠어어, 진한 눈썹을 한가득 미간으로 모으며 잔소리를 가장한 부러움을 내비치고 갔다. 민규야, 쟤네 짜증난다. 우리끼리 밥이나 먹으러 갈까? 싫은데. 야이샊…. 인프피란. 친구들은 윤정한과 윤정한 바보의 야리꾸리하고도 수상한 관계를 질투했는데, 그들이 윤정한을 성애적 의미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끼리 뭉쳐있길 좋아해서 그렇다. 원래 무리에서 연애하는 애들 생기면 놀리고 싶어 하잖아.
그렇다고 이 기다란, 그치만 말단에 지나지 않는 애정에 관한 이야기가 둘이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로 맺히진 않는다. 간단명료한 관계란 없다. 어느 순간, 어느 때, 어느 선택을 해도, 매듭은 이미 꼬이는 것이며 선택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꼬여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어지러워진다. 현기증이 일어 이마를 짚고, 손을 대려다 마는 게 인간이고. 정한과 석민이 아무리 서로 좋아 죽겠다고 다녀도 인간인 법이라, 어려운 관계에서 본능적으로 눈을 떼려 할 수밖에 없으며, 다툼은 회피로 발생하는 것이다. 윤정한은 석민의 마음을 덜 이해한다. 이석민은 서운함에 못 이겨 말을 참아버린다. 그들은 조용히 싸웠다. 분요한 갈등은 어울리지 않았다. 커다란 석민의 목청은 서운함이 꾹꾹 눌러 닫았고, 윤정한은 그다운 한숨을 쉬며 석민을 밀어냈는데, 그것마저 자석이 되었는지, 말 많은 석민이 불쑥 소리 한번 크게 지르고 형을 찾거나, 예민한 정한이 부드럽게 석미나아, 애살스레 굴었다. 애당초 폐쇄는 둘 사이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야, 윤정한이 이석민을 좋아하니까. 누구에게나 손쉽게 문을 닫을 수 있는 사람이니, 한 사람에게만은 열려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숨통이 트이지 않으면 원래 사람은 죽어. 그러니까 너는 내 숨이야.
혹은 숨을 실어 오는 바람이거나.
석민이 힘 빠진 낯을 하고서, 그래도 난 형이랑 싸우기 싫다, 비교적 쾌활하게 말했으나, 다툼의 다른 이름은 어쨌든, 관심이다. 무한동력처럼 싸우다 사랑하다 염병을 떠는 커플도 여럿 있는 데서 파악되지 않나. 원래 관심이 식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굳이 피로에 찌든 동공으로 살피고 손가락으로 집어낼 필요 없다. 어차피 곧 헤어질 건데, 수선하면 무얼 해. 정한은 비교적 친근한 여자 동기들의 푸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는 카페의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담으며, 종이 빨대임을 또 잊어버린 죄로, 콱콱 씹어대 버려 빨대가 풀어지는 통에 컵에 입을 대고 커피를 마셔야 한다. 일련의 과정을 동시에 거치며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을 수 있구나. 실로 재수 없는 감상이도다.
다행히 그것은 혼자만이 겪는 증세였는지, 석민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드문드문 정한을 욕했다. 형은 똑똑한데 왜 그래, 삼겹살이나 처먹고, 형, 대머리 갈매기 같애, 아, 윤정한 뭐야? 난 영어도 못하는데 뭔 가이드야(라고 골몰히 정신을 돌리던 표정)…. 정한의 독보적으로 팔불출 성향이 강한 사랑의 방식이 석민에게 약간 타협 불가능한 지점이었는지, 장난기에 격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그게 다툼의 원인이 되기엔 정한이 실실 웃는 게 다였으므로 관심의 부딪힘은 보통 흐지부지하게 무산되었고. 이석민이 받아들인 윤정한의 속엔 지독한 회피 성향이, 서양인들이 먹지 않아 크툴루처럼 거대해진 미역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게 진정한 문제였다. 이석민은 의외로 회피 성향이 드문 인프피다. 놀랍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고민이 있으면 말을 꺼리긴 해도, 한 번 터지면 줄줄 흘러나온다. 윤정한은 터지긴커녕, 살살 웃는 얼굴 깊이 고민을 묻어두고, 은근슬쩍 도망치고 싶어 한다. 쾌남은 그게 짜증 나니까, 답답하니까, 말 좀 하라고, 얼굴 근육을 움직여 화난 표정을 지어보려 하는데, 억울한 낯만 되었다. 정한이 머리를 쓰다듬고 싶게.
윤정한과 이석민의 싸움은 칼로 물베기다. 둘이 어떤 이유로 인해 자세가 다툼을 위한 형태로 변하고 말싸움을 시작했을 때, 본격적인 관심 주고받기가 두려워, 아예 싸우지 않는 기로를 찾으려고 윤정한은 과거로 돌아갔다. 석민과의 싸움도 처음이었고, 관계에 변화가 일까 봐 다른 변화를 구하려 시간을 돌아간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도 결과는 같고, 또 같고, 어떤 말을 선택해도, 어떤 태도를 보여도, 심지어 무릎부터 대뜸 꿇어도 결과가 똑같아 그답지 않게 당황하던 정한은, 그제야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시퍼런 낯빛의 남자친구를 목도한 것이다. 너도 혹시…?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각자의 시간을 비밀스럽게 돌리며 충돌했다. 쿵쿵. 여파로 어질어질했다. 코를 훌쩍이는 석민을 달래며, 정한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싸움 나면 시간 돌리지 말고, 대화로 풀자, 알겠지? 그 모습이 상당히 형다워서 신선했다는 것은 석민이 나중에 말할 의견이다. 근데 그게 동아리방에서 벌어진 일이라…, 정한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훔쳐주며, 허허, 우리가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볼래? 실없이 지껄이다 제육 볶음을 시켰다.
그래, 그랬던 그들이 싸웠다. 형은 그만 좀 도망가! 석민이 버럭! 화를 내자 화려하고 우렁찬 말의 크기가 카페에 울려 퍼져 직원들까지 흘끔거렸다는 게 유일한 흠이겠다. 낯가리는 석민은 잔뜩 화나 의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여기서 웃으면 큰일 난다. 윤정한 바보 이석민은 늘 귀여웠다. 정한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악물고 웃음을 버텼으나, 석민은 정한의 속내만큼은 이상하게 눈치 빠른 터라, 형의 장난기 차오른 낯꽃이 실은 불안으로 촘촘하게 짜여있어, 떨쳐내고 싶어 웃음으로 털어내려는 거라고, 다 알아챘다. 알아챈 이의 얼굴은 진실로 무서웠다. 정한이 석민아, 부르니 형 진짜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말아봐, 하고, 화장실 다녀올게, 일어서더니, 사라진 것이다. 화장실까지 졸래졸래 따라갔기 때문에 문 바깥으로 달려 나간 게 아닌 것쯤은 안다. 석민은 키가 훌쩍하니 크므로 저 작고 네모난 창문 밖으로 도망간 23세 청년이 될 일도 없다. 정말 사랑이 도망간 카페에서 윤정한은 고뇌했다. 언제쯤 전화하지?
그게, 삼일 전, 12월 22일의 사건이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당일이고. 윤정한은 크리스마스에도 지지 않는 과제에-26일까지 마감이라고 미룬 너희 책임 아니냐고 물었다간 교수 편이냐고 승철이 윽박지른다- 미쳐 틀어둔 온갖 바이레이션의 징글벨을, 갖가지 음색의 캐롤을 혼자 듣다, 코인노래방에서 크리스마스라 신난다고 마구 열창하던 석민을 떠올린다. 시무룩해진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다. 자취방을 두드려도 뭐왜뭐! 버럭 질러대는 소리가 없으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면 기척 하나 없다. 이석민이 없다. 걘 어디 못 도망간다. 갑자기 훌쩍 외국으로 떠났을 리 없고(거듭 말하지만, 카페 화장실에서 사라졌다니까)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훌쩍이고 있을 리 없다. 이 시간에 석민이가 없다. 그럼, 대체 어느 시간으로 사랑이 도망간 거지? 뿌연 창 건너 눈이 내린다. 올해는 눈이 느리다아. 석민의 손은 겨울에도 따뜻했다. 눈은 곧 소리를 덮고, 정한의 속은 서서히 암전한다.
*
1999년은 낭만의 시대였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하길 1999년 12월 31일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다. 세기말적 예언을 90년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지. 그걸 왜 믿냐,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걱정한 부류도 여럿일 테다. 본래 인간은 무서울수록 몸과 마음을 뒤틀어대는 종족이다. 지구 멸망은 곧 낭만이 된다. 20세기 마지막 날에, 세상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는다는데, 이게 낭만이 아니면 또 뭐람. 다만 이석민이 이런 잔혹한 사유의 궤도에 올라타 낭만을 꿈꾼 건 아니었다. 그는 누가 죽는 게 싫다. 2012년에도 그랬지만, 왜 다들 지구 멸망에 호감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 그가 세기말로 홀라당 달려온 이유는…. 그는 영화 줄거리 설명도 잘 못 한다. 킹콩 앞부분 줄거리 설명에 정한이 굉장히 곤혹스런 감정을 얼굴에 띠었던 걸 잊지 않는다. 하물며 형태를 가지기 힘든 감상을 말로 조립하는 일은 그와 영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일 분 차이의 세기말과 세기의 시작에 제가 오롯이 살아있다는 기분이 요상하리만치 북받친다는 말을 스스로 저지하고, 에이 그냥 그런 게 있어, 말하지 못해 목이 조금 상했으면서도 걸리는 거 없이 넘어가려 했다.
씁쓸한 맛이 감도는 침을 삼킨다. 옛날 집에 관한 기억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석민은 1999년에 만 두 살이었다. 두 살이 무얼 적확히 기억할 수 있겠냐마는. 덜 나이 든 주택의 매끈한 나무 벽을 문지르며 나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다. 언젠간 여기서 뛰다가 넘어졌다. 굴러떨어져 카펫이 깔린 맨 아래에 철푸덕, 얼굴을 박고 코가 깨졌던 적이 있다. 다치는 건 몹시 아프다는 상식을 몸으로 완전히 깨우친 그때부터 겁이 부쩍 늘었던 듯하다. 존재의 자각은 고통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삐걱대는 계단 한 걸음, 두 걸음, 걷다 마지막을 커다란 발로 완벽하게 딛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아들을 반겼다. 과거의 어머니가, 미래의 아들을.
“너 거기서 넘어졌던 거 기억나니?”
“당연하죠. 죽을 뻔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단층으로 이사 가려고 알아보기까지 했어.”
석민은 몸을 조심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참으로 많고 활발해 부모의 가슴을 들었다 놨다 잘했다. 허벅지에 조금 큰 머리가 간신히 닿는 어린 아들을 키우다 저보다 두 뼘은 길어진 다 큰 아들을 보니 감회가 여간 새로운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기쁘게 웃는다. 형도 저렇게 석민을 응시하다 방긋, 웃곤 했는데. 형은 뭐가 뿌듯했니. 석민은 윤정한을 습관처럼 곱씹는다. 광대뼈가 뿅하고 올라간 미소는 더럽게 달더랬다.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고, 석민이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생선 구우셨죠. 그래, 갈치 구웠어. 저 나중에 별명이 삼성동 갈치발이에요. 발이 진짜 크긴 커, 너가….
2019년의 23살 이석민이 자취하는 주택보다 훨씬 크고 고풍스러운 집은 1995년에 건축되었다. 1997년에 태어난 석민은 지어진 지 삼 년 된 새집에서 중학생 때까지 살았다. 만 두 살이 뭘 기억하겠냐고, 아까 비관했지. 하지만 석민이 거의 이십 년가량 기억의 첫 페이지에 적어두고 아래쪽 모서리를 접어 잊지 않도록 표시한 시간이 있다. 아주 어린 석민은 세기말 겨울, 잠깐 할머니 댁에 맡겨졌는데, 귓속에 남아 성장할수록 오히려 소리가 커다래진, 할머니와 엄마의 비밀스런 대화에 따르면, 누군가가 불쑥 집에 찾아와 석민이 집에 당분간 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말을 들은 할머니의 활짝 펴지던 얼굴 주름이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너무 사랑했으므로. 누가 왔길래 아들을 쫓아냈던 거냐고,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일주일간 친척들과 실컷 놀 작정이긴 했지만, 하루 이틀 일찍 왔다고, 외동아들은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새롭게 서운해졌는데, 그 누가 저였나보다. 이십 년 동안 키가 부쩍 자라고, 남자, 그것도 형과 연해하고, 바로 그 형에 지독하게 서운해진
신문은 물론이고 활자의 시대가 저문 21세기와 달리, 20세기 말까지 신문은 활발하게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식탁에서 신문을 읽다 아들에게 고갯짓한다. 잘 잤니. 어색하지만 따뜻한 부엌 공기는 생선 냄새다. 부모님과 석민은 시간을 건너 마주쳐 동년배가 되었다. 젊은 부모의 모습은 약간의 차이를 지나치면 미래에서 온 아들과 많이 닮아있다. 아버지는 딱 그 시대 가장답게 근엄히 밥 먹자, 하다가도 제 또래의 남성을 대하듯 친근해졌다 해서, 석민은 자꾸 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곧, 바삭한 갈치구이를 먹다, 형의 가시를 발라주던 생각이 떠올라 머리를 숟가락으로 때릴 뻔했으나. 두부를 많이 넣은 된장찌개, 결국 세 살의 이석민이 식탁에서 장난치다가 작은 손등이 툭 건드리고 밀어버려 바닥으로 떨어졌던, 꽃이 그려진 식기, 할머니네 김치, 기다란 갈치구이…. 쌀밥을 한 숟가락 푸자, 제 또래의 엄마가 흐린 오트밀 색의 생선 살을 얹어준다. 많이 먹고 가. 너무 좋다. 다 큰 아들이 굴러와 어린 아들을 빼내었지만, 부모는 걱정은 좀 해도 크게 불만을 가져 보이진 않았다. 너, 사촌들 많이 좋아했잖아. 아니니? 맞아요, 그럼 다행이고요. 석민은 그런 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불안을 쉽게 가지는 성격이라 그래도 물어보고 싶어 입술을 우물거렸는데, 쌀알이 잘도 갈려 단맛이 난다. 맛있다. 어차피 할머니가 너 보고 싶다고 해서, 맡기고 우리끼리 여행 한 번 가려 했거든. 그건 좀 배신감 드는데요, 어머니.
맛있는 걸 먹으면 형이 떠오른다. 이것도 사랑이다. 아니, 싸우고 도망쳤는데,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생각이 나? 우적우적 밥을 먹고 반찬을 집는다. 체하진 않는다. 그는 참,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위장이 튼튼했다. 생선 살은 부드럽고, 가시는 점막을 함부로 찌르지 않는다. 이도 튼튼하여, 죄다 씹을 수 있었다. 윤정한은 이 식탁 위 반찬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 씹기 힘든 것인가.
오늘은 뭐하지. 텔레토비라도 봐야 하나. 크리스마스가 막 지나, 세기말의 마지막까지 남은 며칠은 잉여에 불과한 기분. 두려움에 오그라든 의식은 거품이 떠다니는 개수대에 침잠한다. 1999년에 석민은 존재했으나 너무 나이가 적어 기억나는 게 없으니 모든 게 새로웠다. 두 살이면 의식이 머리 내부의 우주를 나름으로 열심히 유영하는 나이 아닌가. 광활한 푸른 바다에 지레 겁을 먹지 않는 나이. 지금보다 더 강렬하게 헤엄칠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정보가 새로워 습득하는데 체력이 왕성해 눈이 피로하지도 않은 나이. 이젠 영화를 삼십 분만 봐도 피곤하다고 석민에게 몸을 한껏 기대오는 윤정한과 다르게. 단순히 체력을 핑계로 안긴다기엔, 구슬로 조각된 듯한 우주가 흰자 위를 떠돌아서, 석민은 살짝 이 형이 미덥지 못했더랬다. 뭐, 뭘 바라는 건데, 인간아. 이 인간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나중에 사진 보여달라고 해야지.
아무튼 그런 나이지만, 석민은 두 살 무렵의 어느 무엇도 꺼낼 수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긴 해도 그건 석민이 머리가 다 큰 중학생 때까지 여기서 살아서 그렇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거나, 21세기 청년으로선 버벅거릴 법한 뚱뚱한 PC를 사용하거나, 아버지가 읽고(저와 비슷한 나이에 신문을 읽는 게 신기했다, 그도 지인들도 신문은 동아리방에서 김민규가 박카스를 깨뜨렸을 때나 썼다) 각을 맞추어 접어둔 신문을 슬쩍 집어 들어 훑어봐도 뇌에서 무언가 반짝이지 않는다. 존재했지만 기억 하나 나지 않으면 그게 있었던 거라고 할 수 있나? 그릇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손등을 내려가 팔꿈치 반대편 오목한 부위에 고인다. 팔을 비틀어 앞치마로 물기를 벅벅 닦았다. 마음이 찝찝하다.
그래도 하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할머니 댁에서 들었던 제야의 종소리다. 인간은, 나이가 한 자릿수일 때 겪었던 서러운 상황을 어리고 말랑말랑한 두뇌에 꽂아두고선, 나중에 무럭무럭 자란 후 종종 부모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카드로 쓰곤 하니까. 누가 집에 왔대서, 크리스마스도, 세기말의 마지막 밤도 할머니와 친척들과 보냈던 그 날들은 드문드문 뇌에 멍울처럼 새겨져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할머니 품에서 울지 않기 위해 작은 몸이 얼마나 애썼던지. 제야의 종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 겁을 얼마나 먹었던지. 그게 자기 때문이었다니. 억울해 죽겠네. 이렇게 억울해하니까 두 살짜리 이석민이 내내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슬퍼한 것처럼 보이지만 잘 놀았다…. 너무 잘 놀아서 형, 누나들이랑 더 있고 싶다고 찡찡거렸다. 그때, 지금은 결혼한 사촌 누나가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도 해줬는데.
석민은 윤정한에게 언제쯤 돌아가려나 싶다. 개수대 아래에 걸어둔 수건을 집고, 약간 축축한 천에 손을 비벼대며, 이번 새해는 혼자 맞을지도 모른다는, 모두가 사라진 하늘 아래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을 것 같다는, 예전과 비슷한 감각을 기어코 맞닥뜨리게 된다. 어린 날이나 다 큰 날이나 등골이 오싹해져 흠칫, 어깨가 굽게 되는.
*
윤정한은 석민이 형용하기 어려워하는 감정들을, 말없이 속에다 녹여내길 잘한다. 그의 내부는 석민이 우왕좌왕하며 입으로 한가득히 끌어모은 의식의 감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가 부끄러워하며 주춤거리고, 내놓지 않으려 힘을 바싹 주어도 윤정한은 얻어낼 것을 기필코 얻어냈다. 석민이 형을 너무 많이 신뢰하는 탓도 있지만. 정한은 석민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정하게 꽁꽁 감추어두었고, 중요한 건 심장에 박제해, 손목의 맥박이 통통 튀어 오를 때마다 되새김질했다.
석민은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을 아꼈지만, 그 애는 술기운이 강하게 돌아 비틀거리거나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날, 꼭 시퍼런 새벽녘에, 어떤 추웠던 날에 관해 중얼거리곤 했어. 그때 너무 외로웠어, 다른 날들은 다 실컷 놀고 웃었던 게 기억이 날락 말락 하는데, 다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건 외롭고 무서웠어…. 서운해하는 건 쉽지만 누군가를 원망하며 서글퍼하는 건 어려워하는 석민이 솔직하게, 무척이나 오래전 이야기를 잠결에 줄줄, 풀어놓는 게 재미있고 귀엽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쏙 들어서, 정한은 배싯배싯,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자리 같은 미소를 뿌리며 석민의 뜨거운 이마를 상냥히도 문질러주었다. 응, 그래, 석미나, 더 말해봐. 석민이 멀쩡한 상태라면 정색으로 하고서 뭐야? 기분 나빠, 할 텐데, 웅, 나 진짜 슬펐다, 형,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꾸벅꾸벅 졸음을 간신히 입에 물고 술기운을 버텨내었다.
무언가가 서러웠던 너무 작은 아이가 훌쩍 커, 정한의 좁은 속을 한참이나 정성껏 두드리더니 사라졌다. 화를 내면서. 원인을 찾아 낙엽 쌓인 길을 답엽하면, 형은 참 말을 안 듣는다, 어울리지 않게 비야냥거리던, 그러다 또 눈동자를 내리고 흘끔, 눈치를 보던 이석민이 카페에 앉아있다. 나는 형한테 쪽팔려도 전부 말하는데, 형은 왜 피하는 거야. 석민은 비범할 만치 용맹하니-겁이 많은 것과 별개로-늘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상황을, 사람을, 세상을 관조하는 정한의 그림자가 바람에 휘청이는 모양새를 취한다며, 팔을 잡고 끌어오려 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봐, 혼자 보지 좀 말고. 청승이야, 왜…. 직선으로 가득한 몸처럼 석민은 정한에게 한없이 저돌적이었다. 그게 신기해. 석민은 부끄러움도 많고, 턱을 괴고서 고요히, 또렷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눈을 둘 때도 있고, 낯을 많이 가리고, 놀래주면 즉시 펄쩍 튀어 오르는데, 저를 위한 오롯한 눈빛은 구부러진 곳 하나 없이 곧다. 정한은 제 구불구불함이 석민의 곁에서 유난히 돋보이지 않아 좋았으나, 애인은 구김살이 좀 더 펴진, 멋들어진 눈동자를 요구한다. 난 이게 편해서 그래. 말이 극단적으로 단정하게 나간 걸 인정한다. 단순히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석민이 제일 싫어하는 인상을 내비치며 말했다는 게 문제였음을 안다.
난 형한테 엄청 솔직하거든. 그렇게 남한테 지친 표정도 안 짓는다고.
카페의 매끈한 탁자 위 올려둔 커다란 손이 안쪽으로 말렸다. 석민은 기분이 나쁠수록 고요해진다. 그리고 성격을 남김없이, 모조리 모아 상대방에게 내던진다. 정한은 석민 역시 잘 도망친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렸고. 마음을 심하게 놓고 있다가, 제 구불구불한 마음을 달리며 도망간 이석민을 목격하며 직선인 석민의 눈빛이, 실은, 팽팽하게 당기길 반복해 정한에게 직선으로 보였음을, 구부러진 흔적을 환한 목소리로 가렸음을, 알게 된다.
윤정한은 외로움을 모른다. 혼자가 편한 거지, 고독을 즐기는 게 아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핀잔을 준 건 결코 아니나, 사람들은 알아서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곳은 이제 전부 석민의 차지다. 얘한테 주려고 아껴뒀나 봐. 그러니 지금 비로소 공허를 깨달은 게 아닐까. 크리스마스를 홀로 지내며 세기말의 마지막 밤이 외로웠던 아주 어린 아이를 꿈꿨다. 부모님에게 버려졌다는 기분은 절대 아니었고, 일주일 동안 완전 잘 놀았는데, 왜 이불을 꽉 덮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었을까. 달랑 만 두 살이, 무얼 안다고. 겨울 공기가 새어 들어온다. 여긴 벽이 너무 얇아, 바람 들어오는 것 봐, 우리 집 가자, 형. 네 애정이 따뜻해서, 벽에서 바람이 아무리 들어온들 상관없었다. 정한은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였다. 저번 주, 석민과 다툴 줄 어쩌면 직감했던 오후, 함께 본 백화점의 크나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른거린다. 성냥팔이 소녀야? 얼어 죽기 전에 환상 보는 거야? 그럼 트리가 아니라 널 봐야지.
널 보러 가야지. 정한은 날짜를 확인한다. 2019년의 마지막, 뒷자리가 다시 0으로 바뀌는 날의 시작은 삼 일 남았다. 정한은 세기말, 만 네 살, 한국 나이로는 다섯 살이었고, 영리했고, 아버지에게 업혀 해를 보러 갔다. 끓어오르는 열에 추위가 녹았던 날, 2000년을 본 걸 축하해, 어머니의 속삭임. 기억나는 것, 태양의 불길이 녹아내리던 수면, 반짝거리는 물의 빛깔, 너무 많은 사람의 나열. 지구가 멸망하지 않았다고 한 명씩 꼭 던지던 한 마디들이, 안도인지 미련인지 모를 말들이 뭉쳐 덩어리졌다. 엄마는 아셨어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걸요. 어머니의 눈웃음이 고왔다. 아니, 미래는 안 봤어. 궁금하지 않았어요? 너랑 네 아빠가 있는데, 미래가 어째서 궁금하겠니. 그때 어머니가 보여준, 떠오르는 태양보다 붉은 애정. 나중에 시간 여행은 오로지 과거에 한정된 능력임을 알게 된 정한이, 엄마, 그때 왜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척 물어보자, 어머니가 건조한 입술에 웃음을 띠었다. 여름날 이슬 방울처럼, 물기 찬 것이 터진다. 더 이상 겨울이 아니었다. 저 웃음은, 우연히 석민의 부루퉁한 표정과 제 얼굴이 동시에 거울에 비쳤을 때 발견한, 낯익은 것이다. 정한은 석민과의 미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싸우면 싸우는 거고, 다시 사과할 수 있는 거고, 나는 걜, 그날 본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하잖아.
윤정한은 1999년 12월 31일에 세상에 존재했다. 어머니가 깨우쳐 준 방식대로. 난 지구가 진짜 멸망할까 봐 무서웠던 것 같애, 사촌 형이 이제 지구 멸망할 거라고, 엄마한테 전화하라 해서 울었던 기억이 나거든…. 석민은 끔벅끔벅, 잠의 무게를 더 이상 이길 수 없는 눈꺼풀을 겨우, 마지막으로, 일으키고, 헛웃음을 흘리곤 잠들었다. 술 냄새. 귓바퀴를 문질러주던 정한은, 너 나랑은 술 안 먹고, 안중 없는 질투나 한 번 해주었다. 결국 망하지 않고, 우린 같이 있네, 석민아. 말랑말랑한 귓볼을 잡아 주무르다, 입을 가까이 대고 속닥속닥, 애정을 오물거린다. 지구 멸망이 무섭지 않았던 시간 여행자와 지구 멸망이 두려웠던 시간 여행자는 세기말이 한참 지난 후에 마침내 만났다.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무엇이야, 대체.
윤정한과 이석민의 의외의 공통점 두 번째가, 둘 다 낭만주의자라는 거라니까. 윤정한은 이석민이 예전에 살던 곳이 어디인지, 어떤 놀이터에서 종종 그네를 타곤 했는지 전부 기억한다. 석민은 뭐든, 제가 무얼 말하는지 의식 않고 떠들었으며, 정한의 의식은 그걸 전부 담았다. 부스러기까지 모조리.
*
석민은 왜 1999년 12월 31일이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어린 나이는 참, 종잡을 수 없는 기억으로 다 큰 성인들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 당시 함께였던 다른 어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생각보다 별것 없어서. 실제로 돌아가면, 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네, 머쓱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감정은 대부분 딱, 그 찰나만을 위한 것이며, 흩어져야 할 게 뭐든 잊지 못하는 뇌에 자리 잡아 언젠가 불쑥, 사람을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둔다.
하지만 지금, 두 번째 세기말 소년은 여전히 슬프고, 무섭고, 외롭다. 지구 멸망 따위는 2012년에도 발발하지 않은, 인간들의 파괴적 낭만이 가득한 소망임을 겪었으니, 두려움의 원천은 그게 아닐 텐데. 아, 자기 감정을 명명할 수 있는 스물셋의 이석민은 짙은 의식 속에서 이십 년 동안 등골을 서늘하게 건드렸던, 마음을 뒤숭숭하게 주무르던, 위가 울렁거리게 하던 감정의 이유를 이해한다. 눈뜨면 아무것도 없을까 봐 무서워 눈을 감지도 못하던 밤, 지구 멸망이라는 키워드에 잔뜩 흥분한 아이들은 깔깔 웃을 동안 눈이 아파 몰래 훌쩍거렸던, 참 작은 소년. 다음 날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숨을 죽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석민은 아버지의 두꺼운 겉옷 지퍼를 턱 직전까지 오리고 숨의 하얀 형태를 눈으로 밟는다. 돌아가면 정한이 지구처럼, 곁에 남아있을지에 관한 의문이 그를 슬픔으로 이끈다. 석민은 성큼성큼, 아는 골목을 걷는다. 이른 어둠이 가라앉는다. 불안도 어둠의 바다에 둥실둥실 떠다닌다. 놀다가 얼굴이 빨개진 아이들이 이제 다 죽는다고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걸 본 뒤로 불안은 조금씩, 어둠처럼 짙어진다. 지구는 내일도 너희와 함께일 테지만, 정한이 형은? 어린 나는 지구에 이십 년은 더 발붙여 살 수 있었지만, 윤정한은 이석민의 중력권 안에 존재할 수 있나? 세기말 내내 사람들이 상상했던 지구처럼 펑, 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석민의 기억 속 어린 자신은 1월 1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그렇다면 다 큰 석민이 그 집을 떠났을 거고, 높은 확률로 원래의 시간 선으로 돌아갔을 테다. 일이 무사히 해결되어서? 일단 되는 대로 이곳으로 도망쳤듯, 또 되는 대로 현재로 돌아가 정한과 쇼부를 봤나. 잘 되었을까. 석민은 미래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 여행자들은 미래로 가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과거를 무한대로 되새김질하다 지쳐버린다.
석민은 열한 시쯤, 부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부모는 저들보다 훨씬 커진 아들을 안아주며,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했다. 와줘서 고마웠다. 더 있으면 좋겠지만 너도 새해를 봐야지. 잘 자라줘서 고맙고. 2020년이 된다 했지, 그때 보자, 석민아. 분명 제 또래인데, 아이를 가진 둘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석민은 코를 훌쩍였다. 석민의 손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것이라고 정성스레 짜던 장갑이 감고 있다. 주머니에는 옛날 손난로와, 문방구에서 애기들 손에 쥐여주고 남은 아폴로가 있고. 세기말의 흔적치곤 사소해서 마음에 들었다.
근처,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동네 슈퍼에서 카스 세 캔을 산 석민은-네 캔에 만 원 할인행사가 없던 시절이란- 검은 비닐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중학생 때까지 종종 그네를 타러 갔던 놀이터로 간다. 다들 제야의 종소리를 들어야 하니, 이 늦은 시간에 아마 밤말을 듣는 쥐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지나다니는데 장갑 낀 채로 맥주를 혼자 홀짝이긴 쑥스럽잖아. 동네 사람들은 이석민이 이 씨 총각의 외동아들인 줄 모를 테지만.
추운데, 모두가 멸망하길 고대하는 차가운 하늘 아래서 차가운 캔 입구에 입을 대자 소름이 오돌토돌 올랐다. 어휴, 추워. 언제 돌아가지. 거기도 춥겠지만 내 집-아니다, 월세다-이 있는데, 왜 여기서, 뭘 기다리면서. 지구 멸망은 또 한 번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몸이 달달 떨린다. 놀이터의 자그마한 시계탑은 정각을 향해 째깍째깍 나아간다. 시계가 도달하는 장소는 석민이 살던 시간이다. 시침과 이석민은 맞물리지 않는다. 1999년 12월 31일을 살아가는 다른 누구와도 맞물리지 않는다. 춥다. 외롭다. 콧물이 난다. 딱 열두 시 되면 돌아가야지, 언제로 갈까, 그것도 생각 안 했네. 형이랑 싸웠던 날? 카페에서 울음을 참고 무작정 1999년 크리스마스 직전으로 갔던 순간? 아니면 하루나 이틀 후? 형이 적당히 나를 봐줄 만한 시간에….
맥주를 두 캔째 비웠을 무렵, 시침이 세기말의 끝을 고하기 직전에 닿으니, 알코올이 들어간 혈관과 심장이 쿵쾅댄다. 텔레비전으로 세기의 시작을 기다리는 인구수의 심장 박동보다 훨씬 크게.
최후의 이동. 째깍, 2000년 1월 1일, 21세기의 시작.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지구는 잠잠하다. 두 번째 생환. 그리고 갑작스레 공기 사이로 터지는 온기, 여름의 온기, 겨울과 맞물리지 못하는, 공기를 녹이고 귀를 녹이고 불안을 녹이는 따뜻한 목소리. 지구에 부딪혀야 했을 운석의 크기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뜨거운 사랑이 지구가 아닌, 이석민에게 부딪힌다.
“석민아, 이제 믿지?”
나는 지구처럼, 세기말 후에도 네 옆에 있어. 정한이 오랜만에, 석민을 덥석 안았다. 맥주캔이 거친 모래밭 위로 떨어진다. 푹신해서, 아무 소음도 내지 않고. 따뜻하다. 시간 여행자는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 해도, 무언가를 바꾼다 해도, 미래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우리는 어쩌면 지구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석민이 울었다. 너는 이럴 때 항상 술 냄새나더라. 정한이 웃었다. 두 번의 불안이 산산이 조각난다. 운석보다 큰, 지구만 한 사랑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