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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늘푸
From 윤거울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살아 있기는 한 건가? 눈을 끔뻑거리던 그 속도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몸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했다. 나보다 조금 더 큰 캡슐 안 공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 내가 깼음을 감지한 캡슐은 뚜껑을 열며 은은한 초록빛을 냈다. 살아는 있구나. 아니, 살아만 있는 게 아니라 아마 몸도 다 회복되었을 것이다. 캡슐 안에서 일어나 천장에서 나오는 빛을 잠깐 쳐다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봤다. 손목에는 전자시계 같은 것이 현재 시각을 띄워주었다. 홍지수한테 연락이 와 있었다.

‘니 방 바로 밖이니까 나와봐‘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한 채로 대충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홍지수는 늘 그렇듯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수상해 보여도 별 생각은 없을 것이다. 걘 뭐, 원래 그런 애니까.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왜 불렀는데?
“당연히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지~ 너 3일을 넘게 잠들어 있던 건 알아?“
“그럼 내 업무는 누가 봤어?!“
“Oh 정한아… 당연히 나랑 승철이가 번갈아서 맡았지~ 아무 죄도 없이 너의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홍지수가 한쪽 손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다른 쪽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눈을 살짝 뜨면서 입꼬리를 한 쪽만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홍지수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원한다는 뜻이다. 재수없게 웃어대면서 내 어깨를 칠 때부터 알았다. 아 씨발, 이새끼한테는 업무 맡기지 말라고 부탁하는 거였는데. 일이 벌어진 후에야 후회감이 몰려왔다.

“..지수야. 근데 너…“
”우리 정한이가 설마 우리의 노동을 무시하려고 하는 건가~?“
”하아, 6. 최승철이랑 5대 5 해. 계좌로 보낼게.”
“정한이는 천사네~“

홍지수가 만족스러운 듯이 나를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저 만족스럽다는 웃음은 볼 때마다 재수없다. 저 웃음을 처음 봤을 때가 내 업무를 가로채서 승진했을 때라서 그런가, 지난 일은 모두 잊고 나서 친구 관계가 되자고 했음에도 그 날의 기억은 가끔가끔씩 떠올라 나를 괴롭게 한다. 지금이야 비등비등한 지위라서 최대한 신경은 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지만, 홍지수의 사소한 행동들은 그 기억을 되살리기엔 충분했다.

“근데 너 팔 한 쪽 나가지 않았냐? 재생 됐어?”
“아니? 캡슐에서 일어나자마자 뛰쳐나갔어.”
“뭔 소릴 하는 거야?”
“짠~ 의수. 간지나잖아.”

홍지수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자랑했다. 미친 새끼. 반자동적으로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홍지수는 태연하게 웃으며 의수의 정교한 손가락을 움직여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손마냥 정교하게 움직이는 의수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상당히 기괴해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한아 알잖아. 난 전부터 정교한 신체를 꿈꿨어.”
”어쩌라고…“

언젠가는 심장을 빼고 몸의 전부를 기계로 바꿀 거야. 그 말 이후의 홍지수의 말은 비위 상해서 듣지 못할 것 같아 귀를 막고 엘레베이터를 타 급하게 1층을 누르고 내려갔다. 또라이 새끼…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또라이 새끼가 아니었으면 진작 뒤졌겠지. 이 시설에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생존자들은 100의 100이 또라이 새끼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각박한 시설에서 또라이년들이랑 섞여 지내야 된다는 뜻이다. 근데, 살아남은 나도… 아 몰라, 우울하니까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딸이랑 아내는 저 없으면 못 살아요, 제발 보내주세요…”

엘레베이타 문이 열리자마자 갖가지 통곡과 울음소리, 살려만 달라는 애원소리 같은 것들이 들리는 것을 보니 전쟁 포로들이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사람들이 모여 눈물바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음의 고통이 그대로 담긴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옴과 동시에 약한 두통이 왔다. 입술을 깨문 채 잡혀온 포로들을 쭉 둘러보자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싹싹 빌며 본인들의 요구사항을 간절하게 말했다. 살려달라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잡혀온 전쟁 포로들은 대부분 다른 막노동 시설들로 보내져 막노동을 한다. 대부분이 아니라면 이 시설에 남아 센티넬들의 가이드로 붙는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면 아마 제 나라로 돌아가겠지. 그러니까, 포로들이 심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죽는 일은 거의 없다. 최종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포로들은 왜 나한테 지랄이냐는 거다. 포로들을 지켜볼수록 귀에 박히는 괴성소리는 더욱 더 커져갔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바라보는 포로를 봤다. 저 사람은 뭔데 가만히 있는 거지? 갈 데도 없었나? 순수한 호기심이 생겨 그 포로에게 다가갔다.포로도 기척을 느낀건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민석?”

순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직접 죽여버린 이민석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내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른 순간 표정이 구겨진 듯 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계속 내 얼굴을 쳐다봤다. 저 모든 걸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아무렇지 않게 짓는 이민석의 가식이 싫다. 내가 맨 살을 잘라 피까지 본 상대가 내 앞에 서 있으니 징그럽기까지 했다. 이민석이 입을 달싹대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시도했다.

“저기, 제…”
“닥쳐, 너가 뭔데 내 앞에서 말을 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아올라 그 자리에서 손에 힘을 꽉 준 채 멱살을 잡아 노려보았다. 포로들을 포함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쳐다봤지만 그것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민석은 곤란한 표정으로 힘없이 나를 쳐다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석민인데요.”

웃음만 나왔다. 내 앞에서 겨우 생각해낸 게 자기 이름 앞글자 뒷글자 바꾸기인가? 속일거면 감쪽같이 속이던가, 이딴 성의없는 거짓말에 넘어갈 줄 알았다고 본인을 또 업신어긴 이민석에게 좋지 못한 감정은 계속 쌓여갔다.

“너, 이번엔 똑바로 말해. 댕강 썰리는 기분 다시는 느끼기 싫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썰어버렸는데, 그 채로 죽어버렸는데, 무슨 수로 돌아온 거야?”
“죄송해요. 무슨 말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 처음 봤는데, 혹시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거면 제대로 말씀해주셔야 할 거 같은데…“

슬슬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제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술술 그 사람을 속이려 들려 하지? 그것도 나한테?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손으로 이민석의 멱살을 놓았다. 이민석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나를 아까의 그 눈빛 그대로 쳐다봤다. 손이 사람의 몸을 한번에 벨 수 있을 정도의 흉기로 변형되고 있는 채로 이민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몇몇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신과 가까이 있는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정말 여기서 잘라버리게요? 사람들 다 볼 텐데.“
”넌 잘려도 아무 문제 없나봐?“
”여기서 울고불면서 살려달라고 빌까요?“
“허허, 그런 거 안 따지고 빌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에게 비겁하게 굴어놓고 끌려와서야 정의로운 척 폼 잡는 이민석에 헛웃음만 나왔다. 뭐라 해야 하지?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곳에서 관리받는 센티넬의 원칙이고 뭐고, 민간인 신분인 이민석에게 능력을 썼다. 눈을 감고 흉기로 변한 팔을 막 휘둘렀다.

썰리는 느낌이 하나도 안 난다. 아닌데? 분명 팔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서는 누군가 웅얼대며 따지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정말로 허공 위에 있었다. 꿈이 아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면 최승철 말고는 없을 것이다. 역시, 난간에서 최승철이 애타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뭐라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했으나 귀가 먹먹해져 하나도 듣지 못했다. 난간에 안전하게 착지하고 나서야, 최승철의 목소리가 귀애 닿았다.

“아아 정한아 제바알~~~!! 너가 이러면 나랑 지수까지 징계받는 거 몰라? 안 그래도 퍼질러 잔 거 때문에 엄청 혼났는데에!! 아니 물론… 니 감정을 이해 못 하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알았어, 좀만 조용히 해.“
“하… 안 그래도 우리 부서에 넷밖에 없어서 딴 부서랑 병합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우리 부서가 내세울 건 업적밖에 없었는데 이러면 어떡햐냐구…“
”…“

이성을 되찾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민석은, 정확히는 이민석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직원의 부축을 받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부축을 받고 있었으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저런 인간을 위해 인력을 써야 된다니. 저 사람이 이민석이건 아니건, 저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최악이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아파왔다. 주요 원인은 뭣도 모르고 감정에 치우쳐 능력을 마구 써댄 탓이겠지만 아무튼 저 이민석을 닮은 인간도 한 몫을 했다. 결론은 지금 엄청난 피로감과 두통이 내 멘탈을 이기기 직전이다. 아 몰라, 죽을 거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가이드를 구해 둘걸… 싶다가도 절대 구하기 싫었다.

“약 줄까?“
”됐어, 쓸모도 없는 걸 왜 먹어.“
“그럼 어쩌려구… 괜찮은 거 맞아?”
“안 괜찮아서 잘 거야.”
“아아아~! 업무 밀렸다고 했잖아!“
”이번주에만 끝내면 되잖아… 아이씨, 나도 몰라.“
“……야, 어디가!!“

귀찮게 구는 최승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엘레베이터를 겨우 잡아 탔다. 허망한 표정으로 머리채를 잡고 있는 최승철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줬다. 올라가면서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지는 엘레베이터에서 아까의 일을 상기시켰다. 다시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요동치며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민석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과 불행했던 기억이 뒤섞여 두뇌를 자극해댔다. 계속해서 머리를 조여오는 듯한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는 것 말고는 별 수를 쓸 수 없다. 스스로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민석, 나의 첫 가이드였으며 나의 마지막 가이드였다. 계속해서 감정의 찌꺼기를 만들어대는 요인이었다. 불쾌함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잠드는 것 뿐이었다. 해묵은 감정만이 담긴 한숨을 쉰 뒤 침대에 누웠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로 쭉 잤다.

최승철이 한숨 쉬며 제 방으로 들어왔다. 컴퓨터의 화면에는 밀린 업무와 실적이 없으면 다른 부서와 병합시키겠다는 관계자와의 문자 기록이 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상황을 부정해봤지만 달라질 게 없었다.

“난리난 건 괜찮아?”
“어…”
“나 없이 괜찮았어?”
“응, 이 정도는 괜찮아.”
“근데 난 왜 안 부른 건데?”
“…”

최승철은 조여오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가이드인 이지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알아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지훈을 보자마자 옛날에 이지훈이 해준 본인의 동생 얘기가 최승철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됐다.

”그냥, 너도 쉬어야 되지 않겠어?“
”형 능력은 제어하기 힘든 부류니까 어쩔 수 없지.“
”으응…“

최승철은 한동안 이지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지훈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는 3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는데 둘째랑 셋째는 외모는 꼭 닮아서 셋째의 이름은 둘째의 이름의 순서만 바꿨으면서, 성격은 정반대라 둘째는 어디 가서 사기 당할까, 셋째는 어디 가서 해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셋째는 어디 가서 해 끼치고 찝쩍대다가 죽었다고, 그게 이민석이라고. 자기는 이민석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이 말에 따르면 오늘 윤정한에 마주친 건 이지훈의 둘째 동생이다. 이지훈이 말하길, 둘째는 자기보다 본인과 동생들을 더 아낀다고, 둘째가 어디 가서 사기 안 당하고 그 심성 그대로 갖고 다치지 않기만 하면 좋겠다고, 위험한 건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그랬다. 자기가 떠날 때도 따라오지 말라며, 넷째나 잘 챙기고 자기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잘 살라고 말한 뒤 떠났다고 했으니, 이지훈이 얼마나 동생들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근데 지금 이지훈의 둘째 동생이 같은 부서인 윤정한과 관계가 개판이 아닐 리 없었는데, 최승철만 죽어나갔다. 이걸 어떻게 숨겨야 하나, 돌려보내야 하나, 그렇다면 어떤 절차를 통해 돌려보내야 하나, 온갖 고민은 최승철이 떠안았다.

부담감을 껴안은 채 졸던 최승철은 화면에 뜬 관계자의 새로은 메세지 알람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에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지훈이 이지훈 본인의 방에 간 것을 확인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메세지 내용을 확인했다.

‘윤정한씨 가이드 구했습니다. 가이드 포로들 중에서는 가장 실력 괜찮은 분이세요.‘
‘누군데요?’
‘이석민씨요.‘

비슷한 시간에 문자를 확인한 윤정한과 최승철 둘 다 놀라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했다. 3분 후 관계자에게 다른 메세지가 와 있었다.

‘죄송해요, 아무런 허락도 없이 이렇게 결정해버린 건. 근데 정한씨는 가이드 급하기도 했고 석민씨 들어가면 최소 부서 인원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부서 병합 가능성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요. 석민씨 있으면 벼르고만 있던 갱단 뿌리뽑는 것도 있을 거고요.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관계자도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 윤정한은 알겠다는 문자만을 보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승철은 알겠다는 문자와 함께 내용을 덧붙였다.

‘지훈이한테는 절대로 알려주지 마세요.’

몇 초 뒤 관계자에게 긍정적인 이모티콘과 함께 그렇게 하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최승철도 컴퓨터 전원을 꺼버린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긴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빨 사이로 부담감에 찌든 한숨이 새어나왔다.



띵동- 윤정한의 방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이드입니다. 인터폰 너머로 이석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정한은 생기 없는 눈동자로 문을 열렀다. 이석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들어오자 어이없어하며 허, 하고 탄식을 뱉었다. 이석민은 윤정한을 한 번 째려보더니 이빨로 까드득 소리를 내곤 의자에 앉아 다시 윤정한을 째려봤다. 동시에 서로를 째려본 둘은 눈이 마주쳤다.

“할 말 있어?”
“민석이 알아요?“

이석민은 윤정한과 처음으로 정상적인 대화를 하자마자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윤정한은 혀를 깨물며 눈알을 굴렸다. 침착해야 했다. 이석민은 포로로 끌려온 민간이이라 윤정한이 함부로 해를 가해서는 안 됐다. 윤정한이 뭐라 하기도 전에 이석민이 책상을 쳐 말문을 막았다.

”아냐고 모르냐고, 둘 중에 하나만 말하세요.“
“……이민석이라면 알아.”
”민석이 진짜 당신이 죽였어요?“
“아까 한 얘기를 굳이 해야 할까?“
“그럼 왜 죽였는데요,“
“난 사람 함부로 안 죽여.“
”민석이는 사람 아니였어요?!“

이석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윤정한의 멱살을 잡은 채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둘이 뒤엉킨 탓에 윤정한은 바닥에 드러누운 자세로 위에서 으르렁대는 이석민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이석민이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나온 눈물은 윤정한의 뺨에 그대로 떨어졌다. 가식떠네. 적어도 윤정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참다 못한 윤정한은 이석민을 떼어내는데만 능력을 쓰기로 결정했다. 윤정한의 손은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이석민이 본인의 양 손으로 윤정한의 양쪽 손목을 잡은 채 저지하자 빠르게 열이 식었다. 상황 파악을 한 윤정한은 쓰레기 보듯 이석민을 쳐다봤다. 윤정한이 이석민을 떼어내려고 하면 이석민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고, 이석민이 달려들면 윤정한은 한 걸음 물러나 위협했다.

“왜 말이 없어요, 책임 회피인가요?“
“나랑 이민석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잖아.“
”당신은 나랑 민석이 관계 알아요?“

윤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정한은 윤정한대로 능력을 쓴다고 지쳤고, 이석민은 이석민대로 가이딩하며 능력을 저지한다고 지쳐버렸다. 둘 다 땀으로 젖고 지친 몸인데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 이석민이 저지를 멈추고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윤정한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이석민을 두 눈 부릅뜨고 쳐다봤다. 이석민이 입에서 손을 떼자 무언가가 들어가있어 평소보다 부풀어오른 볼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윤정한은 이석민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거 아니…”
“웁, 우엑…“
”야아아아아!!!!“

이석민의 토사물은 그대로 윤정한에 얼굴에 묻었다. 윤정한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누워 역정을 내며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구토 냄새는 계속 윤정한을 자극했고, 결국 주저앉아 같이 토를 하는 신세가 됐다. 둘이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고 여는 소리가 났다. 약간 신경을 쓴 복장을 한 최승철과 홍지수가 들어오자마자 주춤했다.

“정한아, 석민씨한테…”
“정한아… 아무리 인생이 고단해도 술은 과하게 마시면 안 되지…”
“아이씨, 다 꺼져…”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bye~ 승철아,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비켜줘야지~“

홍지수는 최승철으 등을 떠밀며 윤정한의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정적만이 남은 방에서 윤정한과 이석민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석민 먼저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윤정한만이 토 냄새 가득한 방에 남았다. 혹여나 얼굴에 묻은 토사물이 어떻게 될까봐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더듬거리며 물티슈를 찾았다. 물티슈를 여러 장 꺼내 제 얼굴을 닦은 뒤 바닥에 묻은 토사물들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이석민을 불러와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한 번 더 닦은 뒤 걸레를 가져와 토사물을 다 닦아냈다. 이민석이 뇌리에 스치며 이민석이 앗아간 모든 것들이 생각났다. 이민석만 아니었으면 이석민이라는 사람과도 잘 지냈을 거고, 아니 저 인간이랑은 절대 엮이지도 않았을 거고, 지금 이딴 생각을 하면서 멍때리고 있진 않을 텐데. 허무함만이 남아 윤정한을 자꾸 괴롭혔다.

“이민석 개새끼……”




아침 일찍 윤정한은 최승철의 전화를 받고 최승철의 방으로 뛰어갔다. 최승철의 방에는 홍지수도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인 윤정한을 쳐다봤다. 최승철은 둘의 눈빛을 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바로 갱단 처리 할 거고, 인원 5명.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석민씨랑 지훈이랑 서로 모르게 해. 둘 중에 하나라도 알면 안 돼.“
“왜?”
“이민석이 지훈이 동생인 거 알지?“
”지훈이 그래서 여기 온 거잖아.“
“이민석이랑… 석민씨랑 형제야.“

윤정한은 놀란 눈이 되어 최승철을 쳐다봤고, 홍지수는 덤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석이랑 이석민이 형제라면 이지훈과도 당연히 형제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석민이 이곳에 와서 굳이 윤정한의 가이드를 하게 된 이유도 명확해진다. 윤정한은 이석민에게 약간은 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이민석이 생각나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연민과 혐오가 섞여 이석민에게 혐오의 감정을 느끼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본인이 추악하다고 느꼈다.

“지훈이는 석민씨가 자기 걱정 하나도 안 하고 잘 살면 좋겠대. 그러니까 정한아, 석민씨한테 적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최대한 숨어서 가이딩하라고 해. 나도 지훈이한테 그렇게 얘기할게.“
“……알겠어.“
“고마워.“


윤정한은 이석민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석민의 따스한 목소리와 표정은 윤정한을 보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윤정한은 이석민에게 작전에 함께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싫어요. 당신 좋은 일을 내가 왜?”
“만약 일이 끝나면…… 이민석 시신을 당장 집으로 보내줄게.“
”..치사하긴, 알겠어요.“

이석민은 현장으로 가며 윤정한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이민석의 시신은 얼마나 제대로 보존되어있는가, 이지훈도 이곳을 거쳤는가 등의 질문을 해대며 윤정한이 쉴 틈 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같은 시각 이지훈과 최승철은 익숙하단 듯 말 없이 현장까지 갔다. 이지훈과 이석민에게 어딘가에 숨어있으라고 말한 뒤, 최승철 윤정한 홍지수 셋이 모여 몰려있는 갱단들을 구경하며 작전을 짰다. 대충 누구 하나가 어그로를 끌어서 좁은 곳으로 데려온 뒤 패자! 라는 내용이었다.

“어그로 끌 사람?“
”……“
“뭐, 왜 둘 다 날 봐?”
“정한아…“
“정한 파이팅~”

윤정한은 둘에게 등을 떠밀려 하는 수 없이 갱단들에게 나아갔다. 마른 체구의 윤정한은 당연히 갱단들의 표적이 되었고, 최승철과 홍지수가 기다리고 있는 좁은 곳으로 도망치는 척 하며 갱단들의 동선을 살폈다. 갱단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한명씩 맡아 동시에 3명씩 처리했다. 최승철이 약간 휘청거리자 이지훈은 빠르게 눈치채고 조용히 최승철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석민은 이지훈의 뒷통수를 보고 의아해하며 계속 지켜보았다. 이석민은 이지훈에게로 오는 갱단이 쏜 총알을 발견했고, 몸을 날려 이지훈을 보호했다. 총알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며 저 멀리 사라졌다.

“괜찮으세요? 여기는 좀 위험한데, 다른 길로 돌아가시는게 어떠…“
”이석민?“
“지훈이형?”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셋은 당황해 앞을 보지 못했다. 이지훈은 앞이나 보라고 소리치며 최승철의 손에 깍지를 끼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이석민은 어리바리하다 윤정한이 내미는 손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치열하게 싸우며 적지 않은 양의 피를 봤다. 최승철에게 지원인력이 도착했다는 메세지가 도착했고, 최승철은 넷을 지원인력이 기다리는 넓은 곳으로 안내했다. 갱단들은 계속해서 쫓아왔고, 지원 인력들을 마주친 순간 도망가기 바빴으나 모두 잡혀버렸다. 다섯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있었다. 이지훈의 질문으로 침묵이 깨졌다.

“석민이 거기서 잘 지낼거라며.”
“…”
“넌 왜 여기 왔어? 찬이는 어쩔 거야?”
“찬이한테 돈 주고 왔어, 찬이는 잘 할 거야.“
”..찬이는 어때?“
”피곤해 보여서 힘내라고 해주고 왔어. 그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다…“

형제의 재회에 셋은 끼지 않고 조용히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석민은 중간에 눈물을 흘렸고, 이석민이 진정하고 나서야 다섯은 돌아갔다.




“..민석이 시신이요.“
”보냈어.“
”내일 출발하면 되죠?“
”어, 비행기 예약 다 해놨어.”

이석민과 이지훈은 이민석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본인의 원래 국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정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석민이 이지훈이 여기 없다고 속인 본인을 뭐라 하지 않았다.

“저기, 지훈이 여기 없다고 뻥쳐서 미안해.”
“됐어요, 잘만 살아있으면 되는거지.“
”……“

확실히 이석민은 이민석과 달랐다. 이런 사람에게 무례를 굴며 본인의 상황만 이해하려고 했던 윤정한은 본인의 태도가 쪽팔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해. 너랑 이민석은 달라. 정말로. 그렇다고 이민석을 죽인 건 네 선에서 용납하진 못하겠지만… 솔직히 난 네 상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 그래도, 소중한 걸 잃은 건 똑같으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할게.”
“왜 갑자기 착한 척 해요?”
“…”
“됐어요, 나도 미안해요. 민석이 대신에 사과할게요. 민석이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당신이 용납 못할 수도 있지만…“

윤정한과 이석민은 가만히 서 있는 상태로 10초가량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윤정한이 크게 웃으며 정적을 깨버렸다. 이석민은 당황한 얼굴로 윤정한울 쳐다봤다.

“왜, 왜요!”
“아니, 넌 왜 착한 척 하냐?”
“착한 거…? 저 별로 안 착해요.”
“나만 쓰레기 만드네?“

민망하게 웃는 이석민을 윤정한이 흐뭇하게 웃으며 쳐다보다가 이석민의 등 뒤로 다가와 백허그를 했다. 이석민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한은 계속 딱 붙어있었다.

“너 왜 이렇게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나냐?”
“네?”
“향수 뭐 써? 좋다.“

윤정한의 행동에 당황했던 이석민도 이내 웃기 시작했다. 그냥 둘 다 서로를 보고 웃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석민의 허리를 꽉 잡고 있던 윤정한은 손을 놓고 이석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