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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이 눈으로 보이는 날씨다. 내쉰 만큼 들어오는 공기의 온도는 시원하다 못해 아렸다. 몸을 패딩 안으로 구겨 넣게 되는 날씨가 어쩐지 묘했다. 겨울을 싫어한 적도 없지만 좋아한 적도 없었다. 그냥 사계절 중 지겹도록 오래가는 계절 그 정도의 감상에 멈췄었는데. 꼬마전구의 영롱하고 아른거리는 빛을 보니 어쩌면 꽤나 이 계절을 아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오늘은 지독한 날이었다. 커피가 엎어진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 날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뭘 해도 잘 안 되는 날. 그런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카페의 단골이 된지 3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수를 대차게 저질렀다. 별 생각 없던 뚜껑의 문제였다. 평소처럼 걷는데 느껴지는 리듬이 달랐다. 아찔한 기분이 들어 멈추려던 찰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수직 낙하했다. 바지를 적시고 석민의 신발에 퍼지던 감각.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몇 초 안 되는 순간 추운 날씨에 찬 음료를 뒤집어썼다. 바닥에 떨어지며 한 번 튕기던 컵의 가벼움이란. 석민은 바닥과 컵이 만들어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야 춥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아, 오늘 영하랬는데. 사실 그 전주부터 날씨는 영하권으로 내려 간지 오래였지만 체감한 건 처음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커피와 얼음을 보며 탄식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될지 모르겠는 어수선한 기분, 오늘의 요약이 첫 단추와 같았다.
하필 입은 바지가 또 베이지색이라 눈에 안 띌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럴 때 모른척하고 지나가주면 좋으련만. 한국인의 정이라 칭해지는 푸근한 오지랖은 석민을 지나치지 않았다. 워낙 사람들에게 살가운 석민인지라 준만큼 돌아 온 관심과 연민은 머쓱한 미소에 입꼬리가 떨릴 정도였다.
액땜했다고 생각하려구요.
이제 새해잖아요.
머쓱하게 덧붙인 말과 달리 일은 몰아닥쳤고 클라이언트는 깐깐했다. 본인들의 요구안을 전부 수용한 수정안을 맘에 안 든다며 트집을 잡아댔다. 분명히 저번 주 세심히 메모했던 점들 반영했지만 그들은 딱 한 가지 이유를 들며 석민과 팀을 몰아갔다. 이 광고가 주 소비층한테 어필될지 모르겠다니까요? 느낌이 안 오잖아. 몇날 며칠을 밤 새워 공들인 기획안이 클라이언트의 안일한 한 마디에 모두 무너졌다. 느낌이 안 온다. 이 말로 석민의 프로젝트는 몇 번이나 주춤했다. 심지어 오늘은 모델 교체건으로 팀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시장에 자리 잡게 한 장수모델을 갑자기 교체하겠다고 했다. 대체 모델은 대중에게 인지도가 현저히 부족한 신인이었다.
사장이 바뀌고 회사가 어지럽다더니 그 여파가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예상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결정권자가 바뀐다는 건 꽤 많은 영향을 미치니까. 소위 말하는 찌라시가 직원들 입에 오르내렸다. 신인이 사장의 정부라더라. 무시하고 할 일들에 매진하자며 팀원들을 독려했지만 지금까지 잡아놓은 컨셉이나 기획이 물거품 되는 건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치고, 고치고 고쳐 최종안일 줄 알았는데.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계속된 이유로 곤란에 빠트렸다. 이 회사의 큰 고객인지라 상부에서 기대가 컸고 심기를 거스르게 하지 않길 원했다. 중간에서 적당한 선의 타협을 보는 게 석민의 일이라지만 상대가 협조적이지 않으니 절로 피로해졌다.
빔 프로젝트의 빛을 맞으며 서있는 지금, 문득 오늘 아침의 재앙이 떠올랐다. 얼룩처럼 짙어지던 바닥과 색이 투과될 만큼 투명한 얼음. 서서히 보이는 제 엉성해진 바지. 회의가 끝난 다음 석민은 잠깐 일이 있다며 백화점으로 가 바지를 새로 샀다. 검은색 바지. 그런데도 바지는 여전히 베이지색에 군데군데 커피 자국이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정한을 다시 만나게 된 후로 이 건물 앞에 가끔 서본다. 처음 설계에 참여했다는 미술관. 시간을 좀처럼 낼 수 없어 안에 들어 가 본적은 없지만 깔끔하고 현대적인 외관이었다. 대학 때 정한을 챙기는 건 전적으로 석민의 몫이라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형 손 진짜 많이 가는 사람인거 알아? 그때 정한이 뭐라고 그랬더라. 그저 말없이 너털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항상 그런 식인 사람. 어물쩡 넘어갈 때가 많고 능청을 떠는 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석민의 기억에 남은 정한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건물을 보니 그동안 알던 정한을 제대로 본 적이 맞는 걸까. 그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고 만다.
정한이 독일로 유학을 간 후로 자연스레 연락은 끊겼다. 사느라 바쁘다는 게 소원해지는 제일 첫 번째 이유가 될 줄은 몰랐다. 꽤나 가깝게 지냈는데 간간이 주고받던 연락이 뜸해지더니 딱히 확인할 일이 없게 됐다. 겹치는 인맥이 있어 가끔 듣는 소식에 잘나가는 건축가가 됐다더라, 사무실에서 한 자리 제대로 차지했단 이야기가 있으면 그렇구나 싶으면서도 속이 쓰렸다. 한 번쯤은 연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번쯤은. 그러다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건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은 석민도 연락할 수 있었다. 정한이형한테 연락하고 싶은데 번호 알고 있어? 지금 번호가 맞나 해서.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이유를 들던가. 그런다 한들 누구도 석민을 의아하게 볼 사람들이 없을 텐데 그냥 어떤 괘씸함이나 회의감이 주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둘이 연락을 안 한다는 것에 지인들이 놀랐다. 그러게, 사는 게 바쁘니까. 이 대답도 꽤나 두루뭉술하단 생각을 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이것만큼 간단명료하고 정답인 것도 없었다. 사는 게 바쁘면 소홀해지는 것들이 많았고 예전 인연들은 순위의 첫 번째였다. 그게 정한이 될 줄은 몰랐는데. 정한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을까. 궁금증은 의외의 장소에서 풀렸다.
티비에 나온 정한의 얼굴은 신기했다. 아는 사람이 티비에 나오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정한의 프로필이 제 책상에 올려 졌을 땐 모든 게 낯설 정도였다. 정한은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로 잘나가는 건축가가 되어있었다. 정한의 경력엔 석민이 언젠가 스쳤던 매체 속 유명한 건물들도 있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던 그 건물. 핫플레이스가 된 건물의 설계 또한 정한이 맡았고 이슈를 노리는 매체들이 놓칠 리 없었다.
모 은행의 광고 모델로 다양한 혁신의 주인공들을 섭외한단 취지였다. 은행측에서 제시한 모델 중 하나가 정한이었다. 인지도도 나쁘지 않고 일단 선호도가 높다는 점이었다. 이유들은 그럴듯했고 석민에게 적당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다시 만난 날, 조금 놀랐었다는 걸 나중에 정한이 고백해 알게 됐지만 석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고 입을 꼭꼭 깨물던 버릇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다 말하자 정한이 그랬다. 너는 안 놀라던데. 심통이 묻어난 목소리가 귀여워서 결국 웃음은 참지 못했다.
왜 그런 걸로 삐져.
내가 뭘 삐져. 그런 거 아니라 묻는 거지.
별로 안 믿겨서
뭐가?
석민이 정한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날의 재회했던 순간, 정말로 정한이 섰을 때 석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보고 있는 얼굴이 진짜인가 싶더라고.
……
놀란 게 아니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지금 보면?
우리 맥주 먹으면서 이런 말 잘도 한다 그치.
금세 풀어진 얼굴이 배시시 웃는다. 석민은 정한의 어깨에 기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숨이 오갈 때 석민이 덧붙였다.
와인은 결혼 기념일때나 마시자. 어때?
조용히 오르내리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정한의 긴장이 석민에게까지 올곧이 닿았다. 석민이 푸스스 웃었다.
와인은 우리한테 정말 안 어울려서 그래.
그렇긴 해도 프로포즈 받은 거 치고 주변 무드가 영 그렇지 않아? 맥주에 카라멜과 땅콩에.
와 고마워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걸 따지네? 알았어. 그러면 형은 혼자 와인 마시면서 우아하게 살아.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
정한이 윗입술을 한 번,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다 말한다. 살짝 흘기던 눈이 금세 진지해졌다. 한 번쯤은 석민이 먼저 용기내보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동안 정한이 다가왔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와인보다 샴페인이 더 좋다고.
……
기념일엔 내가 샴페인 챙길게. 그리고 뭐 더 챙길까.
집?
야.
명색이 건축가인데 집은 챙겨와야지. 몸만 오려고?
석민이 놀리듯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그렇게 날로 먹으려들면 못 써. 그리고 몸만 오면 뭐 쓸 데가 있나?
많지. 아주 좋아 죽잖아, 맨날
……취소하면 못들은 걸로 서로 합의해줄 수 있어?
밝게 웃으며 정한이 석민을 끌어안았다. 으스러지게 껴안는 세기가 정한의 행복과 비례한 것 같아 저마저도 같이 들뜨고 기분이 정돈되지 않았다. 결혼이란 걸 꺼내들고 미래를 그리며 설레어하는 연인을 보니 가슴이 뜨겁게 울렁였다.
그럼 이번에는 네가 대답하게끔 내가 맨날 결혼하자고 얘기할건데. 감당 가능하면 그러던가.
아 그거 못 견디겠다. 어쩔 수 없다. 결혼 해야겠다 그냥.
이것도 우리 같네. 얼렁뚱땅.
그게 뭐야……
고마워 석민아.
사랑해. 정한의 달은 목소리가 석민의 귀를 간질였다. 작은 떨림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아 석민은 정한의 등을 토닥여줬다. 앞으로 형 곁에 내가 있을게. 무슨 일이 있던지. 그래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면 염색도 해주면서.
기묘하게 풀리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다. 내가 걷는 때만 빨간 불이고, 잘 마시던 커피는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나는 클라이언트마다 진상인 그런 날. 한 마디로 모두가 엉망 같은 날. 정한의 시간이 담긴 건물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언제부턴가 이런 습관이 생겼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불안할 때 이곳을 찾았다. 변치 않고 묵직한 것을 찾는가 했는데
저 멀리서 저를 보고 환히 웃는 저 얼굴.
그가 들였던 시간과 그려냈을 모든 희망들.
액땜했다 친다면서 긍정적으로 넘기려 들었지만 벅찼던 날. 정한의 존재를 확인하자 왈칵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석민은 정한과 함께 나란히 서 그의 작품을 바라봤다.
고스란히 남겨진 그 흔적들에서 안정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석민은 가만히 손을 잡아오는 어떤 온도를 느끼며 생각했다.
“트리가……”
“두개네.”
쌍둥이 같은 트리는 자의와 타의가 반쯤 섞여있었다. 하나는 정한이 결혼하고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자 산 트리였다. 꼬마 트리는 이미 번듯한 별도 하나 달고 있었다. 문제는 트리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인데, 석민의 것은 선물받은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세계의 행사인만큼 광고회사는 때에 맞춰 내보내거나 수정해야 할 것이 끝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하지만 신혼의 낭만을 즐길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제게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포장된 트리를 내밀던 과장님이 말했다. 이번 꺼 끝나면 좀 쉬다 와. 트리도 꾸미고.
품에 트리를 안고 왔을 때 이미 커피테이블은 다른 트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트리가 같은 업체에서 샀는지 크기며 모양까지 전부 똑같았다.
“내 거가 그래도 키가 좀 더 큰 것 같지 않아?”
“자식 대결시켜?”
“아니 겉보기에도 내 거가 마음이 담겨서 좀 더 커 보여.”
본인이 사온 걸 은근하게 티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마음이 좀 찔려서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 바라보듯 트리를 쓰다듬던 정한을 석민이 흘겼다. 팔짱을 끼다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냅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로 정한이 어리둥절해할 때 석민이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비장의 무기를 들고 왔다.
“……이게 깔창하고 뭐가 달라.”
제 트리 밑에 두꺼운 전공책을 깔아줬다. 월등히 석민의 트리가 높아졌다. 어이없단 얼굴로 정한이 단조롭게 말하자 석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상관없다는 투였다.
“지식의 높이야.”
“나 이제 좀 알겠어.”
“뭐가.”
“우리는 천생연분이야.”
“형 진짜 뜬금없어.”
“너나 나나 서로가 아니면 서로를 감당 못할 것 같단 결론이 방금 내려졌어.”
못 들을 걸 들은 얼굴로 석민이 정색했다. 티벳여우가 와도 지금으로썬 석민이 압도적인 무표정으로 승리할 것 같았다. 이 정도의 경멸은 늘 있어왔다는 것처럼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제 트리 밑에 건축 잡지를 끼워줬다. 맘만 먹으면 석민의 전공책을 한참 뛰어넘는 백과사전이 있지만 석민의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 적당히 기분만 냈다.
“중간에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정말.”
“그게 다 사랑이잖아. 그래서 싫어?”
“아 싫지는 않은데…… 근데 형은 트리 꾸밀 건 사왔어?”
“아니, 딱히 계획은 없는데. 너랑 같이 사려고 했지.”
“표정 보니까 정말인가보네.”
“원래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잖아.”
나란히 뻗은 두 발은 곧 경쾌한 리듬처럼 발끝을 톡톡 부딪힌다. 뒤로 뻗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정한이 씨익 웃는다. 저 웃음의 의미를 석민은 아주 잘 안다. 한 때 석민은 정한을 어떤 한 단어로 정의하는 건 세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알 수 없고 겉보기의 표정도 유연하게 잘 감춘다. 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상대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공략을 바꿨다. 그런 정한을 곁에서 볼 때면 이 남자를 정의하고 싶단 생각보다 불현 듯 궁금해지고는 했다. 각 사람마다 맞춰서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윤정한에게 이석민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내가 보기에 윤정한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다르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관심이자 애정인데. 각각의 모양이나 온도가 조금 다르다 판단되는 지금 제게 닿는 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물어볼까, 그러지 말아야지.
그래도 궁금한데. 우리가 그럴 사이까지는 아닐 걸.
샤프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며 머리를 헝클이던 때가 있었다. ‘그럴 사이’라는 단어가 목을 막히게 하는 답답한 물질마냥 석민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는 것 정도만 대충 인지한 채 적당히 그러나 애매한 사이로 지냈다. 정한이 독일로 간 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애매한 사이는 흐지부지 되었다만.
정한을 정의내리는 건 여전히 숙제지만 그게 석민을 옭아매진 않았다. 연애 초반엔 막역하던 우정에서 애정으로의 바뀐 만큼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좀 더 잘 알고 다른 점을 파악해야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건 스킨십의 정도일 뿐 크게 변화된 점은 없었다. 그런 걸 깨달을 때면 이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석민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정한은 정한이었다. 영화를 그닥 챙겨보지 않음에도 석민이 좋아하는 건 같이 보려고 노력한다. 굳이 따지자면 스릴러나 집중할 수 있는 재미가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지루할지언정 교훈이 있는 마이너 감성의 영화도 흔쾌히 함께했다. 분명히 취향에 맞지 않음에도 한 번 티를 내지 않고 석민에게 어땠는지 물어봐주는 남자. 석민이 왈칵하는 감정 때문에 본인이 말하고픈 걸 찾지 못하고 뭉뚱그리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잡아오는 남자. 단순한 감상만을 이야기 하다 감정이 좀 수그러들면 그제서야 터지는 좋았던 장면, 의미들을 들어주다 가끔 분위기가 처질 때면 석민이 신경 쓰지 않게 수더분한 장난을 칠 줄 아는 남자.
달랐던 게 없었다는 건 어쩌면 그동안의 정한이 늘 석민을 위했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닐까.
이제 석민은 정한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 안의 것을 연구원처럼 일일이 의미를 따지고 변화를 비교하면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사랑했다.
“꾸미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어릴 때 해본 게 전부라 뭐 꼬마전구 몇 개 두르면 그래도 분위기는 좀 나지 않나? 형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뭐 이건 어디까지나 소품이지. 메인은 따로 있어서 생각을 못했는데.”
“……불순하다.”
정한이 고개를 살짝 돌려 석민을 보며 웃는다. 영화에 나오는 빌런처럼 음흉한 웃음이 오히려 개구쟁이 같았다.
“화자의 의도는 원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거라.”
“아 내가 이상하다?”
“그렇게도 들리네. 그것도 주관적 해석이 가능하겠지?”
“됐다. 형 자식 챙겨가라. 내 자식이랑 급이 다른데 같이 놀게 놔두고 싶지 않네.”
“뭐? 나 말고 어떤 놈 자식이야. 빨리 말해. 아 빨리.”
엉거주춤 일어난 석민의 팔을 흔들며 정한이 재촉했다. 장난이 섞인 흔들거림이, 그 반동이 좋아 석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애처럼 왜 그래.”
“아 진짜인데? 진심으로 묻는 건데.”
“그래그래 계속 생각해봐 혼자. 아 힘드니까 형도 빨리 일어나.”
“일으켜주면.”
“진짜 애야?”
“그럼 크리스마스 선물 줄 거야?”
손을 털어내며 정한이 가뿐히 일어났다. 눈에 어린 은은힌 빛이 석민을 섬뜩하게 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다. 저건 분명히 뭔가 있다.
“좋은 말로 말해라.”
“벌써 좋은 말이 아니잖아요 선생님.”
“뭘 숨기는 거야 빨리.”
“아 나도 말이 안 통해서 더는 못 놀겠네.”
제 트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는 척을 하며 정한이 연기했다. 불쌍한 말투와 축 처진 입 꼬리는 석민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허,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뱉자 그게 맘에 드는지 싱긋 짓는 웃음이 부드러웠다.
“자기 자식은 알아서 잘 챙기세요. 학부모님.”
“아 뭔데!”
“메리 크리스마스.”
“윤정한! 나 궁금하면 잠 못 자는 거 알지.”
“아니. 너 잘 자.”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내가 재워서 그래.”
“무슨 소리야. 형 나 없으면 못 잔다매.”
“너도 그렇던데?”
“야 윤정한!”
유튜브를 켰다. 그제야 생각났다. 신혼집 인테리어는 전부 정한이 도맡아서 했다는 사실을. 오기가 생겨 트리대결을 얘기한 건 석민인데 제 앞의 초라한 트리는 여전히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잎을 삐죽이고 있었다. 꼬마전구만 휘두르면 될 줄 알고 의기양양 했는데, 디자인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 네이버 쇼핑창은 켜놓았지만 뭘 찾아야할지 몰랐다. 꼬마전구면 될까요? 아 그런데 제가 누굴 이겨야 돼서요. 근데 그게 좀 유명한 사람이에요. 건축가 윤정한 알죠? 아 진짠데 제가 그 사람 남편이거든요.
[저번에 준 핫초코 먹어봤는데 별로 안 달아서 좋아. 승철이도 초코를 안 좋아하는데도 잘 먹더라. 달지 않지만 적당히 깊은 걸 포인트로 잡으면 좋을 듯.]
아직 출시되지 않은 제품을 광고하기 전에 포인트를 파악해야 했다. 석민은 여러 의견을 들어야했고 가장 대중에 근접하고 가감없는 피드백을 전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결혼하기 전엔 석민의 친구인 명호와 민규가 온갖 제품들의 사용 후기를 알려줬는데, 정한을 다시 만난 후 그 역할은 모두 정한이 도맡아했다. 정한은 어떤 점을 어필하면 좋을지 까지 짚어주며 아이디어의 구상을 도왔다.
밝게 빛나는 핸드폰 액정이 밉다. 엉뚱한 곳에 쏠린 화살이 좀처럼 빠지질 않고 깊게 박혔다. 차게 식은 액정을 엄지로 문지르는 찰나동안 많은 말이 손 끝에 아른거린다. 얼마나 꾸몄어? 형 뭐 샀어? 같이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모든 걸 같이 하지만 의외의 경쟁심리는 서로에게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 날 서로의 트리를 각자 일터로 가져간 이후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 수 없었다. 오롯이 본인만이 아는 비밀.
이걸 이겨봤자 좋은 것도 없고 이길 가능성은 완전 없다는 걸 제일 잘 알았다. 솔직히 유치하단 생각이 들어 민망함에 몸이 움찔거렸다. 입에서 절로 쓴 소리가 튀어나왔다. 씁, 하며 작게 나온 추임새를 끝으로 석민은 그럴듯한 사회인으로써 고마움을 정한에게 표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했다가는 한 번의 실수로 500일 정도는 이불 찰까봐 기회비용이 더 세 악착같이 참았다.
[오늘 저녁 피자 어때?]
이런 날은 어떻게 알고 정한이 뜬금없이 석민의 사기를 북돋는 말을 한다. 피자란 말에 눈을 느릿하게 꿈뻑이던 석민이 답을 보낸다.
[왠 피자야? 형 먹고 싶어서?]
[아니 오늘 네가 왠지 피자 먹고 싶을 것 같아서.]
아, 아까까지만 해도 경쟁상대로 이겨보겠다 마음 먹은 게 창피해질 지경이다. 석민은 윗입술을 혀로 축인 후 힘 빠진 듯 웃었다. 그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아니야. 형 먹고싶은 거 먹자. 나 오늘은 별로 생각 없음.]
[핫초코 먹을래?]
[그건 싫어!]
아직 테스트 단계라 제대로 된 포장도 없는 핫초코가 이미 석민의 책상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다. 일주일 넘게 혀 끝에 초코 단맛을 달고 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주어 꾹꾹 보낸다. 어느 정도 정한도 알고 보냈을 장난이었다.
[ㅋㅋㅋㅋ 알았어. 나는 오늘 일찍 퇴근함!]
뜯기거나 아직 상자에 꽂힌 핫초코 너머로 작은 몸이지만 위풍당당 기세를 떨치는 트리가 보인다. 핸드폰을 조심히 내려놓고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그 모습을 감상했다. 각자 꾸미기 보다는 같이 꾸미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때 괜히 즐거워서 쓸데없는 제안을 서로 주고받았던 게 아닐까. 아직 석민의 트리는 어떤 장식도 붙지 않았다. 점심때 석민의 트리를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직원들이 몇가지 조언을 해주긴 했는데 그걸 조합 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아 맨몸이었다. 별도 좋고 가랜더도 좋고.
아, 작은 탄성이 석민의 입에서 새어나간다. 석민은 제 책상 가장 잘 정리된 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시간이 지나 폴라로이드는 조금 바랜 색을 하고 있었다. 사귀기 전, 그러니까 정한이 유학을 가기 전 어느 카페에 들렸던 날이었다. 이벤트랍시고 온 사람들의 폴라로이드를 찍어준다고 했다. 석민과 정한 둘 다 이런 걸 빼는 성격은 아니라 남자 둘이 갔는데 어깨동무 잘만 하고 볼까지 붙여 찍었다. 이땐 아무것도 모르던 석민의 주도적인 행동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한에게 참 못할 짓이었는데, 그럼에도 지금 담긴 사진 속 정한의 표정은 밝고 편안했다. 머리가 지금보다 좀 더 긴 것도 같고.
석민이 처음 맞는 둘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트리에게 줄 장식은 그들의 처음이었다. 정한은 저 때도 이미 석민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석민은 적극적이었고 석민이 원하는대로 관계의 모양에 협조하고 있었다. 친구 같은 형을 원하길래 서슴없는 반말도 어엉 왜? 하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으로 대답했다. 석민은 어떤 관계의 특별함에 낭만을 느끼는 타입이라 그게 제 사랑이든 석민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고. 언젠가의 정한이 말했다.
별 모양의 집게로 트리 위에 얹히듯 꽂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 속 정한이 보인다. 세심한 결 사이에 아닌 것처럼 포장해도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가 너무도 당연하게 배어있는 남자였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사라진 다음에야 깨달았다. 석민이 정한을 봤을 때 믿기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정한이 제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적인 만남이라 어쩔 수 없었을지라도 정한은 그런 것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의외로 호불호가 강해 아니면 아닌 사람이 정한이었다. 어쩌면 정한에게 연락하는 걸 계속 미뤄왔던 것도 한 때나마 특별했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지도 몰랐다. 정한에게 그저 그런 인연으로 남았다는 건 그가 딱히 기대하고 애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러나 제 앞에 나타나 싱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작게나마 안도했다. 아직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뛰는 가슴과 떨려오는 기분이 남달랐다.
저 날의 석민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폴라로이드 셔터를 누르기 전 갑자기 볼을 붙여 거리를 좁혔다. 몸이 굳고 숨을 먹는 소리가 났던 것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 당시의 즐거움과 행복함이 저때의 애 같던 제게는 제일 중요했으니까.
장식이 뭐가 중요한가. 제일 중요한 추억이 다시 돌아와 제 눈앞에 있는데.
석민은 어떤 반짝임보다 가장 빛나는 건 편안함과 따뜻함이란 걸 깨달았다. 바로 정한으로 인해.
“나는 의미가 있어. 그런데……”
형은 왜 아무것도 없어? 들고 갔던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꼬마 트리 답게 꼬마 별 하나 겨우 단 트리는 달라진 게 없었다. 석민은 정한과 트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당황한 석민과 달리 초연한 얼굴의 정한은 오히려 당당해보였다. 폴라로이드 하나 덩그러니 매달고 온 저도 할 말은 없지만 저쪽은 뻔뻔함의 극치라 황당했다.
“뭐…… 뭐 이유가 있는 거야?”
“이유는 만들면 수도 없이 생기지.”
“그래 만들어 봐. 만든 거라도 들어보자.”
“일단.”
운을 띄우는 정한의 얼굴이 진지했다. 그에 맞춰 석민의 얼굴도 들어보겠단 자세로 심각해졌다.
“바빴어.”
아
“되게 바빴지.”
“……서글프네. 직장인의 비애냐.”
“그러다가 원초적인 질문으로 들어갔지.”
정한이 트리를 석민에게 넘기고 숨기듯 뒤로 감췄던 것을 꺼냈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이쪽이 더 재밌겠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석민은 정한을 못이긴다는 걸 알았다. 푸스스 풀어지는 웃음으로 얼굴이 흐물흐물해졌다.
“숫자 뭐야?”
“로또 번호.”
“아니 트리인데 저런 걸 걸면 어떡해.”
“로또 당첨돼서 크루즈나 타자.”
석민의 트리는 의미가 있어서 그대로 놔두는 것에 합의. 타겟은 정한의 트리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인간이라고는 없어서 삐죽빼죽 모양이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손그림들이 트리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다. 전형적인 선물 모양을 그린 석민, 곰돌이를 금색 크레파스로 칠하다가 석민에게 뺏겨 얼굴은 금색, 몸은 은색이 된 정한의 아수라 곰돌이. 지팡이 사탕도 그리다가 정한의 복수로 식욕 떨어지는 색 1위인 파란색으로 칠해버린 석민의 것도 있었다. 정한이 의기양양하게 번호 몇 개를 적어 달길래 뭔가 했더니 이젠 로또까지 올려버린다. 코웃음을 치던 석민이 정한을 따라 헤드폰을 그린다.
“저건 뭐야.”
“대놓고 어필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와 못 알아보면 안 사줘도 되는 거지?”
“링크 보내줄게. 사주면 돼.”
“차단해야지.”
찰싹, 정한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하면서 죽이 좋게 받아주고 웃는 정한이었다.
“우리 결혼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그치.”
갑자기 석민을 닮은 강아지를 그린다고 바쁘던 정한의 손이 멈췄다. 석민은 정한을 닮은 괴상한 토끼 한 마리를 오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었다. 어떤 뜻도 담기지 않고 그냥 말 그대로. 애처럼 낄낄대며 웃고 즐거운 게 그때랑 다른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쁜 의도가 아니라 정말 좋아서 말하는 것이었다.
“뭐 아직 밤은 안 됐으니까. 달라진 게 없어 보일수도 있지.”
분명한 의미다. 성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라 석민이 정한을 툭 쳤다. 정한이 흐흐 웃으면서 다 그린 석민의 강아지를 칠할 색을 고른다.
“오 뭐라도 드시고 오셨나 봐요. 믿는 구석이 있나본데.”
“내일 뜬 눈으로 동 트는 거 보실 준비나 하세요.”
“에휴, 윤정한 또 먼저 골골 자는 거 재울 준비나 해야겠네.”
“나 오늘 야관문주 먹었다.”
“주무셔. 어르신.”
“너 나 못 믿어?”
“결혼식 때 형 안고 만세삼창하면서 믿는다고 사방팔방 다 얘기했거든.”
석민의 반응이 맘에 안 드는지 어느새 석민 강아지의 색이 보라색이 되었다. 이유는 없다. 지금 보니까 저를 닮은 토끼라고 그려놓은 게 초록색이라서 괘씸한 마음에 그냥 칠해버린 것이었다. 트리가 점점 괴수들의 할로윈으로 변하고 있었다.
“너 그때 나 무거웠지.”
“가볍던데. 괜찮았어. 헬스장 온 기분이더라.”
“실해, 우리 연하 남편. 맘에 들어.”
“그래, 그러니까 얼마나 만족시키려면 분발해야겠어. 근데……”
“야관문 먹었다고.”
“우리도 쿠키나 구워서 아동용 크리스마스 밤이나 보내자.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마냥.”
토끼가 먼저, 밑에는 강아지. 이름을 달아주지 않으면 새로운 크리처 탄생 같지만 서로가 서로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 동물인 건 몰라도 이석민과 윤정한인 건 알았다. 조잘조잘 얘기하면서 허헝 웃는 정한과 꽂히면 신나서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그리는 석민이 있었다.
트리에는 많은 게 달렸다. 석민 강아지, 정한 토끼 (라고 칭해지는 괴수들), 헤드폰, 로또, 지팡이 사탕, 선물상자. 석민이 좋아한다고 해리포터를 그리려다가 망해서 대충 제우스라고 얼버무린 번개흉터를 달고 있는 남자. 피자, 하트. 정성을 다해 그렸다지만 실력자들은 아니라 다소 엉성할지라도 그 맛이 살아 오히려 아기자기 추억이 담긴 트리가 되었다.
날쌘데 체력은 좋지 못하다. 석민이 내린 정한의 결론이었다. 그날 밤은 분위기를 타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보니 좀 더 깊어져서 어쩌다보니 기대 이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늦잠을 자던 석민이 눈을 뜬 건 정오나 되어서였다. 나른하게 늘어진 몸으로 정한의 품에 기댔다. 그럼 정한은 석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어렴풋한 어둠의 시야로 보였던 시간이 새벽을 훌쩍 지났었는데 이 정도면 곯아떨어진 게 맞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뻐근한 몸을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났는데, 암막커튼으로 어두운 사위. 제 옆 협탁에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가 있다. 어제 장난을 치며 꾸몄던 트리가 언제 둘렀는지 모를 꼬마전구를 입고 있었다.
“뭐야 이게……”
트리 밑에는 실바니안 토끼 두 마리가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토끼들은 인형 특유의 뻣뻣한 자세로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이벤트라는 건 대충 눈치를 채서 잠긴 목소리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한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실바니안 토끼들의 발치에 있는 선물상자가 보였다. 실바니안 보다 좀 더 큰 선물 상자는 석민의 손바닥 위에 올려놔도 아담했다. 작은 선물상자를 열자 보이는 건 미니어쳐 삼페인 모형이었다. 그마저도 얼음 양동이와 함께 갖출건 다 갖춘 모습. 준비한 게 하나도 없다더니 이런 섬세함이 있었다. 소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알아봤을 정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설펐지만 충동은 아니었던 어느 날의 프로포즈. 와인보다는 샴페인이 좋다던 정한의 말을 그는 지켰다.
샴페인과 얼음 양동이 모형을 손 안에 꾹 쥐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바깥의 빛이 밀려들어오며 선명해진 인물이 보인다. 문틀에 기대어 서있는 정한의 얼굴. 부스스한 석민과 달리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와 이미 손에는 김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와중에 잠옷은 잘 챙겨입었다. 이벤트에 감격하느라 뭘 챙겨입을 정신조차 없던 석민과 달리.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영화 뭐 볼래? 나 홀로 집에, 해리포터, 뭐 보고 싶은 거 말만 해봐. 다 봐줄게.”
“그게 다 언제적거야. 형 보고 싶은 건?”
“음……나는 가리는 거 없어. 너 보고 싶은 거 같이 보지 뭐. 우리 킹콩 볼까?”
“아 진짜.”
푸스스 웃음이 흩어진다.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아침이었다.
To 몬드
From 랄락
입김이 눈으로 보이는 날씨다. 내쉰 만큼 들어오는 공기의 온도는 시원하다 못해 아렸다. 몸을 패딩 안으로 구겨 넣게 되는 날씨가 어쩐지 묘했다. 겨울을 싫어한 적도 없지만 좋아한 적도 없었다. 그냥 사계절 중 지겹도록 오래가는 계절 그 정도의 감상에 멈췄었는데. 꼬마전구의 영롱하고 아른거리는 빛을 보니 어쩌면 꽤나 이 계절을 아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오늘은 지독한 날이었다. 커피가 엎어진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 날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뭘 해도 잘 안 되는 날. 그런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카페의 단골이 된지 3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수를 대차게 저질렀다. 별 생각 없던 뚜껑의 문제였다. 평소처럼 걷는데 느껴지는 리듬이 달랐다. 아찔한 기분이 들어 멈추려던 찰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수직 낙하했다. 바지를 적시고 석민의 신발에 퍼지던 감각.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몇 초 안 되는 순간 추운 날씨에 찬 음료를 뒤집어썼다. 바닥에 떨어지며 한 번 튕기던 컵의 가벼움이란. 석민은 바닥과 컵이 만들어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야 춥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아, 오늘 영하랬는데. 사실 그 전주부터 날씨는 영하권으로 내려 간지 오래였지만 체감한 건 처음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커피와 얼음을 보며 탄식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될지 모르겠는 어수선한 기분, 오늘의 요약이 첫 단추와 같았다.
하필 입은 바지가 또 베이지색이라 눈에 안 띌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럴 때 모른척하고 지나가주면 좋으련만. 한국인의 정이라 칭해지는 푸근한 오지랖은 석민을 지나치지 않았다. 워낙 사람들에게 살가운 석민인지라 준만큼 돌아 온 관심과 연민은 머쓱한 미소에 입꼬리가 떨릴 정도였다.
액땜했다고 생각하려구요.
이제 새해잖아요.
머쓱하게 덧붙인 말과 달리 일은 몰아닥쳤고 클라이언트는 깐깐했다. 본인들의 요구안을 전부 수용한 수정안을 맘에 안 든다며 트집을 잡아댔다. 분명히 저번 주 세심히 메모했던 점들 반영했지만 그들은 딱 한 가지 이유를 들며 석민과 팀을 몰아갔다. 이 광고가 주 소비층한테 어필될지 모르겠다니까요? 느낌이 안 오잖아. 몇날 며칠을 밤 새워 공들인 기획안이 클라이언트의 안일한 한 마디에 모두 무너졌다. 느낌이 안 온다. 이 말로 석민의 프로젝트는 몇 번이나 주춤했다. 심지어 오늘은 모델 교체건으로 팀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시장에 자리 잡게 한 장수모델을 갑자기 교체하겠다고 했다. 대체 모델은 대중에게 인지도가 현저히 부족한 신인이었다.
사장이 바뀌고 회사가 어지럽다더니 그 여파가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예상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결정권자가 바뀐다는 건 꽤 많은 영향을 미치니까. 소위 말하는 찌라시가 직원들 입에 오르내렸다. 신인이 사장의 정부라더라. 무시하고 할 일들에 매진하자며 팀원들을 독려했지만 지금까지 잡아놓은 컨셉이나 기획이 물거품 되는 건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치고, 고치고 고쳐 최종안일 줄 알았는데.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계속된 이유로 곤란에 빠트렸다. 이 회사의 큰 고객인지라 상부에서 기대가 컸고 심기를 거스르게 하지 않길 원했다. 중간에서 적당한 선의 타협을 보는 게 석민의 일이라지만 상대가 협조적이지 않으니 절로 피로해졌다.
빔 프로젝트의 빛을 맞으며 서있는 지금, 문득 오늘 아침의 재앙이 떠올랐다. 얼룩처럼 짙어지던 바닥과 색이 투과될 만큼 투명한 얼음. 서서히 보이는 제 엉성해진 바지. 회의가 끝난 다음 석민은 잠깐 일이 있다며 백화점으로 가 바지를 새로 샀다. 검은색 바지. 그런데도 바지는 여전히 베이지색에 군데군데 커피 자국이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정한을 다시 만나게 된 후로 이 건물 앞에 가끔 서본다. 처음 설계에 참여했다는 미술관. 시간을 좀처럼 낼 수 없어 안에 들어 가 본적은 없지만 깔끔하고 현대적인 외관이었다. 대학 때 정한을 챙기는 건 전적으로 석민의 몫이라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형 손 진짜 많이 가는 사람인거 알아? 그때 정한이 뭐라고 그랬더라. 그저 말없이 너털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항상 그런 식인 사람. 어물쩡 넘어갈 때가 많고 능청을 떠는 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석민의 기억에 남은 정한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건물을 보니 그동안 알던 정한을 제대로 본 적이 맞는 걸까. 그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고 만다.
정한이 독일로 유학을 간 후로 자연스레 연락은 끊겼다. 사느라 바쁘다는 게 소원해지는 제일 첫 번째 이유가 될 줄은 몰랐다. 꽤나 가깝게 지냈는데 간간이 주고받던 연락이 뜸해지더니 딱히 확인할 일이 없게 됐다. 겹치는 인맥이 있어 가끔 듣는 소식에 잘나가는 건축가가 됐다더라, 사무실에서 한 자리 제대로 차지했단 이야기가 있으면 그렇구나 싶으면서도 속이 쓰렸다. 한 번쯤은 연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번쯤은. 그러다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건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은 석민도 연락할 수 있었다. 정한이형한테 연락하고 싶은데 번호 알고 있어? 지금 번호가 맞나 해서.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이유를 들던가. 그런다 한들 누구도 석민을 의아하게 볼 사람들이 없을 텐데 그냥 어떤 괘씸함이나 회의감이 주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둘이 연락을 안 한다는 것에 지인들이 놀랐다. 그러게, 사는 게 바쁘니까. 이 대답도 꽤나 두루뭉술하단 생각을 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이것만큼 간단명료하고 정답인 것도 없었다. 사는 게 바쁘면 소홀해지는 것들이 많았고 예전 인연들은 순위의 첫 번째였다. 그게 정한이 될 줄은 몰랐는데. 정한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을까. 궁금증은 의외의 장소에서 풀렸다.
티비에 나온 정한의 얼굴은 신기했다. 아는 사람이 티비에 나오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정한의 프로필이 제 책상에 올려 졌을 땐 모든 게 낯설 정도였다. 정한은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로 잘나가는 건축가가 되어있었다. 정한의 경력엔 석민이 언젠가 스쳤던 매체 속 유명한 건물들도 있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던 그 건물. 핫플레이스가 된 건물의 설계 또한 정한이 맡았고 이슈를 노리는 매체들이 놓칠 리 없었다.
모 은행의 광고 모델로 다양한 혁신의 주인공들을 섭외한단 취지였다. 은행측에서 제시한 모델 중 하나가 정한이었다. 인지도도 나쁘지 않고 일단 선호도가 높다는 점이었다. 이유들은 그럴듯했고 석민에게 적당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다시 만난 날, 조금 놀랐었다는 걸 나중에 정한이 고백해 알게 됐지만 석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고 입을 꼭꼭 깨물던 버릇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다 말하자 정한이 그랬다. 너는 안 놀라던데. 심통이 묻어난 목소리가 귀여워서 결국 웃음은 참지 못했다.
왜 그런 걸로 삐져.
내가 뭘 삐져. 그런 거 아니라 묻는 거지.
별로 안 믿겨서
뭐가?
석민이 정한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날의 재회했던 순간, 정말로 정한이 섰을 때 석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보고 있는 얼굴이 진짜인가 싶더라고.
……
놀란 게 아니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지금 보면?
우리 맥주 먹으면서 이런 말 잘도 한다 그치.
금세 풀어진 얼굴이 배시시 웃는다. 석민은 정한의 어깨에 기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숨이 오갈 때 석민이 덧붙였다.
와인은 결혼 기념일때나 마시자. 어때?
조용히 오르내리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정한의 긴장이 석민에게까지 올곧이 닿았다. 석민이 푸스스 웃었다.
와인은 우리한테 정말 안 어울려서 그래.
그렇긴 해도 프로포즈 받은 거 치고 주변 무드가 영 그렇지 않아? 맥주에 카라멜과 땅콩에.
와 고마워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걸 따지네? 알았어. 그러면 형은 혼자 와인 마시면서 우아하게 살아.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
정한이 윗입술을 한 번,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다 말한다. 살짝 흘기던 눈이 금세 진지해졌다. 한 번쯤은 석민이 먼저 용기내보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동안 정한이 다가왔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와인보다 샴페인이 더 좋다고.
……
기념일엔 내가 샴페인 챙길게. 그리고 뭐 더 챙길까.
집?
야.
명색이 건축가인데 집은 챙겨와야지. 몸만 오려고?
석민이 놀리듯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그렇게 날로 먹으려들면 못 써. 그리고 몸만 오면 뭐 쓸 데가 있나?
많지. 아주 좋아 죽잖아, 맨날
……취소하면 못들은 걸로 서로 합의해줄 수 있어?
밝게 웃으며 정한이 석민을 끌어안았다. 으스러지게 껴안는 세기가 정한의 행복과 비례한 것 같아 저마저도 같이 들뜨고 기분이 정돈되지 않았다. 결혼이란 걸 꺼내들고 미래를 그리며 설레어하는 연인을 보니 가슴이 뜨겁게 울렁였다.
그럼 이번에는 네가 대답하게끔 내가 맨날 결혼하자고 얘기할건데. 감당 가능하면 그러던가.
아 그거 못 견디겠다. 어쩔 수 없다. 결혼 해야겠다 그냥.
이것도 우리 같네. 얼렁뚱땅.
그게 뭐야……
고마워 석민아.
사랑해. 정한의 달은 목소리가 석민의 귀를 간질였다. 작은 떨림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아 석민은 정한의 등을 토닥여줬다. 앞으로 형 곁에 내가 있을게. 무슨 일이 있던지. 그래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면 염색도 해주면서.
기묘하게 풀리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다. 내가 걷는 때만 빨간 불이고, 잘 마시던 커피는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나는 클라이언트마다 진상인 그런 날. 한 마디로 모두가 엉망 같은 날. 정한의 시간이 담긴 건물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언제부턴가 이런 습관이 생겼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불안할 때 이곳을 찾았다. 변치 않고 묵직한 것을 찾는가 했는데
저 멀리서 저를 보고 환히 웃는 저 얼굴.
그가 들였던 시간과 그려냈을 모든 희망들.
액땜했다 친다면서 긍정적으로 넘기려 들었지만 벅찼던 날. 정한의 존재를 확인하자 왈칵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석민은 정한과 함께 나란히 서 그의 작품을 바라봤다.
고스란히 남겨진 그 흔적들에서 안정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석민은 가만히 손을 잡아오는 어떤 온도를 느끼며 생각했다.
Happy x-mas
“트리가……”
“두개네.”
쌍둥이 같은 트리는 자의와 타의가 반쯤 섞여있었다. 하나는 정한이 결혼하고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자 산 트리였다. 꼬마 트리는 이미 번듯한 별도 하나 달고 있었다. 문제는 트리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인데, 석민의 것은 선물받은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세계의 행사인만큼 광고회사는 때에 맞춰 내보내거나 수정해야 할 것이 끝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하지만 신혼의 낭만을 즐길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제게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포장된 트리를 내밀던 과장님이 말했다. 이번 꺼 끝나면 좀 쉬다 와. 트리도 꾸미고.
품에 트리를 안고 왔을 때 이미 커피테이블은 다른 트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트리가 같은 업체에서 샀는지 크기며 모양까지 전부 똑같았다.
“내 거가 그래도 키가 좀 더 큰 것 같지 않아?”
“자식 대결시켜?”
“아니 겉보기에도 내 거가 마음이 담겨서 좀 더 커 보여.”
본인이 사온 걸 은근하게 티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마음이 좀 찔려서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 바라보듯 트리를 쓰다듬던 정한을 석민이 흘겼다. 팔짱을 끼다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냅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로 정한이 어리둥절해할 때 석민이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비장의 무기를 들고 왔다.
“……이게 깔창하고 뭐가 달라.”
제 트리 밑에 두꺼운 전공책을 깔아줬다. 월등히 석민의 트리가 높아졌다. 어이없단 얼굴로 정한이 단조롭게 말하자 석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상관없다는 투였다.
“지식의 높이야.”
“나 이제 좀 알겠어.”
“뭐가.”
“우리는 천생연분이야.”
“형 진짜 뜬금없어.”
“너나 나나 서로가 아니면 서로를 감당 못할 것 같단 결론이 방금 내려졌어.”
못 들을 걸 들은 얼굴로 석민이 정색했다. 티벳여우가 와도 지금으로썬 석민이 압도적인 무표정으로 승리할 것 같았다. 이 정도의 경멸은 늘 있어왔다는 것처럼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제 트리 밑에 건축 잡지를 끼워줬다. 맘만 먹으면 석민의 전공책을 한참 뛰어넘는 백과사전이 있지만 석민의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 적당히 기분만 냈다.
“중간에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정말.”
“그게 다 사랑이잖아. 그래서 싫어?”
“아 싫지는 않은데…… 근데 형은 트리 꾸밀 건 사왔어?”
“아니, 딱히 계획은 없는데. 너랑 같이 사려고 했지.”
“표정 보니까 정말인가보네.”
“원래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잖아.”
나란히 뻗은 두 발은 곧 경쾌한 리듬처럼 발끝을 톡톡 부딪힌다. 뒤로 뻗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정한이 씨익 웃는다. 저 웃음의 의미를 석민은 아주 잘 안다. 한 때 석민은 정한을 어떤 한 단어로 정의하는 건 세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알 수 없고 겉보기의 표정도 유연하게 잘 감춘다. 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상대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공략을 바꿨다. 그런 정한을 곁에서 볼 때면 이 남자를 정의하고 싶단 생각보다 불현 듯 궁금해지고는 했다. 각 사람마다 맞춰서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윤정한에게 이석민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내가 보기에 윤정한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다르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관심이자 애정인데. 각각의 모양이나 온도가 조금 다르다 판단되는 지금 제게 닿는 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물어볼까, 그러지 말아야지.
그래도 궁금한데. 우리가 그럴 사이까지는 아닐 걸.
샤프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며 머리를 헝클이던 때가 있었다. ‘그럴 사이’라는 단어가 목을 막히게 하는 답답한 물질마냥 석민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는 것 정도만 대충 인지한 채 적당히 그러나 애매한 사이로 지냈다. 정한이 독일로 간 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애매한 사이는 흐지부지 되었다만.
정한을 정의내리는 건 여전히 숙제지만 그게 석민을 옭아매진 않았다. 연애 초반엔 막역하던 우정에서 애정으로의 바뀐 만큼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좀 더 잘 알고 다른 점을 파악해야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건 스킨십의 정도일 뿐 크게 변화된 점은 없었다. 그런 걸 깨달을 때면 이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석민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정한은 정한이었다. 영화를 그닥 챙겨보지 않음에도 석민이 좋아하는 건 같이 보려고 노력한다. 굳이 따지자면 스릴러나 집중할 수 있는 재미가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지루할지언정 교훈이 있는 마이너 감성의 영화도 흔쾌히 함께했다. 분명히 취향에 맞지 않음에도 한 번 티를 내지 않고 석민에게 어땠는지 물어봐주는 남자. 석민이 왈칵하는 감정 때문에 본인이 말하고픈 걸 찾지 못하고 뭉뚱그리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잡아오는 남자. 단순한 감상만을 이야기 하다 감정이 좀 수그러들면 그제서야 터지는 좋았던 장면, 의미들을 들어주다 가끔 분위기가 처질 때면 석민이 신경 쓰지 않게 수더분한 장난을 칠 줄 아는 남자.
달랐던 게 없었다는 건 어쩌면 그동안의 정한이 늘 석민을 위했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닐까.
이제 석민은 정한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 안의 것을 연구원처럼 일일이 의미를 따지고 변화를 비교하면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사랑했다.
“꾸미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어릴 때 해본 게 전부라 뭐 꼬마전구 몇 개 두르면 그래도 분위기는 좀 나지 않나? 형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뭐 이건 어디까지나 소품이지. 메인은 따로 있어서 생각을 못했는데.”
“……불순하다.”
정한이 고개를 살짝 돌려 석민을 보며 웃는다. 영화에 나오는 빌런처럼 음흉한 웃음이 오히려 개구쟁이 같았다.
“화자의 의도는 원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거라.”
“아 내가 이상하다?”
“그렇게도 들리네. 그것도 주관적 해석이 가능하겠지?”
“됐다. 형 자식 챙겨가라. 내 자식이랑 급이 다른데 같이 놀게 놔두고 싶지 않네.”
“뭐? 나 말고 어떤 놈 자식이야. 빨리 말해. 아 빨리.”
엉거주춤 일어난 석민의 팔을 흔들며 정한이 재촉했다. 장난이 섞인 흔들거림이, 그 반동이 좋아 석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애처럼 왜 그래.”
“아 진짜인데? 진심으로 묻는 건데.”
“그래그래 계속 생각해봐 혼자. 아 힘드니까 형도 빨리 일어나.”
“일으켜주면.”
“진짜 애야?”
“그럼 크리스마스 선물 줄 거야?”
손을 털어내며 정한이 가뿐히 일어났다. 눈에 어린 은은힌 빛이 석민을 섬뜩하게 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다. 저건 분명히 뭔가 있다.
“좋은 말로 말해라.”
“벌써 좋은 말이 아니잖아요 선생님.”
“뭘 숨기는 거야 빨리.”
“아 나도 말이 안 통해서 더는 못 놀겠네.”
제 트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는 척을 하며 정한이 연기했다. 불쌍한 말투와 축 처진 입 꼬리는 석민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허,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뱉자 그게 맘에 드는지 싱긋 짓는 웃음이 부드러웠다.
“자기 자식은 알아서 잘 챙기세요. 학부모님.”
“아 뭔데!”
“메리 크리스마스.”
“윤정한! 나 궁금하면 잠 못 자는 거 알지.”
“아니. 너 잘 자.”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내가 재워서 그래.”
“무슨 소리야. 형 나 없으면 못 잔다매.”
“너도 그렇던데?”
“야 윤정한!”
유튜브를 켰다. 그제야 생각났다. 신혼집 인테리어는 전부 정한이 도맡아서 했다는 사실을. 오기가 생겨 트리대결을 얘기한 건 석민인데 제 앞의 초라한 트리는 여전히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잎을 삐죽이고 있었다. 꼬마전구만 휘두르면 될 줄 알고 의기양양 했는데, 디자인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 네이버 쇼핑창은 켜놓았지만 뭘 찾아야할지 몰랐다. 꼬마전구면 될까요? 아 그런데 제가 누굴 이겨야 돼서요. 근데 그게 좀 유명한 사람이에요. 건축가 윤정한 알죠? 아 진짠데 제가 그 사람 남편이거든요.
[저번에 준 핫초코 먹어봤는데 별로 안 달아서 좋아. 승철이도 초코를 안 좋아하는데도 잘 먹더라. 달지 않지만 적당히 깊은 걸 포인트로 잡으면 좋을 듯.]
아직 출시되지 않은 제품을 광고하기 전에 포인트를 파악해야 했다. 석민은 여러 의견을 들어야했고 가장 대중에 근접하고 가감없는 피드백을 전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결혼하기 전엔 석민의 친구인 명호와 민규가 온갖 제품들의 사용 후기를 알려줬는데, 정한을 다시 만난 후 그 역할은 모두 정한이 도맡아했다. 정한은 어떤 점을 어필하면 좋을지 까지 짚어주며 아이디어의 구상을 도왔다.
밝게 빛나는 핸드폰 액정이 밉다. 엉뚱한 곳에 쏠린 화살이 좀처럼 빠지질 않고 깊게 박혔다. 차게 식은 액정을 엄지로 문지르는 찰나동안 많은 말이 손 끝에 아른거린다. 얼마나 꾸몄어? 형 뭐 샀어? 같이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모든 걸 같이 하지만 의외의 경쟁심리는 서로에게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 날 서로의 트리를 각자 일터로 가져간 이후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 수 없었다. 오롯이 본인만이 아는 비밀.
이걸 이겨봤자 좋은 것도 없고 이길 가능성은 완전 없다는 걸 제일 잘 알았다. 솔직히 유치하단 생각이 들어 민망함에 몸이 움찔거렸다. 입에서 절로 쓴 소리가 튀어나왔다. 씁, 하며 작게 나온 추임새를 끝으로 석민은 그럴듯한 사회인으로써 고마움을 정한에게 표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했다가는 한 번의 실수로 500일 정도는 이불 찰까봐 기회비용이 더 세 악착같이 참았다.
[오늘 저녁 피자 어때?]
이런 날은 어떻게 알고 정한이 뜬금없이 석민의 사기를 북돋는 말을 한다. 피자란 말에 눈을 느릿하게 꿈뻑이던 석민이 답을 보낸다.
[왠 피자야? 형 먹고 싶어서?]
[아니 오늘 네가 왠지 피자 먹고 싶을 것 같아서.]
아, 아까까지만 해도 경쟁상대로 이겨보겠다 마음 먹은 게 창피해질 지경이다. 석민은 윗입술을 혀로 축인 후 힘 빠진 듯 웃었다. 그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아니야. 형 먹고싶은 거 먹자. 나 오늘은 별로 생각 없음.]
[핫초코 먹을래?]
[그건 싫어!]
아직 테스트 단계라 제대로 된 포장도 없는 핫초코가 이미 석민의 책상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다. 일주일 넘게 혀 끝에 초코 단맛을 달고 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주어 꾹꾹 보낸다. 어느 정도 정한도 알고 보냈을 장난이었다.
[ㅋㅋㅋㅋ 알았어. 나는 오늘 일찍 퇴근함!]
뜯기거나 아직 상자에 꽂힌 핫초코 너머로 작은 몸이지만 위풍당당 기세를 떨치는 트리가 보인다. 핸드폰을 조심히 내려놓고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그 모습을 감상했다. 각자 꾸미기 보다는 같이 꾸미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때 괜히 즐거워서 쓸데없는 제안을 서로 주고받았던 게 아닐까. 아직 석민의 트리는 어떤 장식도 붙지 않았다. 점심때 석민의 트리를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직원들이 몇가지 조언을 해주긴 했는데 그걸 조합 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아 맨몸이었다. 별도 좋고 가랜더도 좋고.
아, 작은 탄성이 석민의 입에서 새어나간다. 석민은 제 책상 가장 잘 정리된 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시간이 지나 폴라로이드는 조금 바랜 색을 하고 있었다. 사귀기 전, 그러니까 정한이 유학을 가기 전 어느 카페에 들렸던 날이었다. 이벤트랍시고 온 사람들의 폴라로이드를 찍어준다고 했다. 석민과 정한 둘 다 이런 걸 빼는 성격은 아니라 남자 둘이 갔는데 어깨동무 잘만 하고 볼까지 붙여 찍었다. 이땐 아무것도 모르던 석민의 주도적인 행동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한에게 참 못할 짓이었는데, 그럼에도 지금 담긴 사진 속 정한의 표정은 밝고 편안했다. 머리가 지금보다 좀 더 긴 것도 같고.
석민이 처음 맞는 둘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트리에게 줄 장식은 그들의 처음이었다. 정한은 저 때도 이미 석민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석민은 적극적이었고 석민이 원하는대로 관계의 모양에 협조하고 있었다. 친구 같은 형을 원하길래 서슴없는 반말도 어엉 왜? 하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으로 대답했다. 석민은 어떤 관계의 특별함에 낭만을 느끼는 타입이라 그게 제 사랑이든 석민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고. 언젠가의 정한이 말했다.
별 모양의 집게로 트리 위에 얹히듯 꽂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 속 정한이 보인다. 세심한 결 사이에 아닌 것처럼 포장해도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가 너무도 당연하게 배어있는 남자였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사라진 다음에야 깨달았다. 석민이 정한을 봤을 때 믿기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정한이 제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적인 만남이라 어쩔 수 없었을지라도 정한은 그런 것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의외로 호불호가 강해 아니면 아닌 사람이 정한이었다. 어쩌면 정한에게 연락하는 걸 계속 미뤄왔던 것도 한 때나마 특별했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지도 몰랐다. 정한에게 그저 그런 인연으로 남았다는 건 그가 딱히 기대하고 애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러나 제 앞에 나타나 싱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작게나마 안도했다. 아직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뛰는 가슴과 떨려오는 기분이 남달랐다.
저 날의 석민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폴라로이드 셔터를 누르기 전 갑자기 볼을 붙여 거리를 좁혔다. 몸이 굳고 숨을 먹는 소리가 났던 것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 당시의 즐거움과 행복함이 저때의 애 같던 제게는 제일 중요했으니까.
장식이 뭐가 중요한가. 제일 중요한 추억이 다시 돌아와 제 눈앞에 있는데.
석민은 어떤 반짝임보다 가장 빛나는 건 편안함과 따뜻함이란 걸 깨달았다. 바로 정한으로 인해.
“나는 의미가 있어. 그런데……”
형은 왜 아무것도 없어? 들고 갔던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꼬마 트리 답게 꼬마 별 하나 겨우 단 트리는 달라진 게 없었다. 석민은 정한과 트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당황한 석민과 달리 초연한 얼굴의 정한은 오히려 당당해보였다. 폴라로이드 하나 덩그러니 매달고 온 저도 할 말은 없지만 저쪽은 뻔뻔함의 극치라 황당했다.
“뭐…… 뭐 이유가 있는 거야?”
“이유는 만들면 수도 없이 생기지.”
“그래 만들어 봐. 만든 거라도 들어보자.”
“일단.”
운을 띄우는 정한의 얼굴이 진지했다. 그에 맞춰 석민의 얼굴도 들어보겠단 자세로 심각해졌다.
“바빴어.”
아
“되게 바빴지.”
“……서글프네. 직장인의 비애냐.”
“그러다가 원초적인 질문으로 들어갔지.”
정한이 트리를 석민에게 넘기고 숨기듯 뒤로 감췄던 것을 꺼냈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이쪽이 더 재밌겠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석민은 정한을 못이긴다는 걸 알았다. 푸스스 풀어지는 웃음으로 얼굴이 흐물흐물해졌다.
“숫자 뭐야?”
“로또 번호.”
“아니 트리인데 저런 걸 걸면 어떡해.”
“로또 당첨돼서 크루즈나 타자.”
석민의 트리는 의미가 있어서 그대로 놔두는 것에 합의. 타겟은 정한의 트리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인간이라고는 없어서 삐죽빼죽 모양이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손그림들이 트리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다. 전형적인 선물 모양을 그린 석민, 곰돌이를 금색 크레파스로 칠하다가 석민에게 뺏겨 얼굴은 금색, 몸은 은색이 된 정한의 아수라 곰돌이. 지팡이 사탕도 그리다가 정한의 복수로 식욕 떨어지는 색 1위인 파란색으로 칠해버린 석민의 것도 있었다. 정한이 의기양양하게 번호 몇 개를 적어 달길래 뭔가 했더니 이젠 로또까지 올려버린다. 코웃음을 치던 석민이 정한을 따라 헤드폰을 그린다.
“저건 뭐야.”
“대놓고 어필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와 못 알아보면 안 사줘도 되는 거지?”
“링크 보내줄게. 사주면 돼.”
“차단해야지.”
찰싹, 정한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하면서 죽이 좋게 받아주고 웃는 정한이었다.
“우리 결혼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그치.”
갑자기 석민을 닮은 강아지를 그린다고 바쁘던 정한의 손이 멈췄다. 석민은 정한을 닮은 괴상한 토끼 한 마리를 오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었다. 어떤 뜻도 담기지 않고 그냥 말 그대로. 애처럼 낄낄대며 웃고 즐거운 게 그때랑 다른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쁜 의도가 아니라 정말 좋아서 말하는 것이었다.
“뭐 아직 밤은 안 됐으니까. 달라진 게 없어 보일수도 있지.”
분명한 의미다. 성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라 석민이 정한을 툭 쳤다. 정한이 흐흐 웃으면서 다 그린 석민의 강아지를 칠할 색을 고른다.
“오 뭐라도 드시고 오셨나 봐요. 믿는 구석이 있나본데.”
“내일 뜬 눈으로 동 트는 거 보실 준비나 하세요.”
“에휴, 윤정한 또 먼저 골골 자는 거 재울 준비나 해야겠네.”
“나 오늘 야관문주 먹었다.”
“주무셔. 어르신.”
“너 나 못 믿어?”
“결혼식 때 형 안고 만세삼창하면서 믿는다고 사방팔방 다 얘기했거든.”
석민의 반응이 맘에 안 드는지 어느새 석민 강아지의 색이 보라색이 되었다. 이유는 없다. 지금 보니까 저를 닮은 토끼라고 그려놓은 게 초록색이라서 괘씸한 마음에 그냥 칠해버린 것이었다. 트리가 점점 괴수들의 할로윈으로 변하고 있었다.
“너 그때 나 무거웠지.”
“가볍던데. 괜찮았어. 헬스장 온 기분이더라.”
“실해, 우리 연하 남편. 맘에 들어.”
“그래, 그러니까 얼마나 만족시키려면 분발해야겠어. 근데……”
“야관문 먹었다고.”
“우리도 쿠키나 구워서 아동용 크리스마스 밤이나 보내자.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마냥.”
토끼가 먼저, 밑에는 강아지. 이름을 달아주지 않으면 새로운 크리처 탄생 같지만 서로가 서로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 동물인 건 몰라도 이석민과 윤정한인 건 알았다. 조잘조잘 얘기하면서 허헝 웃는 정한과 꽂히면 신나서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그리는 석민이 있었다.
트리에는 많은 게 달렸다. 석민 강아지, 정한 토끼 (라고 칭해지는 괴수들), 헤드폰, 로또, 지팡이 사탕, 선물상자. 석민이 좋아한다고 해리포터를 그리려다가 망해서 대충 제우스라고 얼버무린 번개흉터를 달고 있는 남자. 피자, 하트. 정성을 다해 그렸다지만 실력자들은 아니라 다소 엉성할지라도 그 맛이 살아 오히려 아기자기 추억이 담긴 트리가 되었다.
날쌘데 체력은 좋지 못하다. 석민이 내린 정한의 결론이었다. 그날 밤은 분위기를 타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보니 좀 더 깊어져서 어쩌다보니 기대 이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늦잠을 자던 석민이 눈을 뜬 건 정오나 되어서였다. 나른하게 늘어진 몸으로 정한의 품에 기댔다. 그럼 정한은 석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어렴풋한 어둠의 시야로 보였던 시간이 새벽을 훌쩍 지났었는데 이 정도면 곯아떨어진 게 맞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뻐근한 몸을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났는데, 암막커튼으로 어두운 사위. 제 옆 협탁에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가 있다. 어제 장난을 치며 꾸몄던 트리가 언제 둘렀는지 모를 꼬마전구를 입고 있었다.
“뭐야 이게……”
트리 밑에는 실바니안 토끼 두 마리가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토끼들은 인형 특유의 뻣뻣한 자세로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이벤트라는 건 대충 눈치를 채서 잠긴 목소리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한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실바니안 토끼들의 발치에 있는 선물상자가 보였다. 실바니안 보다 좀 더 큰 선물 상자는 석민의 손바닥 위에 올려놔도 아담했다. 작은 선물상자를 열자 보이는 건 미니어쳐 삼페인 모형이었다. 그마저도 얼음 양동이와 함께 갖출건 다 갖춘 모습. 준비한 게 하나도 없다더니 이런 섬세함이 있었다. 소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알아봤을 정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설펐지만 충동은 아니었던 어느 날의 프로포즈. 와인보다는 샴페인이 좋다던 정한의 말을 그는 지켰다.
샴페인과 얼음 양동이 모형을 손 안에 꾹 쥐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바깥의 빛이 밀려들어오며 선명해진 인물이 보인다. 문틀에 기대어 서있는 정한의 얼굴. 부스스한 석민과 달리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와 이미 손에는 김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와중에 잠옷은 잘 챙겨입었다. 이벤트에 감격하느라 뭘 챙겨입을 정신조차 없던 석민과 달리.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영화 뭐 볼래? 나 홀로 집에, 해리포터, 뭐 보고 싶은 거 말만 해봐. 다 봐줄게.”
“그게 다 언제적거야. 형 보고 싶은 건?”
“음……나는 가리는 거 없어. 너 보고 싶은 거 같이 보지 뭐. 우리 킹콩 볼까?”
“아 진짜.”
푸스스 웃음이 흩어진다.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