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본 그 아이는.
“이석민 일어나! 니가 어제 하도 아부지한테 깨워달라고 부탁하더만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냐~”
아직 떠지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부지가 열어놓은 문 사이로 차디찬 바닷바람이 들어 오고 있었다. 아 아부지 문 열면 바닷바람 들어온다고 그렇게 닫으라니까. 석민은 궁시렁궁시렁대면서 이불을 박차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대충 엄마가 해둔 밥으로 아침 때우니 거의 6시가 다 되어갔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면 얼추 만나기로 한 시간까진 맞춰서 갈 수 있겠다. 석민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를 등교했다. 원래 기상 시간은 7시 반이었지만 일찍 학교에 가기 위해 전날 아부지한테 부탁을 해서 아부지가 배 타러 나가시는 새벽 5시에 깨워달라고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가냐면 그건 바로 서울에서부터 이 촌구석인 우리 학교로 전학생이 오기 때문이었다.
윤정한 전학 D-3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11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아마 그날따라 날씨가 추워서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패딩까지 돌돌 말아서 수업을 듣던 노곤노곤한 오후수업이었다. 담임선생님 수업이 있던 2학년 1반의 17명 학생들은 마침 시간도 점심시간이지 반 온도도 따뜻하다 싶어 꾸벅꾸벅 졸고들 있었다. 자기 앞에서 졸고 있는 17명의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 선생님은 이런 말은 안 꺼내려고 했는데도 시작을 해서 전학생 이야기를 해주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전교생이 70명도 안 되는 이 촌구석에 이방인이 온다는 소식은 아이들의 잠을 깨기 좋은 주제였다. 만, 여자에 미친 남고생이 남고에 여자가 오면 흥분하는 것 마냥 2학년 1반은 엄청나게 들떠있어 잠을 깨고도 오히려 흥분해서 선생님께 질문 세례를 해댔다. 쌤! 여자에요 남자에요? 잘생겼어요? 이뻐요? 어디서 전학 오는 건데요? 키는 커요? 쌤!! 쌤!! 17명이 한번에 떠들어대는 소리에 선생님은 교탁을 치면서 짜증을 냈다. “야 한명씩 질문해라 쫌. 서울에서 오는 애고 이름은 윤정한. 얼굴은 전학 오면 봐라 이상. 수업 종쳤으니까 난 간다. 반장은 잠깐 쌤 따라서 교무실 좀 와라.”
반장인 석민이는 선생님을 따라서 쫄래쫄래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 문을 열고 익숙한 풍경 속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한명 있었다. 머리는 길게 길었고, 옷은 교복이 아닌 사복, 게다가 얼굴은 엄청나게 잘생긴 처음 보는 사람이…아, 전학생이구나 쟤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여기는 적어도 얼굴을 5년 이상 본 사람들이니까. 담임과 전학생은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석민에게로 와서 부탁을 하셨다. 그 부탁은 전학생은 오늘 전학 수속 처리가 되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적으로 2학년 1반의 학생이 되는 거니까 반장인 석민이보고 학교 구경 좀 시켜달라는 부탁이었다. 솔직히 석민은 좁디 좁은 학교 구경을 굳이 시켜야하나 싶었지만 묘하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전학생 때문에 그냥 얼떨결에 알겠다고 부탁받았다. 윤정한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목도리에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아 그 후드티 우리집에도 있는 건데. “윤정한…? 맞지? 나는 2학년 1반 반장 이석민이라고 해. 전학생한테 학교 구경을 시켜주는 반장이라니 쫌 웃기다. 일단 따라와.” 석민은 정한을 따라오라고 하고 학교 외관부터 구경시켜주기로 했다. 이 좁은 학교를 딱히 구경시켜줄 곳도 많이 없을 거 같지만 학교 내부부터 보여주기엔 귀찮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학교 뒤쪽의 담벼락으로 정한을 데려와서 고양이를 보여줬다.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키우는 고양이는 아니지만 가끔 나오면 먹이를 주곤했다. 정한과 담벼락 밑에 쭈그려 앉아 고양이를 놀아주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고자 자꾸 말을 걸었다. 정한은 낯선 사람이라서 그런지 거의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줬다. 나 나름 착하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정한이에게는 아직 무섭나보다 라고 생각한 석민은 울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석민의 울망한 표정을 본건지 정한은 갑자기 푸핫 웃었다. “뭐,뭐야 왜 웃어…?” “아니…ㅋㅋ네 울망한 표정이 뭔가 웃겨서. 아 미안 초면인데 표정 보고 비웃은 거 같네. 고양이 귀엽다 이름이 뭐야?” “민이…” “귀엽다 민이. 나 이제 집 가야해서 먼저 갈게 석민아 월요일에 봐.”
하나로 묶은 윤정한의 꽁지머리가 흔들리면서 사라졌다. 윤정한의 우디한 향도 살랑이면서 잔향이 남았다. 석민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은 두근거린 느낌이 뭔지 모르겠어서 10분동안 담벼락 밑에서 찬바람 맞으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윤정한 전학 D-DAY
석민은 낯가리는 정한을 위해서 환영파티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학교에 조금 일찍 와서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깜짝 파티해 주는 것처럼 정한을 위해서 환영파티를 해주겠다는 단순한 의도였다. 반장인 석민이 거의 주도적으로 밀고 나간 깜짝파티 계획이었지만 전학 전 정한을 봤던 몇몇 반 친구들이 정한의 외모를 보고 무조건 파티 찬성이라고 한 여자애들의 압박도 약간 있었다. 2학년 1반 친구들이 준비한 정한의 깜짝파티는 그냥 단순했다 칠판에 환영해 정한아 라고 적어두고 들어오면 꽃가루라도 뿌리자는 의견이었는데, 한 친구의 의견으로 계획이 조금 변경되었다. 어디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사진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오는 전학생을 위해서 반 친구들이 시간표나 급훈 등을 낚시나 농사 관련으로 바꾸고 급식도 묘하게 옛날 느낌 나는 천연식으로 바꾼 사진을 본 반 친구가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고 해서 그냥 깜짝파티에서 조금 골려주는 환영회가 되었다. 사진을 참고해서 급훈을 바꾸고 시간표도 비슷하게 만들어서 적어놨다. 시간이 흘러, 9시가 되고 칼같은 담임이 앞문을 열고 전학생인 윤정한과 같이 들어왔다. 역시 잘난 외모 때문인지 반이 술렁술렁했다. “전학생이다. 자기소개는 뭐 필요하냐? 쉬는 시간에 알아서들 물어보고, 너무 괴롭히지는 마라. 이상.” 정한은 석민의 옆자리에 앉기로 했다. 반장이니까 같이 좀 챙겨달라는 뜻이겠지. 무뚝뚝하게 자기 할 말만 전하고 나간 선생님이 문을 닫기 무섭게 반 친구들은 순식간에 정한의 옆으로 몰려왔다. 덕분에 옆에 앉은 석민까지 아이들한테 끼어서 휘둘렸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물어보는 질문 공세에 정한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질문에 답을 해줬다. 시끌시끌한 반 중심에서도 석민은 곤란해 하는 정한이의 표정을 캐치했다. 태생이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맘씨가 착한 석민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정한을 애써 무시할 수 없었다. 2학년 확성기란 별명을 가진 석민이 정한의 손을 붙잡아 채며 말했다. “한명씩 물어봐 이것들아!!!!!!!” 갑자기 찬물을 확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석민도 굳어버렸다. 난데없는 반장다운 석민의 모습에 반 친구들이 석민이를 우쭈쭈대며 귀엽다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과는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거의 7년이상 본 친구들이 많았기에 이렇게 서스럼 없이 귀염받고 놀림당하기 일쑤였다. 평소엔 이렇게 놀림당하면 어떻게 말했었더라. 석민은 정한의 앞에서 놀림받으니까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워진 듯한 느낌은 받은 석민은 손부채질을 하며 정한의 옆으로 몰려든 친구들을 자리로 내쫓았다. 아직 쉬는 시간 아니니까 나중에 물어봐 이것들아.
정한은 석민의 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고 했었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매일같이 둘이서 하교를 하고 등교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사람 하나 죽여서 이 촌구석까지 오게 된 거라고 하던데, 그런 것 치고는 잘생기지 않았나? 석민은 그 소문을 딱히 믿지는 않았다. 왜냐면, 당사자인 정한이 딱히 소문을 바로잡을 필요가 없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정한은 사람을 죽인 건 아니고 자신을 죽였다고 했다. 이것도 명백한 살인이려나 하고 슬프게 미소 짓는 얼굴이 뭔가 슬퍼 보였다. 집에 오가면서 정한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했었던 야구 유망주였는데, 작년에 뭔가 끊어지듯이 번아웃이 온 뒤로 그냥 야구에서 무작정 벗어났다고 했었다. 자신이 너무 작아 보였다고 했었다.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정한이의 표정을 본 석민은 아무 말 없이 정한을 꼬옥 안아줬다. 바닷가가 있는 마을로 온 이유는 바다가 좋다고 했었다. 할머니 집에서 자면서 본 일출 바다가 아직도 안 잊힌다는 정한의 말에 석민은 나중에 1월 1일에 일출을 같이 보러 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석민의 마음을 떼서 윤정한을 조금씩 채워 나가주었다. 11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12월이 되었다. 12월도 동네 친구처럼 매일을 붙어다녔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윤정한은 어깨 넘게 길었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냈다. 이유는 머리 말리기 귀찮다는 이유로 말이다. 크리스마스 당일엔 둘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서로에게 목도리를 선물로 주고 정한이네 할머니 집에서 고구마에 김치 얹어서 먹고 티비에서 해주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 보고. 그게 끝이었다. 석민은 정한과 둘이 보내는 관계를 뭔가 정의하고 싶었다. 정한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분명 친구라고 생각이 드는데,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는 사랑이라고 외치고 있다. 윤정한만 보면 처음 만날 그 휘날렸던 머리카락과 스쳐지나가는 그 우디한 잔향이 자꾸만 생각난다. 그래서 석민은 관계를 정의하기로 했다. 1월 1일 일출을 보러가기로 한 날 말이다. 석민은 아부지의 배를 빌린 다음. 배를 끌고 나가 남해바다 한복판에서 고백을 하기로 한다. 너무 구린가 싶었지만, 나름 남고생 석민이의 머리에서 쥐어짜 낸 고백 플랜이었다. 1월 1일이 되는 날. 새벽 4시 윤정한이랑 선착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윤정한은 처음만난 날처럼 나랑 똑같은 옷이 있는 후드티에 목도리를 하고 왔다. 같이 걸어가면서 풍기는 향기는 그날이랑 같은 향이 났다. 날짜와 장소만 바뀐 것 같았다. 바닷바람 맞아가면서 난 낚시보트는 남해바다를 가로질러 갔다.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배의 앞쪽으로 이동했다. 내년에는 고삼이니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지, 꼭 대학 합격하게 해주세요 같은 소원을 빌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곤 그냥 별 볼일 없는 일상 이야기를 했다. 아직 해가 반절정도 떴다. 여기까지 와준 아부지는 나른하신지 눈을 감고 주무시고 계셨다. 지금이 타이밍일까? 지금이 타이밍이다.
“정한아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는 너만 보면 포근한 우디향이 느껴져.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민이보고 귀엽다고 한거 그거 조금 기분이 이상했거든…그래서, 네가 친구로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음, 그러니까…나 지금 너한테 키스해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면 키스 받아줄래?”
주절주절 뇌에서 그냥 정답을 입력하는 대로 그냥 무작정 막 뱉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냅다 키스하자고 했다. 내가 윤정한한테 준 목도리를 잡고 입술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바닷바람 사이로 윤정한의 향수 냄새가 조금 났다. 윤정한 냄새. 윤정한은 키스를 거절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대한 사랑이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눈물이 났다. 1월의 바닷바람은 매섭고 추웠지만 손을 잡고 있는 우리 둘의 체온은 따뜻했다.
근데 석민아, 나 뱃멀미 하는 거 같은데…우욱. 아 윤정한 분위기 깨는데 뭐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