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 다른 하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 전자는 주로 ‘수인’이라고 하는 동물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 속해있고 후자는 대부분 ‘수인’이 아닌 자들이다. 물론 수인이라고 꼭 특별한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나는 건 아니다. 수인이 아닌 자라고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면 스스로 힘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다른 이의 힘이 필요하다.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나 평소에는 티가 나지 않은 자들. 우리는 이들을 ‘가이드’라고 부른다.
[윤겸] 구슬 품은 뱀
친숙한 내용이었다. 그건 석민의 생각만이 아니었는지 첫날인데도 여기저기 책상에 엎드려 자는 사람들 혹은 꾸벅꾸벅 자느라 머리를 하염없이 돌리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석민의 바로 앞에 앉은 순영과 준휘 역시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석민은 둘을 깨울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수인인 둘에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얘기들일 게 뻔해서였다. 유독 센티넬 비율이 높은 수인은 의무교육처럼 어릴 때부터 센티넬과 가이드에 관한 내용을 깊이 있게 배웠다. 즉, 지금 이 강의도 저들은 이미 수차례 듣고 배운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수인들이 왜 이 강의를 듣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수업 내용도 쉽고 과제도 없고 시험도 기말에 한번 보는, 전설이 꿀교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수업 잡으려고 별짓을 다 했지.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치열했던 수강 신청 날을 떠올리고 있을 때, 석민의 옆에 앉아있던 정한이 갑자기 석민에게 속삭였다.
“석민아, 나 삘이 왔다.”
“뭔 삘?”
“이 수업은 무조건 에이플이다.”
따봉. 석민은 자신만만하다 못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정한을 보다 볼을 볼록였다. 어이없을 때마다 나타나는 석민의 버릇이었다.
“형 재수강이라매.”
“…나 갑자기 마음이 아파.”
“형 학점이 아픈 건 아니고?”
사실적시에 정한은 심장 부근을 부여잡으며 책상 위로 쓰러졌고 정한 옆에 앉아있던 승철이 “와, 뼈 박살 났다.” 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승철 바로 뒤에 앉아있던 민규가 승철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승철이 뒤돌아보자 민규는 교수 눈치를 잠시 보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승철에게 “형도 재수강이잖아.”하고 속삭였다.
“아이고, 후배 놈들 예뻐하면 뭐하냐. 선배들 뼈나 부수는데.”
승철도 정한 따라 책상에 누우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선배들인데 말이 심했나 석민과 민규가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을 때, 민규 옆 승관이가 쇼하지 말라고 짜증 냈다.
“이참에 잘 생각이면서 무슨.”
승관의 말대로 둘은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이없어진 민규가 승철의 등을 쿡쿡 찌르고 석민이 정한의 어깨를 흔들었다. 둘은 언제 합의라도 한 것처럼 고개 한번 들지 않았다. 이대로 잠이라도 잘 생각인가 싶어 석민이 정한의 어깨에서 손을 떼는 순간, 첫날부터 시간 다 채워 수업하려는 건지 교재로 쓰일 책을 줄줄 읊던 교수가 책을 덮었다. 민규가 “오, 끝나나?” 중얼거리기 무섭게 교수가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런 이론적인 내용은 수인이라면 다들 알겠지요. 수인이 아닌 분들도 깊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아실 테고요. 그렇지만 교수인 저는 혹시나 아무것도 모를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려고 만든 강의이기도 하고요.”
혹시 잘 알고 있다 혹은 내가 수인이다, 하는 사람들은 손들고 그대로 나가세요, 하려나?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석민은 잠시 긴장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교수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석민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석민은 주변인들과 다르게 수인도, 센티넬도, 가이드도 아닌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수인이 많아 수업 내용이 친숙하긴 했지만, 능력 없는 사람 기준에서 많이 아는 거지, 수인이나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그러니 교수님이 다른 이들을 쫓아내도 석민은 앉아있을 자격이 충분했다.
속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한 석민은 가슴을 쭉 펴며 계속 칠판에 무언가를 적는 교수를 살폈다. 꽤 길게 적는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석민을 포함한 깨어있는 학생들은 교수의 그림을 알아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지만, 동그란 것과 길쭉한 것을 그렸다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교수가 치명적인 수준의 그림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지켜보니 다들 기본적인 건 다 아는 것 같아서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 이 그림 보이시나요?”
보이기만 해요, 교수님. 석민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건 민규와 승관도 마찬가지였는지 저게 지금 지렁이냐, 젓가락과 숟가락 그린 거 아니냐, 젓가락과 숟가락을 저렇게까지 못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한참을 토론했고 둘의 소곤거림이 다 들리는 석민은 난데없이 시작된 웃음 참기 챌린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보시는 것과 같이 용과 여의주입니다.”
푸흐흐. 참고 있던 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가자 석민은 급히 헛기침했다. 웃은 건 석민뿐만이 아니었는지 강의실 군데군데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교수는 다시 강의실을 쭉 둘러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수인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제처럼 의견이 분분했던 문제였죠. 누가 먼저 시작이고 누가 나중인지 알아야 왜 이렇게 진화하게 됐는지, 어떤 진화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내기 좀 더 쉬울 테니까요. 따라서 학자들은 논제와도 같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뭐, 대부분 알다시피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어요. 대신 최근 흥미로운 이야기를 고대 문서에서 발견해서 여러분께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 교수는 용 그림 옆에 ‘탑’이라는 글자를 쓰고 화살표를 그렸다.
“유적지 안에서 고대 문서가 나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국가가 관심도 없는, 본래 지명보다 동네 뒷산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산 중턱에 세워진 자그마한 탑에서 고대 문서가. 훼손은 있었지만 이런 정보가 담긴 책이 나온 건 처음이었어요. 덕분에 발견 자체만으로 학계가 크게 들썩였지요.”
우와 진짜? 신기하다. 석민이 속으로 놀라워하고 있을 때, 자는 것 같았던 정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수를 보는데 그 짧은 새에 정말 자다 일어났는지 정한의 눈이 좀 퀭해 보였다.
“우리는 발견 즉시 고대 문서가 제작된 시기 먼저 살폈습니다. 기계로 측정한 결과,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요. 훼손 흔적이 거의 없는 책은 삼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나왔거든요. 때문에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글을 해석해 나갔습니다. 사실 해석은 정보가 부족해 여전히 노력 중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여러분께 하는 이유는 센티넬과 가이드 관련 기록을 최근 해석해냈기 때문이에요. ”
교수는 이번에는 그림 위에 ‘용이 되는 방법’이라고 썼다. 용이라는 단어를 알아본 학생들이 크게 술렁였다. 별별 수인이 다 존재했지만, 용은 상상 속 동물이고 그 말인즉슨 용 수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석민은 혹시 비유법이지 않을까 싶어 교수를 뚫어지라 쳐다봤으나 교수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석민의 예상을 벗어났다.
“용은 상상 속 동물이죠? 그러나 그 기록에 따르면 용 수인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죠. 이 이무기 수인이 여의주를 얻게 되면 용 수인이 된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건 문서에 따르면 앞에서 말한 여의주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동물도 아닌 사물 수인이라…, 신기하죠? 그래서 저희는 이게 정말 수인을 말하는 게 아닌 센티넬과 가이드를 말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센티넬이랑 가이드라는 명칭이 생긴 건 19세기에 이르러서였으니까요. 가이드의 제어 없이는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센티넬. 여의주 없이는 용이 되지 못하는 이무기. 제 말, 그럴싸하지 않나요?”
정말 그럴싸했다. 다만, 석민이 알기로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세기였다. 그전에는 동서양 할 것 없이 그 어떠한 기록에서도 센티넬과 가이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게 석민이 알고 있는 센티넬과 가이드 지식인데 한국에서 나온 기록으로 전 세계 기본 지식이 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석민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다음 이어지는 교수의 말에 석민의 눈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 모든 건 추측일 뿐이고 누군가가 지어낸 전래동화일 수도 있다는 교수의 말 때문이었다. 실망한 건 석민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김빠진 얼굴을 지었다.
“다들 첫날부터 자길래 한번 해본 소리입니다.”
첫날부터 강의시간 꽉꽉 채워 수업하려고 하시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석민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이제 마치겠다는 교수의 말에 불만은 순식간에 지우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정한에게 얼른 일어나자고 신호를 보내려는데 정한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냥 또 이 수업을 들을 생각하니까 귀찮아서.”
“그러게 누가 술 먹고 시험 째래.”
“석민아, 형 심장이 오늘따라 너무 아파. ”
끄어엉. 정한이 다시 책상에 엎어졌고 석민은 수업 끝났으니 얼른 일어나라며 정한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 여파로 진짜 자고 있던 승철이 놀라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벌떡 일어났고 똑같이 계속 졸던 순영과 준휘 역시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잠에서 깼다.
“선배들 이참에 동아리방이나 갈까요.”
수업 시간에 자는 모습만 보여주는 선배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승관이 말했다. 민규 역시 할 일 없으면 동아리방이나 가서 누워있자고 했다. 그러자 석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는 빠져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우리…, 데이트.”
히히…. 머쓱하게 웃는 모습에 승관과 민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커플이라고 자랑하냐?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석민은 뒷머리를 연신 긁적이다 정한을 다시 재촉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벌써 일어나있었다. 석민은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이 웃는 정한을 보고 어이가 없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가 뭐라고 해도 좋겠지, 싶어서였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은 오래됐으나 연인 단계까지 발전한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
둘의 첫 만남은 정한의 이삿날이었다. 한참 비어있던 석민의 옆집에 드디어 사람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생긴 석민이 옆집 탐방하러 갈 때였다. 분주한 어른들 사이 멍하니 서 있는 정한과 눈이 마주친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정한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석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코앞까지 왔을 때, 정한이 “안녕.”하고 인사했다. 석민도 똑같이 “안녕?”하고 인사하자 내내 무표정이던 정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때 이후로 정한은 매일같이 석민과 함께했다. 나이 차이가 있어 석민이 유치원 다닐 때 정한이 초등학생이 되고, 초등학생일 때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일 때 고등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일 때 대학생이 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지만, 정한은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도 마다하고 언제나 석민의 곁을 지켰다. 소꿉친구와 노는 게 가장 재밌다는 게 이유였다. 석민 역시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도 좋았으나 어릴 때부터 함께한 정한 곁이 가장 편했으므로 매일같이 둘이 만나 놀고, 배고프면 같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 침대에 누워 같이 자고는 했다. 그렇게 평범하면 평범하고 끈끈하면 끈끈한 시간을 보내고 둘 다 성인이 되었을 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언젠가부터 정한을 볼 때마다 심장 부근이 간질간질하는 걸 석민이 깨달았을 때부터였다.
처음 석민은 혹시나 제 마음이 들킬까 봐 정한을 피했었다. 문제는 둘은 어릴 때부터 정말 특별한 일 아니고는 매일같이 붙어 다녔으므로 석민의 변화는 지나가던 동네 주민도 알 정도 부자연스러웠다. 석민 역시 눈치가 없지 않았기에 혹시 정한과 싸웠냐고 동아리 회장인 승철이 물어보자마자 정한을 피하는 건 포기했다. 대신 곁에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 제 마음을 숨겨보려고 했다. 물론 이 방법 역시 같은 동아리 회원인 민규가 너 혹시 정한이 형 좋아하냐 물어봄과 동시에 폐기해야 했다.
피해도 티가 나, 평소처럼 붙어있어도 티가 나. 이를 어쩌냐, 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정말 최후에만 쓰려고 숨겨놨던 방법을 꺼냈다. 바로 군대에 가는 거였다. 실제로 석민은 군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일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군대 신청을 노렸으나 자원입대 신청하기 전에 정한에게 들켜 그것마저 하지 못하게 됐다. 너 군대 가면 나도 같이 갈래 하는 정한의 말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해?”
“형 나 따라 군대 갈 거라고 했던 거 생각 중.”
“아, 그때?”
“그때 진심은 아니었지?”
“아니, 진심이었는데.”
따뜻한 차를 호록 마시며 정한이 말하자 석민이 입이 쩍 벌어졌다. 장난기 하나 없는 태연한 말투에서 진실성이 느껴져서였다.
“형이 군대를 왜 가. 형 수인이잖아.”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수인이래도 힘이 없어서 군대에 가야 했다니까? 그런데 네가 간다니까 겸사겸사 따라가려고 했지.”
“서른까지 유예기간 있으면서.”
“나 겨울만 되면 힘없어서 똬리 틀고 겨울잠 자는 거 많이 봤으면서 그런다.”
정한의 말대로 뱀 수인인 정한은 다른 수인들과 달리 특별한 힘이 없었다. 드문 사례였으나 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석민은 처음 정한에게 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그냥 형은 가끔 추우면 뱀으로 변하는, 자기처럼 아무 능력 없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정한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석민이 좋았는지 그때부터 석민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다.
“그래도 수인은 보통 기관에서 대체복무하지 않아? 혹시 모르니까.”
“능력 없다는 거 법적으로 증거 보여주고 자원입대하면 일반 군대도 들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냐는 거지.”
“석민이랑 함께하고 싶으니까-”
정한이 석민을 보고 칭얼거렸다. 석민이 자신의 칭얼거림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아, 알겠어. 이번에 군대 같이 가. 나중에 힘들다고 딴소리하기 없기야?”
“히히.”
정한은 말 그대로 히히 웃었다. 이번 학기 끝나고 둘이 함께 군대를 다녀오기로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석민은 빨리 군대를 다녀와야 했고, 힘이 없는 정한도 언젠가는 대체복무라도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언제 다녀오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정한 게 이번 여름이었다.
같이 군대 가는 게 그렇게도 좋은가. 석민은 제 앞에 놓인 차가운 커피를 호록 마시며 정한에게 고백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정한은 석민에게 난 언제나 너랑 함께하고 싶다며 칭얼거렸고, 석민이 자기도 똑같다며 받아주니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한 역시 자신을 좋아할 줄 몰랐던 석민은 그저 어이없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형 대체 나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전에도 물어보지 않았나?”
“안 믿겨서 그렇지. 어떻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해.”
“그게 왜 말이 안 돼.”
“형이 맨날 장난치니까 그러지.”
“아이, 진짜래도.”
정한은 석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노라고 고백했다. 분명 처음 봤을 때부터였다고 그렇게 고백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석민의 키가 자기보다 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하기도 했고 다치고 우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석민이 엥, 진짜? 라고 물으면 배시시 웃으며 거짓말~ 하고 넘어갔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석민은 자신을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정한의 말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 의심하지 않는 게 있다면 정한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형, 이번에 군대 가기 전에 같이 바다 보러 갈래?”
“좋지.”
“산은?”
“그것도 좋지.”
“계곡은?”
“같이 가면 다 좋아.”
헤헤, 웃는 정한을 따라 석민이 히히, 웃었다. 둘 사이를 잘 아는 동아리 부원들이나 동기들이 봤으면 제 손으로 눈 찌르고 지나갈 장면이었다.
*
석민과 정한이 동아리방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매번 문을 벌컥 여는 부원들과 달리 똑똑 노크하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석민과 정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로.”
“헬로는 뭔 헬로야, 인마! 잘 지냈어?”
“맞아, 형. 연락도 없고, 연락해도 안 받아서 무슨 비밀업무라도 하는 줄 알았다니까? 잘 지낸 거 맞지?”
동아리방으로 들어온 건 지수였다. 조슈아 지수 홍. 원래는 미국인이었으나 교환학생으로 정한과 석민의 대학으로 왔고, 우연히 승철과 정한이랑 친해지게 되며 동아리에 가입까지 한 케이스였다. 때문에 석민과 지수의 첫 만남은 동아리방으로 처음 들어올 때였는데, 어떤 동아리인지 승철의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수가 명쾌하게 말했다. “놀고먹는 곳이네!” 그 말에 석민은 낯선 사람을 만나 잔뜩 긴장했던 몸을 풀고 꺽꺽 웃었다. 지수 말대로 이 동아리는 놀고먹기 위해 승철이 ‘사색 동아리’ 같은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붙여 만든 곳이었으니까.
“석민아, 영화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그런가…? 그런데 형 하도 연락이 없어서 그렇지!”
“자꾸 시차 안 맞게 전화하니까 못 받지.”
“그, 그래도 문자는 할 수 있잖아!”
“문자 잘 안 봐서.”
쏘리~ 지수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석민에게 사과했고 석민은 떨떠름하게 받았다. 그러나 정한은 뭔 쏘리는 쏘리냐고 지수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야, 아야. 정한이 휘두르는 주먹을 그대로 맞은 지수는 괜히 앓는 소리를 내다가 비밀리에 하는 업무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을 돌렸다.
“…진짜 미국은 모든 일이 다 비밀업무야?”
“아무래도 센터가 그런 곳이니까. 그런데 석민아, 그건 너희 군대도 비슷할걸? 절대 영화 같은 건 아니고.”
지수는 석민이 삼학년이 되기 전, 수인으로서 미국 센터에 입대했다. 군 복무가 의무가 아닌 미국에서도 수인이 센터에 입대하는 건 의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상황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라 동아리 부원 전부가 지수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는 시차가 달라 받지 못했고 문자는 안 읽고 씹었다. 오죽하면 이거 혹시 죽은 거 아니냐? 하고 승철이 짜증 섞인 걱정의 말을 뱉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왔네. 석민과 정한이 반가움 반, 서운함 반 마음으로 지수를 반길 동안 동아리방 문이 다시 열렸다. 승철을 비롯한 다른 동아리 부원들이었다.
“야 이 새끼!”
승철이 지수에게 달려듦과 동시에 동아리방이 시끌시끌했다. 이미 한 차례 지수를 반긴 정한과 석민은 뒤로 빠져 폭력과 욕설이 난무한 환영식을 구경했다.
“아! 아무도 안 말려?”
처음에는 주먹이 날라오면 그대로 맞아주고 욕설이 날아오면 웃으며 넘기던 지수가 시간이 지나도 수위가 줄어들지 않자 냅다 짜증 냈다. 그러자 승철의 주먹이 잠시 멈추더니 “네가 연락을 잘 받던가.”하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센터 복무 아직 안 끝나지 않았어?”
지수를 가볍게 한 대만 때리고 뒤로 빠졌던 원우가 질문했다. 원우의 말에 지수를 찌르고 때리던 모두가 하던 짓을 멈추고 지수를 쳐다봤다. 그건 정한과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니 이상해서였다. 미국 센터 복무 기간은 2년. 지수가 복무하러 미국으로 돌아간 게 아직 반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지원 차 파견 왔어.”
“무슨 문제?”
“자세한 건 말 못 하지만, 최근에 좀 시끌시끌하지 않았어? 뉴스나 인터넷 기사나.”
지수 말대로 최근 한국이 시끌시끌하긴 했다. 가이드를 잃은 센티넬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고 한국 센터는 그들을 쉽게 막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그들이 민간인만 잡아 공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경찰, 군대, 센터 할 것 없이 모두가 긴장 상태였다. 그래도 전에 이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라 금방 해결하겠지, 모두가 그렇게 넘겼던 사건이었는데, 미국 센터에서 파견 나올 정도면 상황이 꽤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떠들썩하던 동아리방이 지수의 말에 한순간에 서늘해지자 지수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다가 공격받는 것보다 어느 정도 긴장하고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며 석민과 정한이 앉아있던 소파 쪽으로 가 석민의 옆에 앉았다.
“내가 그래도 다른 애들은 걱정이 없는데 너희 둘은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 사실 원래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안 되거든. 사정사정해서 왔으니까 고맙게 여겨줘.”
“고오맙다.”
“유웰컴~”
정한이 빈정거리듯 감사 인사를 전하자 지수가 방긋 웃었다. 물론 웃음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 둘만 걱정되고 우리는 걱정 안 하냐고 승철이 달려들어서였다. 지수가 캑, 하며 뒤로 넘어가자 정한이 실실 웃으며 석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웃는 낯을 거뒀다. 잘 웃는 석민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있었다.
“걱정돼?”
“아니, 민간인들만 공격한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정한은 자신보다 따뜻한 석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석민은 정한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형. 우리 한동안 승철이 형 옆에 붙어 다니자.”
“너 나를 못 믿는 거니.”
“아이, 형은 믿지. …형 체력을 못 믿는 거지.”
“그거 못 믿는다는 거 아니니.”
“아니, 진짜. 진짜로 형은 믿지. 형 위험하면 나부터 구할 거라는 거 잘 알지.”
“왜 나 못 믿니.”
“진짜. 진짜로 믿…”
석민의 말은 끝맺음 지어지지 못했다. 근처에서 무언가 터진 듯한 소리가 들려서였다. 놀란 모두가 동그란 눈으로 밖을 살피니 학교 건물 일부가 통째로 사라졌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합쳐 울려 퍼졌다. 계속 능글거린 미소를 짓던 지수가 표정을 싹 굳히고는 밖으로 뛰어갔다. 승철이 야! 홍지수! 하고 불렀지만, 지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잠시 주저하던 승철이 지수를 따라가려고 하자 민규가 승철의 앞을 막았다.
“형, 미쳤어? 지수 형은 센터 입대한 사람이고 파견 온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일에 나서는 거고. 그런데 형은 왜 나서?”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승철이 수인이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센터에 입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지수와는 차이가 있었다. 머리로는 민규의 말을 이해했으나 마음은 아닌 승철이 뒷머리만 벅벅 긁을 때였다. 또 가까이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동아리방 창문을 뚫고 무언가가 던져지듯 들어왔다. 놀란 부원들을 대신해 원우가 살피니 센터원 복장을 한 수인이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특별한 힘을 가진 자마저 이렇게 힘없이 날아온 상황을 본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하며 정한의 손을 잡았다. 정한도 나머지 손을 올려 석민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정한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지수였다. 정한은 지수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고, 지수는 스피커로 바꾸라고 소리쳤다. 정한이 스피커로 바꾸고 폰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니 펑펑 터지는 소리가 동아리방을 울렸다.
“테러야. 협상을 원하는 거면 해보려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그건 아닌 것 같아. 가이드를 잃은 센티넬들은 사실 반쯤 제정신이 아니거든. 그냥 저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거지. 좀비나 다름 없어. 그러니 지금 상황이 좀비 사태라고 생각하고 다른 얼른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야! 우리가 도울 건 없어?”
“애들이나 지켜줘! 특히 정한이랑 석민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승철은 정한에게 폰을 건네주며 얼른 너희 둘부터 움직이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석민이 어떻게 자기들 먼저 피하느냐고 주저하자 승철은 부원들을 쭉 가리키며 “우리 모두 수인이고 센티넬 능력을 갖추고 있어. 하지만 넌 평범한 사람이고 정한이는 수인이지만 능력이 없지. 이 상황에서 너희 둘 먼저 대비시키는 게 옳아.”라고 반박했다. 변명할 것 없는 상황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도망가볼 테니 꼭 따라오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지수 말처럼 절대 저들이랑 맞서 싸울 생각 말라는 말까지 덧붙인 정한이 석민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지하였다. 석민과 정한은 근처 지하철이 있는 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아리방 있는 곳에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고 둘은 잠시 주저하다가 동물들 모습을 하고 호다닥 뒤따라 달려오는 부원들을 보고 다시 냅다 뛰었다. 걱정할 건 없었다. 동물은 사람들이 뛰는 속도보다 다들 빠르니까. 둘은 오로지 자신들만 걱정하면 됐다.
“형, 피해!”
지하철이 원래 이렇게 멀었나 싶은 와중에 석민이 냅다 정한을 덮치듯 옆으로 밀었다. 둘은 바닥으로 넘어져 굴렀고 뒤따라오던 부원들도 우뚝 멈췄다. 둘을 공격한 자가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모두가 굳어 얼어있을 때, 라쿤 모습으로 변한 승철이 재빠르게 바닥에 누워있는 둘에게 다가가 살폈다. 다행히 둘 다 바닥에 쓸려 까진 상처만 있었지,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잠시 안도의 숨을 뱉던 승철은 금방이라도 다시 공격할 것 같이 움찔거리는 자들을 보고 그냥 사람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서 싸울까, 고민했다. 승산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싸우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자살 행위는 하지 마라.”
정한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누워있는 석민을 부축해 일으켰다. 석민은 정한을 도와주다 다리를 접질렸는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한이 석민을 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승철은 역시 싸워야겠다 싶어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건 부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대부분 사람 모습으로 돌아와 주먹을 쥐거나 근처 나뭇가지를 뜯어내 손에 쥐었다. 아예 사람 모습보다 동물 모습이 더 강하고 위협적인 순영이나 민규는 동물의 모습으로 센티넬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일 대 일이면 몰라도 일 대 다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공중에서 휘청거리던 센티넬이 순식간에 정한과 석민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석민을 낚아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으악! 석민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다들 무언가를 집어 던지거나 욕설을 하며 센티넬을 도발했다. 석민을 내려놓고 자기들과 싸우자는 신호였다. 하지만 센티넬은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는지 오로지 석민만 잡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마치 대기권을 뚫고 우주라도 나갈 것 같이 끊임없이 올라가자 석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놔달라고 몸을 흔들다가 진짜 놓으면 추락사였고, 그렇다고 올라가는 걸 그냥 두면 동사거나 질식사였다. 그래도 전자가 살 확률이 높지 않을까. 누군가가 밑에서 받아주지 않을까 싶어 석민이 몸을 격하게 흔들자, 센티넬이 더 빠른 속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석민은 덜덜 떨다 못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점점 숨쉬기 어려운 것도 한몫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석민은 센티넬에게 잡혀갈 때 자신의 이름을 목이 찢어지라 부르던 정한을 떠올렸다. 만약 석민 자신이 죽으면 정한은 한순간에 오래된 친구이자 연인을 잃게 된다. 석민은 그게 너무나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석민은 수인도 그렇다고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평범한 게 이렇게까지 억울한 건 처음이네. 석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감기는 두 눈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흐려지는 시야에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석민과 센티넬 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제는 환영까지 보는 걸까, 싶었던 석민은 그것이 입을 쩍 벌린 채 날아오는 걸 알아챘다. 엥? 뱀? 석민이 지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판단하기도 전에 뱀이 석민과 센티넬을 꿀꺽 삼켰다. 덕분에 숨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사라졌으나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석민이 생각한 여러 가지 사망 수 중에서 뱀한테 잡아먹혀 죽는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센티넬 중에 수인이 있던가. 수인은 폭주하지 않을 텐데. 애초에 가이드가 필요 없을 텐데. 이게 대체 뭐지?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석민은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만 끔뻑였다. 이대로 뱀 위장으로 소화될 줄 알았던 자신이 퉤, 하고 뱉어지며 땅에 엎어졌다. 어안이 벙벙해 뒤돌아보니 뱀은 센티넬 또한 퉤, 하고 뱉더니 순식간에 몸으로 센티넬이 움직이지 못하게 꽉 똬리를 틀었다.
“야! 석민아, 괜찮냐!”
승철이 석민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넋 나간 석민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석민이 승철과 눈을 맞췄고 승철은 석민을 향해 꽥 소리쳤다.
“윤정한 원래 저랬어?!”
“…엥?”
석민은 승철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센티넬을 위협하는 커다란 뱀이 있었다. 계속 눈을 끔뻑거리던 석민이 승철에게 “…윤정한?” 하며 물었고 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윤정한?”
“그래! 저게 윤정한!”
아닌데. 정한이 형은 손 위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았는데. 내 배 위에 똬리 틀고 몸 지질 정도로 작았는데. 저건 배 위에 올라가는 순간 압사로 죽을 것 같은데.
석민이 멍하니 뱀을 바라만 보고 있자 승철은 석민과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뱀에게 그놈 죽이면 안 된다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안 죽여.”
“…정한이 형?”
“먹을 거야.”
뱀이 입을 쩍 벌려 센티넬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계속 얼이 빠져있던 석민은 제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냅다 달려가 뱀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가늘었던 뱀의 눈동자가 사람의 눈처럼 변했고 조여 죽일 것처럼 굴던 센티넬도 바닥에 내려놨다. 센티넬은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안한 석민은 멀쩡한 발로 센티넬을 슬슬 밀었고 석민을 따라온 동아리 부원들이 센티넬을 질질 끌고 자기 쪽으로 옮겼다.
“…진짜 형이야?”
센티넬이 멀어진 걸 확인한 석민이 커다란 뱀의 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뱀은 고개를 꾸닥 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작아졌다. 석민은 작아져 제 손 위에 올라온 뱀을 보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뱀은 “석민아, 나 어지러워.”하고 비실비실 말하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형? 정한이 형? 야! 야, 윤정한!!”
정한은 대답 대신 혀를 빼물고 기절하는 걸 선택했고 황당함을 넘어서 당황스러운 석민도 정신을 잃고 싶었다.
*
센티넬의 폭동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진압됐다. 그동안 무너진 학교 건물은 정부 측에서 재건축해주겠다고 합의를 봤으나 재건축 기간이 길어져 오프라인 수업은 모두 다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석민을 공격하고 정한에게 기절 당한 센티넬은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감옥에 들어갔다고, 지수가 알려줬다.
마지막으로 윤정한. 뱀 수인이면서 아무런 힘도 없던 정한은 이번 일로 센터로 끌려가 정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정한은 허락도 받지 않고 검사를 진행하는 센터에 큰 불만을 품었지만, 항의까지 하지는 않았다. 옆에서 지수가 계속 달랜 것도 있었고 자기가 생각해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서였다.
“언제부터 힘이 생긴 거야?”
“언제부터라니. 원래부터 있었던 힘이야.”
“그러면 왜 측정되지 않았던 거지?”
“난 특이체질이니까.”
정한의 말대로 정한은 특이체질이었다. 문제가 발생하자마자 검사를 다시 진행해봤지만, 특별한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수인의 형질을 조절하는 수치가 상승하긴 했으나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하게 된 걸까. 센터에서는 정한의 비밀을 어떻게든 알아낼 생각인지 하루라면 끝날 거라는 검사가 일주일이 넘도록 진행됐고, 그동안 정한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졌다. 검사도 매일매일 진행됐다. 마치 실험체를 관찰하듯이 구는 모습에 지수가 너무한 것 같다고 항의했지만, 통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매일매일 검사와 관찰이 반복된 게 열흘째였다. 열흘째가 되자마자 정한의 검사결과가 달라졌다. 모든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졌으며, 수인의 형질을 조절하는 수치는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보통 이 정도 수치 변화는 가이드를 잃은 센티넬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모습이었다. 정한의 검사를 진행하던 연구원 모두가 당황하던 그때, 센터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석민이었다. 석민은 열흘 동안 정한을 풀어주지 않은 센터에 큰 불만을 품은 상태였다. 그래서 여차하면 데리고 도망가려고 후추 스프레이까지 품에 숨겨 왔다. 그러나 스프레이를 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원들은 석민을 극진하게 모셨다. 곧 폭발할 것같이 변하던 정한의 수치가 석민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인이 어떻게 가이드를 만난 센티넬처럼 구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실험이 들어갔지만, 그래서 석민까지 잡혀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어쨌든 극진하게 모셨다. 그들은 정한의 변화를 어떻게든 알아야 했으니까.
“그만하시죠.”
석민까지 붙잡혀 검사를 계속 받자 계속 침묵을 유지하던 정한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특이체질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그렇게 시작된 면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선 정한은 자신이 평범한 뱀 수인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구렁이. 쉽게 말해 이무기이며, 왜 이런 형질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나 석민이 옆에 있어야지 안정을 찾고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왜 석민이냐는 말에는 잠시 주저하다가 석민이 여의주이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무기에게 여의주는 용이 되는 방법이거든요.”
이 말에 센터는 물론 고대 문서를 발견한 연구진부터 교양 담당 교수까지 난리가 났다. 물론 좋은 방향 쪽이었다.
센터는 정한과 석민을 담당 센티넬과 가이드로 매칭시켜 센터에 이름을 올렸고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석민과 정한이 일반 군대 갈 필요도 없다고 알려줬다. 아무런 합의도 없이 멋대로 센티넬과 가이드 리스트에 올린 건 정한과 석민 모두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담당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군대에 가지 않고 센터에 동시 대체복무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고대 문서를 발견한 연구진과 교양 담당 교수는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단순히 센티넬과 가이드 얘기를 나열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적시라는 점에 놀라워했고 둘의 도움을 받아 아직 해석하지 못한 고대 문서의 일부분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어 했다. 도와만 준다면 무엇이든 해준다는 교수의 말에 둘은 혹했으나 자신들은 그걸 풀 정도의 지식이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교수는 그저 센터 연구원들의 자료만 받아 볼 수 있게 허락만 해주면 된다고, 그러면 이번 교양수업을 에이플을 주겠다며 애원했다. 끝까지 거절하려던 둘은 에이플 준다는 말에 교수와 손을 잡았다. 자료를 받아 보는 것과 에이플. 나쁘지 않은, 오히려 좋은 거래였다.
“형, 그동안 왜 말 안 했어?”
센터에서 둘이 같이 지내라고 한 방을 내어준 뒤로 계속 함께 지내던 둘이었다. 그동안 석민은 정한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막 씻고 돌아온 정한을 보더니 대뜸 질문했다. 정한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석민의 옆에 앉아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연구원들한테 들었다시피 내가 어째서 이런 특이체질로 태어났는지는 몰라. 특히, 어릴 때는 힘을 제대로 못 쓰니까 그냥 내가 뱀인 줄 알았지. 그러다가 너랑 떨어진 적이 있었을 때, 그때 알았어. 아, 나 평범하지는 않구나.”
“그래서 나랑 같이 다닌 거야?”
“그건 그냥 네가 좋아서.”
헤헤, 정한이 웃자 사뭇 진지하던 석민의 표정도 풀렸다. 석민은 정한 따라 히히 웃으며 그만큼 자신이 좋았냐며 부끄러워하다가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정신이 없네.”
“나도.”
“내가 사실 알고 보니 사물 수인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어.”
“에이, 그건 아니지. 그냥 여의주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게 그거 아냐?”
“다를걸?”
“어쩌다가 여의주 힘을 가지게 됐지?”
“나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랬겠지.”
“몰랐는데.”
“나도 처음은 몰랐다니까.”
“…그래도 형이 형 정체를 빨리 말해줬으면 덜 정신 없었을 것 같은데.”
“그건 미안해.”
“괜찮아. 그런데 부원들은 삐진 것 같더라.”
“아, 애인한테도 말 못 한 건데. 이해 좀 해주지.”
“나중에 술 한번 거나하게 쏘면 화 풀걸.”
정한이 슬금슬금 석민의 옆에 누웠다. 석민은 머리에 물 떨어진다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정한이 자신의 턱을 잡고 입 맞춰오자 표정을 폈다.
“너는 화 풀렸어?”
“화 난 적도 없어.”
“왜?”
“놀라기는 했는데, 어쨌든 형이 뱀인 건 변함 없잖아?”
“그치.”
석민이 팔을 들어 정한을 끌어안았다. 정한은 석민의 품에 폭 안겨 또다시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
정한은 교수가 말했던 고대 문서 내용을 떠올렸다. ‘이무기 수인이 여의주를 갖게 되면 용 수인이 된다.’ 거기에 교수가 해석하지 못한 고대 문서 내용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여의주를 빼앗지 마라. 빼앗으면 용은 다시 이무기가 되어 귀신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돌 테니. 그렇다고 굳이 그들을 찾지도 말라. 여의주를 빼앗겼던 그때처럼 모두를 집어 삼켜버릴 테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여의주가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여의주를 따라 모습을 변장해 다시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자들을 단순히 수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움이 크니 그냥 수인이라고 불러 그들을 무리에 속하게 하라. 그들을 떨어트려 놓는 순간, 횡포해질 테니. 절대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
“석민아.”
“…”
“도겸아.”
“…”
정한은 깊은 잠에 빠져 자신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는 석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달빛에 비친 석민의 얼굴은 평온했다. 정한은 천천히 석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석민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내가 또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어야지. 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석민이 ‘도겸’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석민과 달리 도겸은 성인이었고 정한은 갓 태어난 이무기였다. 그때 도겸은 작은 뱀인 정한은 아끼고 또 아꼈다. 한낱 미물이라며 누군가가 욕해도 품에 안고 또 아꼈다. 그러니 작은 뱀이 사람에게 애정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 만든 여의주를 도겸 몰래 입에 넣어 먹었을 정도니까.
“아프지 말자. 아프지 말자.”
도겸은 정한보다 컸으나 약했다. 아픈 곳도 많았다. 그래서 정한은 제게 가장 중요한 여의주를 도겸에게 넘겼다. 도겸은 여의주의 힘을 얻어 건강해졌고 여의주 그 자체가 되었다. 다른 이무기들이 보면 미련한 짓이라고 하겠지만, 정한은 좋았다. 그가 옆에 있기만 하면 용이 되는 것도 문제가 없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정한의 바람대로 평안하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났다. 도겸과 정한은 도망쳤다. 누군가가 위협하면 둘이 힘을 합쳐 이겨나갔다. 하지만 적의 수는 너무 많았고 결국 정한은 도겸을 잃었다. 한순간이었다. 여의주가 잘려나간 신체 부위까지는 봉합해주지 못한 탓이었다. 정한은 도겸의 머리를 껴안고 한참을 울다가 도겸과 지냈던 집 근처 산 중턱에 조그마한 무덤을 만들었다. 그 옆에 작은 탑도 만들었다. 그 안에는 도겸이 정한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모은 서적을 집어넣었다.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라 세상에 알려지면 위험하겠지만, 그렇다고 유품인데 불태우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알아서 시간 지나면 썩으라고 대충 탑 안에 넣어놨던 건데, 책 하나가 썩다가 발견됐다.
물론 그들은 끝까지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도겸의 죽음은 너무나도 오래됐고 그동안 사용된 문자는 수도 없이 바뀌었다. 심지어 그 책은 도겸이 혹시나 들킬까 기존 문자를 변형한 것이었고 꽤 괜찮은 상태로 발견됐어도 찢어지거나 오염되어 복원하지 못할 부분도 많았다. 그러니 그들은 끝까지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그들의 정체를.
“자장자장, 자장자장.”
숨이 막혔는지 석민이 뒤척이자 정한은 뱀의 모습으로 변해 돌아누운 석민의 가슴 위에 올라가 머리를 심장 부근에 폭 박았다. 그리고 작은 꼬리로 석민의 가슴을 두드렸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옛날 도겸이 잠 못 자는 정한을 재울 때 부르던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