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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쓰계
From 몬드

어느날 앵무새가 되어버렸다.

FOR. 쓰계님♡



1.
스케줄이 끝나고 약 한달간의 휴식이 주어졌을 때였다. 멤버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밀렸던 취미 생활을 새로 시작해보고 있었고 정한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이 밀린 잠을 숙소에서 해결한 후 본가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동안 몰아치던 스케줄로 피곤함이 극에 달해 있어서 무엇보다 수면 보충이 필요했다. 별일이 없는 이상 정한은 인터넷으로 산 숙면 베개를 처음으로 꺼내고 암막 커튼을 꼼꼼히 친 후 침대 옆 선반에 마실 물 한잔까지 야무지게 떠 놓은 후 꿀잠을 잘 예정이었다는 거다.

침대에 모로 누운 채로 위버스에 기발하고 허튼소리를 몇 자 적고, 나 이제 잔다여ㅎㅎㅎ 라는 댓 댓글도 야무지게 남겼다. 그러나 실제로 자진 않았고··· 밀린 웹툰을 보다 끝내 참을 수 없는 수면의 욕구가 몰려와 아예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을 때, 윤정한은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맴도는 걸 느꼈다.
마치 깊게 복식호흡을 할 때처럼 배가 부풀었다 꺼지는 느낌이 온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머리조차 빙글빙글, 몸에서 열이 올라 온통 가려웠다. 손바닥에 모기를 물렸을 때처럼 간지러워 온몸을 깨물고 싶기도 했고 찬물에 몸을 담그고 싶기도 했다. 아. 이상하다. 몸이 너무 이상해. 정한이 마지막 힘을 짜내 룸메이트인 승관을 부르고자 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야채곱창 먹을····, 형 어디 아파?”

아, 도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며 정한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팔에는 링거가 달려있었고 옆에는 도겸과 매니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곤 커튼을 걷으며 나타난 의사까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정한은 제가 컨디션 난조로 쓰러졌구나, 민폐였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저 링거 맞으니까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퇴원할까요,의 뜻을 담아 한 말이었는데, 다른 세 사람이 눈을 맞추더니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 괜찮아지셨으면 우선 저희 교수님 뵐게요.”

어쩐지 결단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정한은 제가 왜 교수까지 봐야 하는지 생각했다. 왜요? 우리 팬이신가? 무슨 일인 거지? 그냥 컨디션 난조가 아닌가?

“저도 같이 들어도 되나요?”
“아, 보호자시면 가능하세요.”

도겸이었다. 형. 내가 보호자로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차분히 물어보는 얼굴에 걱정이 어렸고, 거절하면 더 속상해할 게 뻔해 정한은 고민했다. 우리 도겸이.. 안 된다고 하면 아마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더 걱정하겠지. 같이 듣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정한은 그 때까진 제 증상을 가벼이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별 고민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교수님 오피스로 걸어가는 사이, 도겸이 정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별일 아닐 거라는 위로 같기도 했고 옆에 있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포근하고 기분 좋은 향이 콧등을 스쳐서 정한은 그제야 급하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2.
그렇게 듣게 된 정한의 진단명. 컨디션 난조 같은 게 아닌, 혼현의 발현이었다. 정한의 증상이 청소년들의 발현통 증상과 너무 비슷해 병원 측에서도 급히 검사했다고, 도겸과 매니저가 정한은 원인이라고 설명한 것에 오히려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다 큰 성인이 발현 증상을 보이는 것은 매우 드문 케이스이기에, 병원에서도 검사를 서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그래서 지금 제가 수인이라는 말씀···?”

“예, 혼현은 앵무새로 보이네요. 정확한 건 간이 검사 말고 정식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요.”

“앵무새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왕창 퍼붓고 싶었으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난 의사 선생님께 무례하게 굴 성격은 되지 못하는 정한이 황망한 표정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앵무새 수인으로 발현했다는 진단이 귀 안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기분이라, 내가 앵무새? 뭐? 수인? 난 28살인데? 이제서야? 정한의 얼굴로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의사가 입을 열었다.

“환자분. 선조귀환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그 뒤로 이어지는 의사의 말을 들을수록 정한의 턱이 툭, 떨어져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말도 안 돼, 현실을 부정하는 정한의 목소리 위로 환자분 진정하세요.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그를 진정시키는 의사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얹어졌다. 교수는 제 옆자리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선조귀환은 희귀한 케이스라서 필요하시면 따로 교육 프로그램도 들으실 수 있어요. 신청은 접수 카운터에서 하시면 되시고요. 모쪼록… 혼란스러우신 와중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정한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현실이었다. 꿈도 아니고 깜짝 카메라도 아닌 진짜. 당장 한 달 뒤면 다시 스케줄이 시작되고, 그 사이에 이 현실에 완전히 적응해야 했다. 불안함이 치고 올라와 얕고 빠르게 숨을 내뱉자, 도겸이 옆에서 손등 위를 도닥거렸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머릿속에 현실적인 질문들이 오고 갔다. 갑자기 앵무새로 변할 일이 있나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앵무새가 된다거나··· 혹시 노래나 말할 때 영향이 생기나요? 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많았는데 그런 게 영향을 줬을까요? 앞으로 몸이 안 좋으면 어떡하죠? 그때도 갑자기 기절할까요? 제 직업 상 그렇게 기절하면··· 물론 갑자기 기절할 때 괜찮은 직업은 없지만, 그래도, 걱정할 분들이 좀 많아서요.
정한이 두서없이 말하다가 침묵했다. 절망스러웠다. 이제야 안정된 느낌이었는데. 모든 게 불안하다가도 내가 나라서 괜찮아지는 시기가 왔다고 느꼈는데. 다시 바뀌고 있었다. 머리를 짚으며 괴로워하는 정한을 바라보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우선 노래에 영향을 주진 않을 거예요. 더 구체적인 내용은 교육 프로그램에서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음,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게, 처음으로 혼현을 보면 매우 어지러우실 겁니다. 오늘처럼 쓰러지거나 기절하지 않게 마음 단단히 먹으시고요. 한 달 정도는 혼현이 불안정하기도 하니까, 조절법을 배우셔야 해요.”

이후 듣게 된 혼현 관련 교육에서, 정말 드문 사례로 아동 ·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기에 혼현이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한의 멀고 먼 선조 중 누군가가 앵무새 수인이었고, 그 DNA가 폭탄처럼 조상들의 몸을 타고 흐르다가 자신에게 와서 빵!!!하고 터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런 선조귀환은 번식력이 좋다는 것까지 알게 되어 정한은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을 무척이나 원망하고 싶어졌다.
선조고 귀환이고 별나라 얘기 같다… 그래도 죽을병은 아니라 다행인가, 정한이 그런 생각을 하며 찌뿌둥한 눈가를 비볐다.

숙소로 돌아와 처방 받은 안정제를 먹고, 문 밖에서 도겸이 멤버들과 통화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으며 정한은 그새 다시 피곤해진 몸으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발현통 후 약 2일이 지난 날이었다. 아······, 인생 정말 쉽지 않구나.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정한이 오래 뒤척이다 까무룩 잠에 들었고, 통화를 마치고 조심히 들어온 도겸이 정한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곳엔 정한 대신 작은 앵무새 한마리가 있어서, 도겸은 놀란 숨을 삼키지 않게 조심하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3.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오자, 멤버들이 숙소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도겸의 전화를 받은 멤버들이 휴가를 보내던 중 모두 모인 모양이었다. 너희는 또 왜 왔어~, 묻자 승관이 울망해진 얼굴로 물었다.

“형 괜찮아?”

다른 멤버들도 모두 정한을 쳐다봤다. 다들 괜찮은지가 가장 궁금했나 보다. 조용해진 멤버들 사이에 앉으며 정한이 입을 열었다.

“어, 괜찮아. 자고 일어났더니 피곤이 풀렸어.”

“···몸이 아프거나 하진 않고? 뭔가 달라진 것 같다거나.”
원우가 정한에게 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은 모르겠어, 대답하며 정한이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아. 너는 나 뭐 달라진 거 보이니.

“그래, 우리 중에 수인은 도겸이 뿐이니까..”

“···도겸이 형, 정한이 형한테 뭐 보여?”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근데 아까 잘 때, 아 이거 말해도 되나···”

도겸이 정한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까지 오픈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그런 도겸에게 정한은 고갯짓으로 계속하라 끄덕였다.

“아, 그러니까··· 형이 새로 변해있었어.”

거실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모두 정한의 발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로 미간을 찌푸린 승철이 입을 열었다.

“너 기절도 했다며. 앞으로 활동 중에 또 기절할 수 있는 거 아냐? 잘 때 변하는 것도 조절해야지. TTT라도 가봐, 술 먹고 뻗었는데 새로 변하면 어떡해.”

일부러 매섭게 이야기하는 승철의 말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직은 스스로 혼현을 확인해본 적도 없고, 컨디션이 불안정하면 또 어느 때든 풀썩 기절하거나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윤정한은 한 달 동안, 반드시, 수인으로서 잘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혼현이든 뭐든 애초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손안에서 통제할 수 없으면 앞으로 있을 무대도, 노래에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한이 그런 다짐으로 고개를 들자, 도겸이 눈앞에 있었다. 팀 내 유일한 수인. 저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조건의 사람. 내가 이제 반은 앵무새고 반은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잘 해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도겸이가 필요해. 정한의 마음이 다짐으로 차올랐다.

“도겸아, 나 좀 도와줄래.”
마지막 말끝이 조금 떨려 큼큼, 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는 사이 대답이 들려왔다.

“혀어엉··· 당연하지.”

도겸이 울멍거리는 표정으로 정한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이내 품속으로 안겨 온다. 형한테 내가 아는 거 전부 알려줄게. 단단한 도겸의 목소리가 귓가로 그대로 들어왔고 따뜻한 체온이 주는 것은 깊은 안정과 신뢰라서, 정한은 그 품을 마주 안아주며 생각했다. 안겨 오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그리고 둘의 주변으로 멤버들이 모였다. 마치 둥지 같아진 모양새에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초록색 연습실이나 한 집에 모여 살던 때가 생각났다. 제가 보기엔 여전히 한없이 여린 친구들이었다. 새로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내내 옆에 있어 줄 사람들이기도 했고. 그걸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정한이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어차피 쉬운 일은 없지만서도 난 네가 있어서 모두 다 괜찮아~, 물론 흥얼거리자마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서 시끄러워졌지만.


4.
처음으로 신경이 곤두선 건 냄새 때문이었다. 일상에 익숙해지기 위해 도겸과 사람 많은 곳을 가보자는 다짐으로 나왔지만, 밴에서 내리기 전부터 찐득하고 역한 냄새를 맡았다. 선조귀환은 감각이 훨씬 예민해서 정한도 어디선가 나는 냄새로 코점막이 젖는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수족관과 동물원과 마구간과 우사의 냄새를 다 합쳐놓은 듯한 지독한 냄새였다. 아으··· 정한이 코를 막으며 앓았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그득 찬 사람들을 만나자 깨달았다. 지독한 냄새는 혼현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에겐 혼현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보던 세상이 아니었다. 역한 냄새와 정신없는 시야 속 정한은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느껴져 숨을 들이마셨다.
한계에 치달아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도겸의 팔을 붙잡았다. 처음부터 걱정한 모양이었는지, 정한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을 맞춰왔다. ‘괜찮아?’라고 묻는 게 느껴져서 정한은 그대로 도겸에게 기댔다.
머리 아파··· 작게 중얼거리자 도겸이 제게 맞춰 어깨를 내려주었다. 도겸에게서 나는 향이 어지러움을 잠재웠다. 겨우 속이 가라앉은 정한과 그런 정한에게 어깨를 내준 도겸이 나란히 인파를 지나쳤다.

······근데 원래 이렇게까지 안정감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도겸의 곁에 내내 붙어 있은지 한 달이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도겸에게 혼현 조절법을 배울 때나, 수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울 때 외에도 정한은 도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종종 앵무새로 변해 도겸의 어깨에 앉아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도겸과 붙어있으면 현기증이나 울렁거림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도겸의 팔뚝 위에 앵무새 형태로 내려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번뜩 섬칫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도겸이가 이렇게까지 편했나? 단단하고 뜨끈해서 곁에 있으면 꼭 난로 같긴 했지만, 이렇게 심적 안정을 줄 정도로 편안했나?

돌이켜보니 평소와 다르게 자각이 느려도 너무 늦었다. 자신은 도겸이에게 어떤 수인인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우선 무슨 동물인지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배웠고, 애초에 정한의 혼현 조절법이 중심이었기에 정한만 앵무새로 변했다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늦은 자각을 하자 도겸에게 가감 없이 붙어있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혼현 조절도 배운지 한달이 거의 지나 꽤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고, 처음 느꼈던 현기증 같은 감각도 최근엔 느낀 적 없다.
그러니까, 혼현이 익숙해졌는데도 자꾸 붙어있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잖아.


윤정한은 이상한 사람 같다가도 사실 매우 보편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평을 듣지만 실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고,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사랑하고 아껴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졌다. 28살에 몸속에 있던 앵무새가 폭발하듯 튀어나온 것, 그 와중에 친한 동생에게 이상할 정도로 깊은 안정을 느끼는 것. 그건 마치 몸담고 있던 안정적인 스펙트럼 밖으로 핑- 튕겨 나가는 느낌이었고 정한은 그 느낌을 치가 떨릴 만큼 싫어했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에 나 혼자 떨어지는 느낌. 그제야 불안함이 쏟아지듯 느껴졌다.

그래서 거리를 뒀다. 수인으로 살아야 하니까, 겉으로는 수인끼리 너무 친하면 안 좋지 않을까, 따위의 어설픈 이유를 대며 도겸이 장난스레 눈을 맞춰와도 다른 멤버를 찾는 척 멀어졌다. 무엇보다 더 이상 앵무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난처한 얼굴을 했을 때쯤, 정한은 도겸에게 호출당했다.
제 방으로 좀 와보라는 문자 메시지에 정한이 지금 바쁘다는 거짓말을 토독토독 치고 있으니, 승관이한테 형 누워있는 거 다 들었으니까 그냥 와라, 하는 메시지가 연달아 와서 피할 수가 없었다.


5.
“너 이제 나 필요 없냐?”
도겸의 방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러고는 정한의 어깨에 베개가 퍽- 부딪혔다. 왜 이제 나 피하는데. 두 번째로 베개가 배에 부딪혀 발밑으로 떨어졌다. 혹여 다른 방에 들릴까 봐 조용히 내리깐 목소리가 짜증이나 울분 같은 것으로 들끓고 있었다.
내가 왜 네가 필요가 없어··· 그런 말 하면 속상하지. 정한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제 발치에 떨어진 베개를 주웠다. 툭툭 털어내곤 도겸의 곁에 앉았다. 지금은 또 피하지 않는 형의 모습에 도겸은 오히려 더 열을 받았다. 아기 달래듯이 사탕 잠깐 쥐여 주면 풀릴 줄 아냐고. 저를 아직도 바보로 보는지 정한은 가끔 이렇게 다 보이는 수를 썼다.

“왜 그러는데. 말해봐.”

답지 않게 얼굴을 굳힌 차가운 어투였다. 정한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고심했다. 마음 같아선 평소처럼 하하, 웃으며 넘어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도겸이가 제게 무척 실망할 것 같았다.

정한이 숨을 짧게 쉬었다. 게임 마냥 패스나 잠시 멈춤 같은 선택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얼마만큼 솔직해질 수 있을까.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까. 제가 가진 모든 걱정을 보여주기엔 언제나 머뭇거려졌다. 자신도 아직 정의할 수 없는 불안하거나 슬프거나 걱정되거나 화나는 마음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침잠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정한은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도겸에게 모든 속을 다 털어놓기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나 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신경 쓰이게 했으면 미안하다.”
결국 정한이 짧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만 가볼게, 나 진짜 괜찮아. 방을 나가기 위해 어설프게 얘기하며 자리를 일어섰다. 한번의 보챔 없이 정한의 말을 기다리던 도겸이 정한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정한이 형, 나 봐 볼래? 응?”
도겸이 처음으로 정한을 보챘다.

“어? 나랑 한 번만 얘기하자.”

“있잖아. 이런 말 언젠가 한 것도 같긴 한데···. 형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 형이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거 내가 할게.”

그러니까 나한테 언제든 말해. 난 형 편인 거 알잖아. 그 말에 정한의 마음속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언제 화가 났냐는 듯이 따뜻하고 단단한 눈동자가 올곧이 저를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느낌,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을 녹진하게 녹이는 느낌이 났다.

“에이씨. 너 왜 이렇게 멋져.”

정한이 그런 말을 하며 눈가에 작게 맺힌 눈물을 소매로 문질러 닦아냈다. 할 말이 생길 것 같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니까 솔직해져보자.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은 채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무서워. 너랑 있으면 너를 놓고 싶지 않아. 근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으면 갑자기 내가 낯설어져.”

“···”

“앵무새 같은 게 되기 전엔··· 원래는 숨이 막히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어. 근데 이제는 너만 있으면 숨이 트여. 그리고 네가 없으면 숨이 막히고.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해. 낯설어.”

어떤 생각들은 말로 발화되면서 더욱 구체화되곤 한다. 머릿속에선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것이 입 밖으로 꺼내지며 더 확실해질 때. 정한은 말을 마친 뒤에 도겸의 표정을 살폈다. 모호하고 읽히지 않는 표정. 고해성사 같은 고백이 도겸에게 어떻게 닿을까.

도겸이 정한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강하게 껴안았다. 조용한 방안에서 도겸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도겸이 정한에게서 떨어졌다.

“형. 형이 반은 앵무새고 반은 사람이든 간에. 아니면 강아지든 토끼든, 형이 뭐가 됐든 간에 형은 여전히 윤정한이야. 그러니까 형이 느끼는 감정들은 다 괜찮아. 낯설어하지 마.”

그리고 솔직히 형은 앵무새 되기 전에도 계속 나한테 붙어 다녔거든? 그런 말을 하곤 도겸이 괜히 하하, 웃는다.

“형한테 내가 필요한 이상 한 계속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무서우면 나한테 붙어, 알겠지?”

으아아···, 정한이 감동에 찬 소리를 냈다. 도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로가 됐다. 낯선 곳에 불시착한 느낌이 한순간에 가셨다. 마음에 뿌리가 있다면, 다시 단단한 땅 위로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한은 가능하다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고, 그 순간 작은 소원을 빌었다.

“알겠어, 고마워···. 도겸아.”

마주 보았다가 한순간 둘 다 눈물 섞인 웃음이 터진 것은 찰나였다.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서로 느꼈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순간의 벅차오름이었다.


6.
감정을 추스른 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도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데 있잖아. 형은 내가 무슨 수인인지 알면 좀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음··· 응. 아무래도 너를 더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도겸의 속이 복잡해진다. 다른 사람 앞에서 혼현을 그대로 드러내는 짓은 발현 초쯤에나 해봤지, 그 뒤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형이 마음이 편해진다면, 형이 조금 더 나를 믿을 수 있게 된다면. 이 정도쯤은 감당할 수 있다는 다짐이 들었다. 무엇보다 28살에 수인이 된 정한이 형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뭔지 보여줄게. 보여주기 전엔 다들 무슨 동물인지 잘 몰라서···”

도겸이 말끝을 흐리다가 벌떡 일어나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들리는 것은 침구에서 나는 소음뿐이라, 조용해진 방 안에 정한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어떤 동물일까. 맹수? 아니면 나와 같은 새? 제게 유독 공감을 잘해준 것을 보면 아마 새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불 속 부스럭거림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진 와중, 이불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음? 저게 뭐지? 이불에서 나온 것은 커다란 털 동물이었는데, 정한이 털 동물로 변한 도겸을 빤히 쳐다보다 그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 카피바라다···”

거대한 카피바라, 아니 도겸이 그 말을 듣더니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한에게로 걸어왔다. 우와 진짜 크다… 정한이 감탄하자 정한 바로 앞에 뒷다리를 접고 앉는다. 동그래진 모양새를 보며 우와 앉았다… 다시 감탄하게 됐다. 살면서 처음으로 보는 카피바라였다.
정한이 손을 살며시 들어 카피바라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에 닿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고 들이쉬는 걸 보니 편안한 모양이었다. 도겸이는 카피바라구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첫 번째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늘 도겸에게 따뜻한 햇빛 냄새가 나던 걸 떠올렸다. 참, 도겸이 다운 동물이라는 감상이 생겼다.

도겸이 무언갈 원하는 듯이 정한을 뻔히 바라보았다. 왜인지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라 정한이 물었다. 물 먹고 싶어? 도리도리. 밥? 도리도리. 창문 열어줘? 도리도리. 그럼, 뭐지?

“아! 나도 변할까?”

그러자 카피바라가 끄덕거렸다. 정한이 눈을 감고 숨을 내쉬자, 바닥으로 떨어진 옷 속에서 카피바라보다 훨씬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나와 카피바라의 등 위로 날아가 앉았다. 카피바라가 웃음소리 같이 느껴지는 작은 울음소리를 낸 후, 완전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언어는 없이, 오직 서로의 존재로 실재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서로 누워있자 한바탕 울었기 때문인지 진이 빠져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후 형들이 조용해져 살짝 방문을 연 버논은, 카피바라와 앵무새가 나란히 잠들어있는 것을 보고 오, 와우, 놀란 후 다시 닫았다. 음··· 못 본 척해야겠다. 그리곤 형들이 깨지 않을 정도로만 노래를 틀어뒀다.

닫힌 방문 사이로 작게 노래가 흘러 들어오는 밤, 창문 밖으로는 하얀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