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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래?”
눈앞에 놓인 치킨 다리를 입에 무는 순간 귀에 박힌 말에 석민은 으? 하며 정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는데, 결혼하자. 입에 넣은 치킨은 아주 바삭하고 고소해서 현실감이 넘치는데 귀로 흘러들어온 언어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 나머지 석민은 치킨 다리를 집었던 손가락을 닦지도 않은 채 제 귓구녕을 쑤셨다.
“어라거?”
입안 가득 들어찬 튀김옷과 닭다리살 덕분에 발음은 완전 뭉개져버린 뭐라고,는 윤정한이 아까 지 손 닦은 물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주는 데에 완전히 닦여나가 버렸다. 석민의 어이와 함께.
배고팠어?
이 또라이 새끼가……. 폭탄도 그냥 폭탄이 아닌 핵폭탄 같은 말을 지금 던져놓고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다. 입안에 들어찬 살을 윤정한 씹듯 우적우적 씹은 석민이 삼키다시피 입안의 것들을 넘기고서야 말 같은 말을 뱉을 여유가 생겼다.
“미친놈아 니 뭐라고 했냐.”
터헣.. 우리 석미니, 터프하구 머싯기두 하지. 박력이써 역시 역시, 내가 고른 남자는 머가 달라두 다르다. 말꼬리까지 늘려가며 헛소리를 싸대는 게 아 오늘이 그날인가보다 싶었다. 몇 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윤정한 타작하는 날.
씹던 닭다리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석민이 새 숟가락을 들고 팔을 마구 휘둘렀다. 멀찍이 물러 앉은 정한이 얄밉게도 아 왜-, 하며 잉잉 염병을 떤다. 아 왜애? 아왜애? 왜 소리가 나와?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또! 또! 그놈의 주둥이 딱 대!
“주둥이는 댈 수 있는데 그걸루 때리면 나 이빨 몽창 나갈걸? 우리 석민이 돈 많니?”
“에라이 미친놈아!”
기어코 석민의 손에 든 숟가락이 정한의 마빡으로 날아갔다.
“아악! 지쨔루 때리는 게 어디써! 아퍼!”
하나님 아버지, 제가 당신을 안 믿은 죄를 이제 받는가봐요. 석민이 초딩 때조차 단 한순간도 믿어본 적 없는 남의 아버지를 찾으며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나 진쨔 아픈데……. 숟가락에 정통으로 때려 맞은 마빡을 문지르며 정한이 울상을 하는 통에 석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진짠가? 쇠숟가락으로 빡 소리나게 맞았는데 안 아프겠어? 덧붙이는 말에는 그렇게 세게 때렸나… 하는 걱정이 따르며 석민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팔자로.
“어디봐봐. 글게 왜 이상한 소릴 하고 그래애….”
“요기. 아포.”
혀짧은 소리를 기깔나게 내며 시뻘개진 이마를 들이대는데 진짜 당장이라도 멍들 모양새로 붉어진 이마에 석민의 입꼬리마저 추욱 처졌다. 아이고… 손으로 때릴걸. 백번 다시 생각해도 안 때릴 멘트는 아니었던 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를 슥슥 문질렀다. 멍들지 마라. 들어도 금방 빠져라.
맨질한 이마를 몇 번 문지른 석민이 마무리로 가볍게 이마를 톡 치고는 손을 떼어냈다.
“그래서, 개소리 사유는?”
“나 농담한 거 아니야.”
“또, 또, 또. 내가 윤정한 너를 하루 이틀 봅니까?”
젓가락으로 치킨무를 집어먹은 석민이 정한의 얼굴을 살피는데, 테이블에 팔을 괴고 마카로니만 주워 먹는 정한의 입이 한치는 튀어나와 있었다. 삔또가 상했다? 진짜라고? 입맛이 딱 떨어진 석민이 제가 한입 딱 베어문 것 말고는 손도 대지 않은 치킨을 바라보며 넋을 놨다. 정확히는 넋을 놓은 척했다. 시발 지금 눈 마주치면 쟤가 하자는 대로 할 것 같단 말이야……!
“석민아.”
하지마.
“나랑 결혼하자.”
윤정한의 목소리는 아주 산뜻했다. 석민이 울고 싶을 정도로.
100% 연애결혼
경영학과 1x학번 이석민, 조소과 1x-2학번 윤정한. 접점이곤 교양강의를 제외하곤 없어야 정상일 조합의 그들은 뜬금없게도 학교 대표로 나가는 투자대회의 같은 팀으로 만났다. 주어지는 과제만으로도 삶이 벅찬 자과생들과는 다른 세상 사람인 양 윤정한은 홀로 투자대회에 나서 당당하게 대표 출전권을 따냈고, 석민은 경영학도답게 전공 수업의 조별 과제로 강제 동원되어 대회에 나갔다 출전권을 부여당했다. 아 좀만 대충할 걸. 석민은 에이쁠을 받는 기쁨보다 그 이후의 번거로움이 더 괴로웠다. 그 번거로운 와중 조 과제로 이루어진 팀 내에 두 커플이 생기고 또 박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석민과 정한이 만날 일은 없었을는지도 몰랐다.
문준휘, 김민규, 전원우, 최한솔, 그리고 윤정한과 이석민. 보통 투자대회는 경제학과나 경영학과에서 대충 뽑혀 나간다고 들었는데, 조소과, 컴공과, 호조과, 국문과, 그리고 법학과의 조합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상경계, 아니 하다못해 사과대 출신이 나 하나뿐일 수 있냐고요. 학과와 전공을 이유로 교수님이 나이 짬밥 다 제쳐놓고 석민에게 조장을 떠넘긴 완벽한 환장의 조합이었다.
교수님의 기대라곤 1도 닿지 않은 떨거지 그룹의 수장, 한국대 경영학과 2학년 이석민. 석민의 눈앞은 캄캄했으나 석민이 눈을 감고 있든 말든 하드캐리한 조원들(특히 조소과) 덕분에 떡하니 전국대회에서 일등까지 먹고 말았다. 고학번들이 대거 포진해 교수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경영 선배들의 참담한 예선 탈락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 후로 무리는 대회도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모였다. 처음엔 상금을 나눈단 핑계로 모였고, 이후론 그 상금을 같이 쓰자는 핑계였다. 그럭저럭 잘 생겨 먹은 낯짝들이 아깝게도 자타의적으로 다양한 이유를 품고 아싸처럼 살고있는 그들은 그럭저럭 통하는 바가 있었다. 석민은 그들 중에서는 초 인싸에 속했으나, 반이 나뉘고 선후배가 어쩌구 하는 학과 생활보다는 이 모임이 쪽에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입맛이 똑 떨어졌지만 치킨이 아까워 입에 밀어 넣다 보니 잘 먹는 석민과 제게 할당된 닭날개를 두 입 씹어먹다 말고 맥주만 들이켜는 윤정한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정한은 태연자약했다. 아닌 척 정한의 눈치를 살피는 석민과는 달리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이 짜증스러워 마카로니 하나를 집어 던졌다.
우리 석민이 뭐하는 짓이지?
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한 얼굴로 저와 눈을 똑바로 맞추는 윤정한에 석민은 할말을 딱 잃었다. 나 너랑 안 놀아. 삐치는 건 덤이었다.
윤정한의 뜬금없는 결혼 타령은 없던 결혼에 대한 로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거나, 없던 석민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만개하여 참을 수 없어져서는 아니었다. 후자는 좀 그럴 수도 있다 싶은 일이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할아부지가 자꾸 결혼하래자너…….”
가정사였다. 뭐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오늘 내일 하시는 건 아니고(정한이 이렇게 말했다.) 그저 집구석에 가둬키운 손주들이 죄 커서 결혼을 했으니, 드디어 다섯째 정한이 그 타겟이 된 것 뿐이었다. 근데 그 정도가 정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범위였다.
선자리 몇 번 나가면 될 줄 알았더니, 호텔이니 한정식집이니 하는 델 돌아가며 한 번씩 무려 열 번. 정한은 그 지긋지긋한 선자리에 진력이 나기도 했거니와, 그깟 결혼 해주지 뭐 하는 마음이 또 약간, 그리고 그게 죄 할아버지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하는 마음이 조금 많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이석민을 좀 가지게 되면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어간 결과였다.
그 대답에 석민의 속은 터져나갔다.
“그래서 왜 나냐고!”
그 물음에 정한은 굉장히 섭섭한 얼굴을 했다. 아랫 입술을 반 치쯤 내밀고 한껏 억울하단 얼굴을 하는 양에 이젠 아예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거짓말.
나 너랑 진짜, 안 놀아.
-
석민이 치킨 반 마리를 흡입하는 것으로 쫑난 야식 자리는 그 후 석민의 일방적인 카톡 단답으로 인해 더는 성립되지 않았다. 무려 일주일. 윤정한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단단히 뿔이 난 얼굴이 되어 책상을 탁탁 두드리는 손길에 사무실 인원들은 괜히 정한의 눈치를 살폈다. 다섯시 반 땡하면 퇴근하던 사람이 어제부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섯 시가 넘도록 저러고 있대? 대표가 회사에 너무 오래 남아있으면 좀 부담스럽지-. 프로젝트의 마무리나 급한 일이 아니라면 모두의 정시 퇴근을 위한다며 시간이 되기 무섭게 훌쩍 일어나 나가버리던 정한이 하는 일도 없이 다리를 달달 떨어대는 꼴에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한 게 무려 이틀째였다.
서른 넘은 직장인이 허구한 날 만나는 게 당연하냐, 묻는다면 누구든 당연하지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석민과 정한은 좀 달랐다. 퇴근해봐야 할 일도 없고, 집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또 다음날이 밝으니 그 시간을 좀 더 즐겁게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살림에 젬병인 정한과 맛있는 거 찾아 먹는 것이 인생의 큰 낙인 석민의 니즈가 맞아 저녁 식사 메이트가 된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게으름과 귀찮음을 뒤로하고 정한이 석민을 만나는 게 즐거워서였다. 우리 석민이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양쪽으로 기운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석미나 오늘 저녁은 머 머글꺼야? 내가 갈까?
놉. 니 알바냐.
다소 싸가지 없는 답이긴 했으나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있으니 감내할만했고, 그 와중에 읽씹이나 안읽씹이라는 선택지는 없는지 보는 족족 이응이응, 니은니은. 어, 아니. 싫어. 하며 꼬박꼬박 답장을 하는 석민은 아주 귀여웠다.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가 다시 추욱 처졌다. 혈중 이석민 농도 바닥임. 조졌어요.
석민의 카톡 답장에 진동을 멈추었던 오른쪽 다리가 다시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각박한 세계는 나를 채울 수 없으셈.
안되겠어.
정한의 안광이 이마만큼 빛나고 있었다.
6시 25분, 마지막 직원이 저 퇴근해보겠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정한이 바람처럼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예. 퇴근하겠습니다. 의미 없는 인사가 허공을 떠돌았다. 부리나케 뛰쳐나간 정한이 선택한 것은 전원우였다. 석민 대신은 아니었고, 일종의 미끼 상품인 동시에 상담 상대였다. 너무 단어 단위로 반박을 하거나 이해를 하려 드는 김민규나 너무 다정하게 위로하는 문준휘는 안타깝게도 지금의 정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충 흘려들으며 적당히 대안을 제시할 사람. 그건 전원우지.
대학 시절만 하더라도 한번 자취방으로 박히면 밖으로 소환하기가 어려웠던 전원우는 나이가 먹을수록 집 밖으로 불러내기 쉬워져 요샌 곧잘 부르는 대로 나오곤 했다. 대충 언으랑 1차 때리구 2차로 문준휘, 김민규네 가게 가서 최한솔까지 부르면 자기 보기 싫다고 안 나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석민이 그 정도로 매정한 타입은 못 되었다. 한껏 삐쳐 만나주지도 않으면서도 카톡에 답장은 꼬박꼬박 해주는 만큼이나.
낡고 지친 얼굴의 전원우는 윤정한만큼이나 입이 짧고 먹기 번거로운 것을 싫어했다. 그런 원우에게 정한이 고른 죽집은 제법 괜찮은 선택지였다. 숟가락만 써도 되고, 뭐 발라내거나 할 필요도 없고. 요새 일이 많아 속이 더부룩하기도 했다. 죽으로 속 달래고 2차로 술 마시면 되겠구먼. 역시 윤정한 쓸만해. 누구에게라도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될것같은 상황 속에 원우의 니즈를 고려하여 고른 정한의 초이스는 딱 먹혀들었다.
“메뉴 괜찮네.”
“그치-. 우리 워눙이 마니 머거?”
“톤까지 빼면 더 좋겠고.”
헤헤.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에 원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밥 나오기 전에 본론부터 말해라. 정한은 부담스러울만큼 예쁜 얼굴을 연출하고 눈을 깜빡였다. 10년 전이면 몰라도 그 얼굴을 마르고 닳고 본 입장에서 전원우는 한 대 칠까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작작해라. 죽는다.”
“나 석민이한테 까였어.”
정한이 가게에 들어오기 무섭게 쪼르르 떠다 놓은 냉수를 마시려던 전원우는 손을 멈춘 채 흔들리는 눈으로 윤정한을 봤다. 이 자식이 또 사기를 치나 싶다가도 그 내용 앞에선 멈칫하게 됐다.
“……고백했다고?”
드디어? 라는 물음은 꼭꼭 입안에 가둬놓은 채 겨우 묻고 싶은 말만을 꺼낸 전원우는 슬며시 올라가는 윤정한의 입꼬리가 불안했다. 아니. 결혼하자고 했어.
“에라이, 미친 놈아. 야 나 간다.”
“노노, 노노- 어딜가 워눙이-.”
“야, 놔라.”
원우의 자켓 소매를 쥐고 늘어지는 정한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정한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저건 운동도 안하는게 요령만 좋아서는. 결국 테이블로부터 단 일 보도 벗어나지 못한 원우는 눈에서 영혼을 뺀 채 정한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역시 반지부터 준비했어야 했나?”
“흐흫… 미친놈. 그런다고 받아줬겠냐?”
“왜?”
나였다면 한 번 정도는 진지하게 고려해봤을텐데. 나 울 할아부지 아니라도 돈도 많고, 건실한 회사도 있고, 친구도 있고, 거기다 내 친구들 석민이가 다 알기도 하고…….
쫑알쫑알 늘어놓는 정한의 쌉소리에 전원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니 조건이야 좋지. 너는 알파고, 니 말마따나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다른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이석민 좋아하고. 근데 걔 입장에서는 목욕탕 같이 가는 거 빼고 다 같이하던 친구가 갑자기, 뜬금없이 결혼하자는데. 진지하게 생각이 되겠냐?”
“그런가아…?”
눈썹이 팔자가 된 채 전혀 모르겠단 얼굴을 하는 윤정한을 보며 원우가 혀를 찼다. 편하고 좋은 거랑 결혼하고 싶은 건 다른 거 아닐까?
“결혼하고 싶은 거?”
응. 왜, 결혼한 사람들이 가끔 하는 말 있잖아. 이 사람이랑은 결혼하겠다는 확신,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 그 결혼이라는 거에 이르는 결심 같은 거. 윤정한 너는 몰라도 이석민한텐 그게 없는 거지.
“계기가 없다는 거네?”
“그렇지.”
계기. 조건? 이유? 아무래도 좋았다.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 정한의 안광이 쓸어넘긴 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만큼이나 반짝거렸다.
본 투 비 알파.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알파였고, 심지어는 네 명의 형 누나, 그리고 한 명의 여동생마저도 알파로 태어난 알파 집안의 다섯째가 정한이었다. 장남도, 차남도, 하물며 장녀조차 아닌 삼남에 다섯째. 정한은 눈에 띄기엔 다소 아쉬운 조건이었으나, 타고난 것의 때깔이 다른 나머지 아주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장육부가 자존심으로 들어찬 알파 족속들 사이에서도 정한은 빛이났다. 9살이 되기 무섭게 일곱 살 쯤부터 할아버지와 두던 접바둑은 맞바둑이 되었고, 10살 겨울에는 더 이상 할아버지가 정한을 이기는 일이 없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던 해 시작한 주식은 덩치를 불려 오바 조금 보태서 잘잘이 쪼개질 할아버지의 유산 따위가 부럽지 않은 정도가 되었고, 대학 때 말도 안되는 전공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막학기에 시작한 사업이 대박 나 몇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중견기업 이상의 가치를 품게 되었다. 정한은 완전히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겠구나 싶은 즈음, 정한의 회사가 상장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정한은 규모가 너무 커져 이젠 번거롭고 귀찮다는 납득 불가능한 이유로 회사를 아주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정한을 이해하는 이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알파들의 소유욕은 대단하다던데, 어째서? 과연 그랬다. 정한의 할아버지는 제 식구들을 제 수족으로 두고 하나하나 제 뜻대로 꾸려가길 원했고 실제 그렇게 했으나 정한만큼은 자신의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지 못했다. 너무 잘난 탓이었다. 유산이든 가업이든, 하다못해 기업이라 할지라도 정한을 옭아매진 못했다. 너무 알파다운 나머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한의 선택은 가지치기였다. 쓸데 없는 것은 잘라 버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스스로에 대한 어마무시한 소유욕 앞에 언제든 꾸릴 수 있는 그깟 사업이나 살림 따위는 미련 남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한의 사업이 잘 되던 때 과연 잘난 손주로다, 흐뭇해하던 할아버지는 종잡을 수 없는 정한의 선택들 앞에 쪼그라든 풍선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조차 꺾지 못한 고집과 그 할아버지를 꺾는 대담함. 그런 와중에 의절하는 법도 없이 가족과의 거리도 적당히 지켜나가는 것이 윤정한의 방식이라 정한의 형제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
그들이 보기에 세상은 정한의 발밑에 깔린 것이었다. 툭 차기만 해도 들어가는 골 같은 것. 하고자 한다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인생. 정한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해주는 이는 몇 없었다.
정한은 자신이 석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한 수순 같은 거였다고 생각했다. 윤정한을 안쓰러이 여기는 유일한 사람. 나를 왜? 생각하며 조금 우스워했던 것은 나를 더, 로 바뀌어갔다. 정한이 형은 석민이 앞에서 유독 어리광이 심해지는 거 같다 야. 부정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투정 부릴 일이 아니어도 정한은 석민 앞에서 유독 어린 체했다. 석민은 정한을 과하게 귀여워하지도, 싫어하지도,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가끔 귀여워하고, 윤정한의 알 수 없는 짓거리들을 대개 받아줬으며,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면서 해오는 고민 상담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정한의 편을 들었다. 석민은 정한의 믿는 구석이었다.
윤정한은 아주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 매일매일 붙어 다니는 정한과 석민을 지켜보던 이들도 정한에게서 피어난 감정을 눈치챌 정도였다. 정한이형? 석민이 좋아하는 건 알겠더라. 금세 제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던 윤정한은 이대로가 좋다는 듯 몇 년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사실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한 적도 있었으나 석민이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한의 생떼 같은 고백들 앞에 석민이 눈을 부릅뜨기 시작했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석민에게 더는 시도하지 못했다. 석민은 정한의 믿는 구석인 동시에 두려운 구석이었다.
저 새끼들은 뭐가 문제지?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으나 구경하는 것이 재미없지는 않았으므로, 또 저들이 끼어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침묵했다. 나서다 둘 중 그 누구한테도 미움받는 일은 없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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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싶은 것과 사람이 좋은 건 다른 얘기다. 연애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던 전원우의 말은 정한의 머릿속에 콕 박혔다. 그러니까, 연애를 안해도 결혼은 하고 싶을 수가 있다는 거네? 나랑? 계기, 이유, 조건, 등등 그 중 어떤 게 있기만 하다면. 논리라곤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고였으나 정한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이석민의 강경한 태도에 금을 가게 하고, 제 할아버지 앞으로 저와 이석민을 끌어다 놓는 것. 정한의 목표가 명확해졌다.
정한은 일단 빌었다. 뚱한 얼굴을 하고 저를 쳐다도 안 보는 석민의 시선이 제게 닿기 무섭게. 석민은 그런 정한의 태도에 꽤 누그러진 얼굴을 했으나 여전히 뿔난 마음이 없지는 않아서 묘하게 태도가 냉랭했다.
“석미나-, 나랑 그렇게 결혼하기가 싫으니?”
술이 올라 목까지 시뻘겋게 변한 정한이 석민을 향해 잔뜩 몸을 기울인 채 물었다. 속이 제법 상한 얼굴로 눈썹을 한껏 팔자로 만든 정한의 얼굴은 꽤 귀여웠으나, 그 자리에서 그걸 귀여워할만한 인간은 평소의 석민 정도뿐이었다. 한심함이 80%, 애잔함이 0.1% 그리고 그 나머지 19.9%의 귀여움. 윤정한의 진상 짓에 귀여움을 느낀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글러 먹은 것이었으나, 석민은 그 상황과 제 취향의 이상함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너 아니믄…… 모르는 아무 여자랑 겨론 해야할지두 모르는데에… 니가 싫으면…, 아니 그래두 싫은데.
정한의 노림수 가득한 취한 척에 전원우는 올라가려는 한쪽 입꼬리를 누르기 바빴고 김민규를 위시한 다른 이들은 당장에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 됐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결혼? 윤정한이랑 이석민이? 짧은 사이에 테이블 위로 오가는 시선에 윤정한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석민이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냅다 내저었다.
“야, 아니다. 아니야. 나 윤정한이랑 결혼한다고 한 적 없어!”
“그치이. 우리 석미니는 나 싫다고 했어…….”
개 아련한 표정을 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윤정한을 보던 문준휘의 손이 절로 올라가 관자놀이께에서 움직거렸다. 저 새끼 돌았냐는 뜻이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는 전말이었다. 윤정한이 윤정한 했네. 민규가 간단하게 정의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 되니 당사자가 아닌 본인들에게는 별 중요한 일 같지도 않고 전원우가 그렇게 느꼈듯 좀 재밌어지는 것이었다.
“그냥 하는 건 어때? 결혼.”
“그래, 해라!”
말을 꺼낸 것은 한솔이었고 거든 것은 민규였다. 딱히 원우가 뭘 부채질하지 않아도(그런 재주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분위기는 장작에 휘발유라도 들이부은 양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자기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네? 나도 인생 있거든?!”
“야야, 이석민. 잘 생각해보라고. 정한이 형 잘생겼어 안생겼어.”
“내 취향 아니라고!”
자기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다 싶으니 입을 꾹 닫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정한이 석민의 단호한 호불호 표현에 그대로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와중에 정한이 이마를 그대로 테이블에 때려 박을까 걱정이 된 석민은 제 손을 테이블과 그 널찍한 이마 사이에 밀어 넣었다. 역시 석미니 뿌니야…. 이석민이 때린 말에 맞고 쓰러지던 주제에 또 저를 챙기는 손길에 감동이라며 잉잉 매달리는 건 우습지도 않았다.
“아니 얼굴 빼고도 생각을 해봐봐 좀.”
논리 나잇이 시작되었다.
“조건으로 따지면 윤정한만한 게 어딨어.”
“너는 결혼을 조건 보고 하니?”
“아니 들어나 보라고. 니 윤정한 니 취향 아니랬지만 맨날 귀여워하잖아. 아냐? 그리고 저 형이 집안이 나빠, 아님 돈이 없냐? 돈 진짜 야 그것만 보고 결혼해도…….”
정한의 가치를 매기는 가차 없는 민규의 표현에 석민은 귀가 썩을 것 같다고 느꼈으나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정한이 성격도, 자기 취향은 아니지만 얼굴도, 가정 환경도, 금력도 어디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을 넘어 제법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 석민의 결혼관은 그랬다. 얼레벌레 학교 다니느라 연애랑은 담쌓고 살았으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확신을 갖고 가정을 꾸리게 될 거라고. 그러니 정한은 석민에게 결혼 상대가 못 되었다.
분위기를 보던 전원우가 입을 뗐다.
“굳이 결혼까지 안하더라도 좀 도와줄 순 있지 않나?”
“뭐를?”
“어떻게?”
한껏 흥미가 오른 이들이 머리를 모으는 게 부담스러운 원우가 고개를 뒤로 빼며 테이블 위의 제 잔을 들었다.
“연애한다고 하면, 당장 결혼하라고 하시진 않을 거 아니야. 선보라고도 안 하실 테고. 인사만 한번 드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솔의 손에서 박수가 먼저 터져 나왔다. 와 역시 법학과. 아니지 이제 변호사지. 원우형이 제일 똑똑하네.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는 것에 민규와 준휘도 박수를 거들었다. 그래서 그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마땅했으나 술이 조금 들어간 석민의 두뇌는 그런가? 하고 말았다.
원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계획의 출처는 모두 정한이었다. 일단 진행 시켜! 뭐라도 하다보면 제 뜻대로 되어있으리라는 원대하고 알맹이 없는 계획. 정한의 전문 분야였다. 여전히 이마를 박은 채인 정한이 테이블 아래로 원우에게 백만 원의 금액을 이체했다. 아 전원우 많이 늘었네, 생각하는 건 덤이었다. 역시 변호사는 달라.
교과서에서나 몇 번, 학교에서 멀찍이 몇 번, 위인전에 누구는 알파였다더라 하는 한 줄짜리 형질에 대한 설명 같은 것을 제외하고 알파라는 개념과 마주할 일이 없었던 석민에게 형질의 영향이라는 것은 도무지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뛰어나다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여겼을 뿐이었다. 그저 좀 가오 잡는 스타일의 사람들이 아닌지 생각하거나, 금수저 같은 건가? 그런 건 다른 형질에도 꽤 있지 않아? 하는 정도의 시선. 그런 석민이 형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윤정한의 생떼 같은 결혼 타령이 연애하는 척, 조건부 ‘연애’라는 상황으로 바뀌며 그 장단에 어떻게 맞춰줘야 할까 하는 진지한 고민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정한의 편을 들고 나섰던 김민규나 최한솔은 우스갯소리로 한 것이었으나, 결국 석민은 정한의 애인 노릇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형은 알파지?”
“그렇지.”
“맞선 상대는 그 오메가인 거야?”
“지금까지는 그랬지?”
“흐음…….”
정한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일단 화를 다 푼 석민이 저를 거들어 주겠다는 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생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뜻을 꺾었던 날보다 더 큰 만족감. 오메가인 척을 해야 하나? 걱정스런 얼굴로 작은 머리통을 박박 굴리는 석민과는 아주 대조되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티 안 내고 잘해야 형한테 좋은 거잖아.”
자기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저를 걱정하는 석민이 기특하고 애틋해서 정한은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애의 저를 향한 정성 앞에 가슴이 뻐렁치는 와중에 들키지 않겠다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석민에게는 꼭 을이 되어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석민은 자신을 조금 희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는 베타고, 별로 형질 같은건 상관 없으니까.
“그럼 내가 오메가인 척 할게. 그 뭐, 열성 오메가 그런 것도 있다며? 거의 베타나 다름 없다던데. 그럼 들키지도 않을 거구.”
응응. 다르긴 아주 다르지만, 그런 게 있긴 하지. 정한은 또 고개를 한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없다. 쓸데없는 소릴 해대다 석민이 안 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단 약간의 착각이 곁들여 지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편이 정한에게는 좋았다.
결국 석민은 정한의 가족들 앞에서 열성 오메가인 척하기로 했다. 아주 형질이 약한 오메가 롤을 스스로 정한 석민은 단단한 얼굴로 정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안 들키도록 해 볼게. 또 한번 감격한 정한은 석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석미니 뿐이야… 진짜 고마워. 사랑해.”
진심 999%의 말이었다.
내가 형이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우정 가득한 청춘물을 찍는 석민과 그 옆의 정한이 추구하는 장르는 조금 많이 달랐다. 어쨌거나 사랑이잖아?
정한은 곧장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결혼할 사람, 아니 결혼하고 싶은 사람 데려올게요. 선자리 마다 애프터신청은커녕 퇴짜를 놓는 통에 당장 드러누워 시위라도 할 기세였던 정한의 할아버지는 일단 기립박수를 쳤다. 정한에게 선자리를 권한 이래로 냉랭하기 짝이 없던 식사 시간의 분위기도 한껏 풀렸다. 정한만큼 간덩이가 크지 않은 다른 식구들은 풀린 회장님(할아버지)의 표정 앞에 조금 안심 된 얼굴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떠들어댔다.
애인이 있었으면 진작 데려오지. 선자리를 열 번이나 나가고서야 겨우 그걸 말해?
딱봐도 정한을 떠보는 멘트였다. 니가 방금 지껄인 그 말이 구라는 아니겠지? 라는 의심. 물론 당연하게도 구라였지만 현실로 만들 테니 별 상관없지 않나? 정한에게는 그런 류의 양심은 없었다. 그건 가풍이니 언젠가 할아버지가 알게 되더라도 이해하시겠지.
애인한테 동의는 구해야 맞잖아요. 오래 친구로 지내다가 애인 된 지 오래되진 않았어요. 근데 갑자기 인사드리잔 얘길 어떻게 해요. 그것도 결혼 타령하시는 할아버지한테. 그러니까 그냥 결혼 전제, 이런 거 없이 인사만 드리러 올 거예요. 애한테 부담줄 순 없잖아. 결혼이 어디 쉬워요? 할아버지한테나 쉽지 우리한텐 아니야.
마치 한껏 스윗한 애인인 양, 건실한 체 떠드는 정한의 버르장머리라곤 없는 말에 의심하던 할아버지의 기세도 약간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하니 데려오는 이를 살펴보면 알겠지. 열 길 물속보다 수만 배는 어려운 제 다섯째 손주의 속보다는 전혀 모르는 젊은이의 속내를 살피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었다.
어차피 니네 둘은 지금 당장 사귀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 안 할 걸? 누가 너네처럼 자주 만나고 밥 먹고 그러냐?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하긴, 우리가 특이하긴 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저와 정한이 특별한 관계라는 것쯤은 석민도 알고는 있었다. 근데 뭐, 사이 좋은 게 나쁜 것도 아닌데. 심심함을 달래고, 또 별 이유없이 같이 있어도 편안하고, 소식을 못 들으면 섭섭하거나 아쉬운. 가끔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 당시 친구들과의 관계처럼 매일 얼굴을 보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는 복이 아닌가 싶었다. 김민규나 문준휘도 사업을 같이하는 탓이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정한과 석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나. 역시 친구도 이럴 수 있는 거임.
정한이 뭐라고 떠들든 윤정한이 자신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있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가져본 적 없는 석민이었으나, 자신과 정한 사이에 구축된 애정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늙어서 외로우면 윤정한이랑 같이 살 수 있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고, 또 연애나 결혼이라는 사회적 형태도 아니었던 것뿐이다.
김민규의 말대로 사귀는 ‘척’하는 생활과 이전의 생활의 다른 점은 없었다. 평소처럼 퇴근 후 같이 저녁을 먹고, 시간을 때우고 적당히 정한이 석민을 데려다주거나, 석민의 자취방에서 죽치다 제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 가끔은 둘이 게임에 불이 붙어 밤새 게임을 달리거나.
오랜만에 연락한 누나에게 뜬금없이 물은 누나, 연애하면 애인이랑 뭐 해? 하는 물음에 너 애인 생겼니? 하는 물음을 듣고, 눈을 굴리다 아 어, 뭐 그렇지. 해버린 것, 그리고 누나로부터 들은 온갖 데이트 코스나 평일 데이트는 죄 제가 정한과 해온 것 그 자체였다. 우정과 사랑은 별 차이가 없구나. 그래서 엄마 아빠가 결혼하면 의리로 산다는 말을 한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 설정은 이랬다. 친구로 잘 지내다 반년 전쯤부터 만나고 있다. 친구로 지낼 때랑 지금이랑 데이트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 진실이 80 퍼센트 이상 섞인 거짓말. 주말이며 평일이며 둘이 칠렐레 팔렐레 국내로 국외로 쏘다닌 기록이며 서로의 SNS 게재용 사진들까지 하면 그야말로 티라고는 1도 나지 않을 완벽히 준비된 거짓말이었다.
약속에 늦는 법이 잘 없는 석민을 10분째 기다리던 정한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드리웠다. 당장에 석민의 자취방에 올라가 확인을 하고 데려오면 될 일이었으나 또 할아버지에게 인사까지 시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기가 좀. 체면이나 염치 따위는 없이 살던 윤정한치고는 섬세하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다. 차 프레임이 달달 떨릴 정도로 다리를 떨던 정한은 석민의 빌라 공동현관이 열리며 수트를 차려입은 석민이 튀어나오는 걸 보기 무섭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달달 떨던 다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멎은 채였다.
“형, 미안! 넥타이가 너무 안 매져가지고-”
허헣. 광대가 한껏 올라온 정한은 아유 괜찮아 괜찮아, 니가 고생이 많다. 하며 석민의 옷매무새를 살펴주었다. 아이고 내 새끼, 면접 볼 때 말곤 수트니 넥타이니 하는 꼴을 못 봤는데 오늘 보는구나. 할아버지 ㄱㅅㄱㅅ. 주접이 풍년이었다.
“오늘 너무 멋있다. 울 할부지가 너한테 반하면 어떡해?”
정한의 헛소리는 늘 석민에게 잘 먹혀들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인 주제에 던지는 농담에는 웃었다. 인사를 가기로 결정된 이후 석민은 계속 할아버지와 가족들에 대해 물었다. 큰누나가 어디 계열사에 계신다고 하셨지? 나 모르는데? 형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동생 다니는 학교밖에 몰라. 허헣.
“내 빤스는 색깔이랑 개수까지 다 알면서, 지네 가족은 어디서 일하는지도 모르네. 그것도 할아버지 회사에서 다들 일하시는데.”
“안궁금한데 어떡해?”
“내 빤스 색깔은 궁금했던 거냐고!”
당연하지. 라고 말하면 한 대 맞을 분위기라 아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대답하고 넘겼다. 솔직히 할아부지나 형 누나들이나 엄빠보다 널 더 자주 보거든? 난 토요일 아침 밥먹으러 갔을때 말곤 그 사람들 안 봐. 너는 뭐 너네 누나랑 통화 자주하냐. 아니잖어-. 그래도 어디서 일하는 진 알거든? 무슨 부서인지도 알아? 뭐랬더라, 영업인가? 아니거든 니네 누나 SCM팀에서 일한다고 하셨어. 넌 그걸 어떻게 아냐? 저번에 너랑 누나랑 통화할 때 옆에 있었잖아. 기억력도 좋네….
언제 긴장했냐는 듯 평소처럼 주거니 받거니 투닥거리던 석민은 정한의 차가 큰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동네로 들어서자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와, 드라마에서나 보던 거 같애.
“그나저나 괜찮은가? 형네랑 우리 집이랑 집안 같은 거 차이 너무 나지 않아?”
“우리 석민이, 형이랑 결혼해주려구?”
“아니…, 애인으로도 할아버지가 탐탁지 않아 하시면 어떡해.”
“그런 건 신경 안써도 돼. 그리고 너네 집이 뭐 어떤데. 너두 알잖아. 우리 둘째 형 결혼만 세번했고, 둘째 누나는 사고쳐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적도 있고, 우리 막내는 영어는 1등급인데 국어가 7등급이래. 거기다가 울 할아부지는…….”
“아 그만. 귀 썩을 거 같애.”
정한이 줄줄 늘어놓는 자기 가족들 뒷담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석민이 제 귀를 문질렀다. 아니 자기 누나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흠은 왜 저렇게 줄줄 꿰고 있어?
“그치? 그니까 신경쓰지 마. 내가 다 이겨.”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다 이길 것 같아 든든한 동시에 두렵기까지 한 장담이었다.
인사부터 식사까지 흐름은 자연스러웠다. 애나 어른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하고 애살 있는 석민은 정한의 식구들에게는 유독 더 살갑게 굴었다. 말로만 듣던, 전에 들은 적 있는, 정한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 속 인물들을 만나는 것은 긴장되는 동시에 꽤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막연히 무거운 분위기일 것이다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의 표정이 밝은 탓이었다. 중간중간 그들 모두가 정한을 흘긋흘긋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뭐 그럴 수 있지. 낯을 가리시나? 하긴 정한이 형이 낯을 좀 가리긴 하니까.
식구들은 정말로 낯을 가리고 있었다. 귀엽게 웃으며 말을 살갑게 붙여오는 석민이 아닌 쉴 새 없이 웃으며 혀짧은 소리를 곧잘 내는 정한에게였다. 엄마 저거 우리집 아들 맞아? 둘째의 물음에 정한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불여시가 윤정한 탈이라도 쓰고 기어 들어온 거 아니야? 하는 말에는 부정 조차 못했다.
정한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하던 석민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가 어찌 됐든 새로 들어 올 손주며느리는 누구보다 살갑고, 인상도 좋은 데다 정한을 꽉 잡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한의 감정은 너무도 티가 났다. 제 속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정한이 날것으로 까보이는 애정 앞에 식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거 윤정한 아냐. 그나마 가족 중 어머니를 포함해 정한의 호의를 한껏 받고 있다고 여겨지던 막내가 단언했다.
상황이 적응 되니 놀림거리가 생겼다 싶어 입을 열려던 넷째는 마주친 정한의 웃는 눈에서 빔이 나오는 것을 목도하고 시선을 밥상으로 다시 처박았다. 깝치지 말자. 얌전히 보내드리자.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그 할아버지를 뛰어넘고 사회적 경제적 자유를 쟁취해낸 윤정한의 광기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그래서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냐.”
정한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동시에 나온 말에 석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얘기 없었잖아?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친 정한의 얼굴도 놀란 토끼라 아, 얘도 못들은 얘기구나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시발 들킬뻔했네.
석민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는 걸 본 정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혼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왜 결혼 얘기를 하고 그래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정한이 반항적으로 제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끼어들어서 말 보태기만 해. 니네 주식 내가 다 털어간다. 시퍼렇게 도는 정한의 안광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무슨 결혼이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석민이랑 저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았다구요. 시간도 많고 저희 아직 어려요.”
석민은 그다지 들어본 적 없는 정한의 단호한 말투였다. 아니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저런 식은 아니었지. 석민의 당황을 달래줄 겸 아까부터 잡고 싶었던 손을 이때다 싶어 잡은 정한에 석민이 조금 놀랐다. 얘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의지하게 해주는구나. 생각보다 믿음직스럽잖아? 하긴 평소에도 애처럼 굴다가도 어떤 땐 또 완벽하게 의지하기 좋은 형처럼 굴긴 했다. 석민의 손길이 정한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 괜찮아, 어차피 하기로 한 연기. 잘해보지 뭐.
사심 원헌드레드 퍼센트의 욕망 그 자체인 스킨십 앞에 대단한 착각을 한 석민이 어른들을 향해 말했다.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결혼.”
정한이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석민의 손을 잡은 채였다. >.< 이석민 개쩔어. 느므느므 멋있어.
식구들 또한 비명을 지를 기세였다. 윤정한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정한의 양친은 당장이라도 석민을 포켓볼에 넣어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싹싹하고 예의바른 데다 웃으며 정한을 달래는 아량에 그를 휘어잡는 것까지 완벽한 손주 며느리 상이었다.
“…고맙다.”
정한과 할아버지가 동시에 석민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달랐으나 고맙다는 내용만큼은 둘 다 진심 그 자체였다. 그 속내들을 조금도 읽지 못한 석민은 또 예의 바르게 웃으며 저야말로 감사하죠, 하고 말았다. 제 발목을 감아 당기던 윤정한의 늪에 제가 허리까지 빠진 줄도 모르는 채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싶을 즈음엔 이미 마치 석민이 당장 다음 달에라도 정한과 결혼을 할 것같은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윤정한은 제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입술을 감쳐물고 올라가는 광대를 누르기에 바빴다. 이렇게까지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평생 식구들을 잘 잡도리해온 덕분에 얻은 쾌거였다. 친구들이 곧잘 저를 운정한, 운정한 불렀지만 이토록 운이 좋다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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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갈 때 연락해 데리러 갈게
아 뭘 택시타고 가면됨ㅎㅎ
데리러 간다고 전화 꼭해 안하면 삐침
몇 년만의 고등학교 동창회였다. 통화목록까지 다다르는 데만 해도 몇 번을 헛손질 할 만큼 석민은 머리 꼭대기까지 취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정한과 대화를 나눈 카톡방을 들여다봤다. 안 하면 삐친다니까 전화해야지. 몇 번의 시도 끝에 정하니형♥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누른 석민은 울렁거리는 도로를 보며 3차 장소 앞 보도블록 한켠에 구겨져 앉았다.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혀엉-”
“아이고 우리 석민이. 잔뜩 취했네. 지금 어디야? 다들 집에갔어?”
“아니이- 잠깐 나왔어, 바람- 푸우- 쐬는데, 집에 가야 될거 가터.”
뚝 뚝, 의식이 끊어지듯 나오는 말에 정한이 작게 웃었다. 응 가게 이름 뭐야? 거기 1차 장소에서 별로 안멀지? 응 바로 옆인데…. 일단 출발하께. 통화 계속 하면서 가까? 너 전화 끊으면 자는 거 아냐? 아니야아. 그래그래 쪼끔만 기다려어. 으응-. 기우뚱 기우뚱 알콜이 몸을 타고 흐르는 대로 흔들리던 석민이 술기운을 좀 날려보겠다고 푸우- 푸우- 숨을 내쉬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소주를 몇 병이나 퍼 마신 건지. 2차 때 섞어 먹은 막걸리가 문제일지도 몰랐다. 막걸리 먹고 취하면 엄마 아빠도 못알아본댔는데.
“아이고오. 어뜩해.”
언제 시간이 갔나 싶은데 어느새 정한이 제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봐요. 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저를 흔드는 정한에 나 안자! 당당하게 외친 석민이 손을 뻗었다. 일단 일으켜 봐라 애비야. 예예 아버님. 쿵짝은 잘도 맞았다.
정한의 손에 일으켜져 조수석에 뉘인 석민은 제가 숨을 쉴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많이도 먹었네. 숙취해소제랑 아이스크림 사왔으니까 이거부터 먹구 자.”
“……안 잘건데.”
“그럼 이거 먹구 있자.”
석민이 제일 좋아하는 트로피칼 맛이 나는 숙취해소제의 뚜껑까지 따서 건네는 정성에 석민은 꾸벅 인사까지 했다. 뭐야,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터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말 안해두 잘 아네. 역시 똑똑한 인간은 뭐가 달라두 다르다.
“언능 쭈욱 마셔.”
석민이 숙취해소제 병을 비우기 무섭게 병은 사라지고, 손에 아이스크림 콘이 쥐여졌다.
“민트초코니까 안심하고 드십쇼.”
“감삼다. 감삼다.”
한참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우겨 넣던 석민이 몸을 돌려 정한을 바라봤다. 밤마다 빛번짐이 심하다며 운전할 때 끼는 동그란 안경은 역시 안 어울렸다. 왜애. 흘긋 석민을 돌아본 정한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 취향은 아닌데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 윤정한. 게을러서 침대에서 몸도 잘 안 일으키는 주제에 저 만나러는 꼬박꼬박 들르고, 제 퇴근길이나 술마신 날에도 매번 픽업까지 오고.
“다른 애들보다 내가 더 친해서 데리러 오는 건가?”
뜬금없는 석민의 물음에 정한이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니, 너 좋아서.”
“맨날 하는 소리. 형이 나 좋아하는 거야…, 나도오 알지.”
“너 잘 모르는 듯.”
“에이. 형처럼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어딨다구 내가 몰라.”
정한의 시선이 석민을 스쳤다. 너 내 말 잘 안 믿잖아. 믿어 왜! 그리구 그거는 형이 맨날 장난치니까 그러지. 너 좋다는 건 장난 아니라고 백번 말해도 한 번도 안 믿더라. 나긋한 웃음 섞인 말투가 정말 장난 같았다. 또 장난치지? 석민의 물음에 정한은 답하지 않았다. 뭐야. 대답도 안 해.
“장난 아니니까 그러지.”
석민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졸려? 졸리면 자. 정한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톤이었지만 석민의 귀에 달리 들렸다. 장난이 아니면 뭔데? 술기운에조차 눈치껏 튀어 나가지 않은 말이 석민의 목구멍에 걸렸다.
“형 김민규 좋아해?”
개 뜬금없는 물음 앞에 정한이 뭐? 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손님 진상 짓 장난 아니시네. 윤정한 대답.
“민규 좋아하지.”
“전원우는?”
“워눙이 좋지.”
“최한솔은?”
“좋으니까 얼굴보고 살지.”
“문준휘는?”
“요새 너무 웃기더라. 그거 아니더라도 좋아하지만.”
“나는?”
당연히 나올 것 같은 물음 앞에 정한이 좀 이상하다는 듯 석민을 돌아봤다. 우는 거 아니지? 오늘 감수성 좀 이상한데 우리 석민이? 야, 대답이나 해.
“너무너무 좋아하지.”
대답과 함께 마주친 윤정한의 눈 때문에 석민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와 씨발 내가 뭘 본거지? 나 어떡해? 석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석미나 잘자-
이석민은 비상에 걸렸다. 그 놀라운 깨달음 앞에 잠이 다 깨버리진 않았고, 정말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잠이 들어버리긴 했지만 기억과 정신은 불행히도 다음날 온전했다. 석민은 말 그대로 저와 윤정한 사이의 10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위장이 4개라도 된 듯한 되새김질 과정에서 어라? 싶었던 순간들이 수없이 떠올랐다. 아니 이게 진짜라고? 윤정한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돼.
이석민 치고는 오래 고뇌했으나, 애초에 석민은 뭔가를 오래 고민하는 타입이 못 되었다. 고민을 좀 하다가 그냥 적당히 지르고 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담받고 의지하는 게 석민의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상담 대상인 윤정한에게 상담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전김문최 들에게 상담을 받자니 너무 정한의 감정을 까발려 놓는 것 같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자니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일전에 데이트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은 이후 누나와는 통화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돌고돌아 전김문최였다. 그런데 그 반응이 모두 한결같았다.
“ㅎㅎ이석민 너는 등신 아니니? 그걸 이제 알았니?”
당연했다. 윤정한은 대학시절부터 쭉- 이석민을 좋아했고, 그건 잡으면 잡힐것처럼 선명히 눈에 보이는 감정이었다. 애초에 대우부터 달라요. 윤정한은 밥 생각들면 너 찾지만, 우리는 안 찾고요, 너랑은 같이 있지만 우리랑 있을 땐 금방 기 빨려서 혼자 있고 싶어 하고요, 너는 데리러 가지만 우리는 어쩌다 태워주는 것 말곤 데리러 오는 일이 없어요, 인간아. 그리고 보통 친구끼리는 이 정도 나이 처먹고 너네처럼 허구한 날 만나지도 않아요.
“그럼 나랑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무래도 그런 것도 좀 있지 않을까? 우리랑 할 바에는 선봐서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이석민 너는 어때. 만약에 니가 윤정한 포함해서 우리 중에 한명이랑 결혼하거나 그게 아니면 선봐서 결혼 해야한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을 택할 거임?”
“그거야…,”
윤정한이었다. 전김문최..는 좀, 징그럽지 않나?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랑 선보기는 싫고. 그나마 산다고 하면 윤….
“아니 그건 좀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예, 다르지 않아요 선생님. 윤정한이 딱, 그렇게 했거든요.”
김민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둘이 비밀연애 하는데 티 다 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대학 때 진짜 그렇게 생각했었지.”
한솔과 원우의 덧붙임까지.
“그래서 지금은 연애 하는 거야? 그 뭐 인사도 갔다 왔다며.”
“그거야 가짜니까.”
석민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 새끼들 연애질 하네. 띠거워라. ‘ㅎㅎㅎㅎ’ 얘네 좀 더러운 거 같아요.
“안 가짜 같아?”
“응. 진짜 같아.”
고민을 해소하려 진행한 상담은 석민의 고민만 는 채 끝이 났다. 그날, 윤정한은 영문도 모른채 김민규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묘하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어딘가 소극적이 된듯한 석민의 태도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도대체 뭔데? 내가 모르는 게 뭐야. 답답한 건 참을 수 없는 정한의 인내가 코끝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단언컨대 생김새만으로 따진다면 석민은 결코 정한의 취향이 아니었다. 첫 만남에도 외양에 대한 인상은 0에 수렴할 정도였다. 투자대회 이후 친해지는 과정에서 보인 석민의 바보 같은 착한 성정에는 빠지지 않을 수 없던 것뿐이었다. 석민은 정한과 다른 점이 많았다. 편견이 없는 것이나, 시간과 정이 쌓이지 않은 타인에 대한,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고 대단하더니 종래에는 좋아지고 말았다.
워낙에 지밖에 모르는 인류인 윤정한이 나만큼 얘가 좋은데? 하는 생각을 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정한과 석민의 관계는 단단하고 공고해진 상태였다. 정한은 그걸 깨트리면서까지 제 감정을 강요하거나 석민과 연애로 나아가야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여러 가지 욕구들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정한은 짐승이 아니니까. 그리고 지가 진데 지질하고 구차하게 굴 생각도 없었고, 석민이 제 애정을 그야말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싫지 않았다. 10년, 구구절절 눈물로 얼룩진 남들의 짝사랑과는 다른 결의 세월이었다.
10년.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운 세월이었다. 내내 나를 좋아했다는 말이야?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니 윤정한이 대단한 건가. 어떻게 고백을 안해? 아니 했는데 내가 안 믿었나? 이것도 맞지 저것도 맞고….
자각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연애감정은 0이라고 생각했던 석민이 정한을 연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해서였다. 나 재고 따지는 거 못하는데, 연애 안 해봤는데. 어떡해? 진짜 어떡해? 하면서도 윤정한과 저녁을 먹는 것은 그만두지 못했다. 존나 미안한데 어떡해. 그리고 안 싫은데 어떡해.
석민은 알고는 있었지만 완전하게 언어로서 인정했다. 나도 쟤가 필요해. 그리고 결심했다.
형, 나 할말 있어.
카톡으로 날아온 석민의 메시지에 정한이 벌떡 일어났다. 띄어쓰기에 쉼표와 온점까지. 이건 분명 진지한 이야길 하겠다는 징조였다.
어 그래, 석민아. 드디어! 정한은 자신의 코끝에서 달랑거리는 답답함을 드디어 해소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응응, 오늘 저녁은 조용한 데서 같이 먹을까? 아니, 부어치킨 가자. 에? 정한은 과거 숟가락으로 때려 맞은 기억이 있는 치킨 프랜차이즈의 이름 앞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좋지. 거기 치킨이 맛있긴 해? 지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주제에 맛을 운운하는 게 웃겼다. 생맥은 좀 썼던 거 같은데. 쓰읍… 뭘 눈치채거나 제 수작질이 들킨 게 아닌지 불안해진 정한의 다리가 책상 밑으로 달달 떨렸다.
분명 오전 11시까지 쏜살같이 달리던 시간이 이후로 1초당 20분씩을 소모하며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말이었다. 다섯시 반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5시 15분에 사무실을 나섰다.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저는 먼저갑니다. 오늘도 눈썹 휘날리며 칼퇴를 갈긴 윤대표에 직원들의 눈이 도르륵 굴렀다. 평소보다 일찍 가시네.
월요일이라 그런 건지, 월요일인데도 그런 건지 5시가 넘었음에도 막히지 않는 길 앞에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석민의 회사 앞에 도착한 정한이 석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나지금 너네회사앞ㅎㅎ 끝나면천천히나와여
저지른 죄가 많아 쫄린 윤씨와 미래가 캄캄한 이씨가 또 다시 치킨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다리 하나를 집어 제 앞접시에 놔주는 석민의 손길이, 자백을 앞둔 범인에게 국밥 한 그릇 때려 먹이는 형사처럼 느껴졌다. ㅎㅎ나 사기는 못치려나바여.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못 들었으니 뭐.
“잘머그께.”
석민이 놓아준 닭다리를 정한이 한입 물었다.
“형, 결혼하자.”
툭, 정한이 들고 있던 닭다리가 접시 위로 추락했다. 어라거? 눈이 깜빡깜빡. 이거 무슨 감독 영화에서 봤던 장면 같은데. 판단이 되지 않아 멍청하게 바라보는 정한에게 석민이 다시 한번 말했다.
“결혼하자고.”
자깐만. 자깐만 석미나. 우물거리며 말을 뱉은 정한이 빠르게 몇 번 제 입속의 치킨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혹시, 너도 집에서 선보라시니?”
“아니.”
석민의 얼굴은 진지해서 조금 귀여웠고, 정한은 그 진지한 대답에 얼굴이 굳었다. 그럼 뭔데??? 비명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가슴이 두근두근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저 부정맥 올 것 같아요. 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정한은 정신이 없었다.
“싫어?”
“아니!”
정한은 바로 이 순간을 자신이 올해 가장 잘한 짓 넘버 원으로 꼽을 수 있었다. 단 일 초의 지체도 없는 대답. 석민이 결혼하자는 말에 자신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정신머리가 없는 순간에도 발휘되는 판단력.
“석미나,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제 눈을 똑똑이 바라보는 석민의 대답에 정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진짠가. 실화인가. 리얼인가.
“왜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싫다고 했었잖아.”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과는 달리, 차분한 음성이었다. 정한은 본인의 사회생활 짬바를 이런 데서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괜히 분위기 깼다가 안 한다고 엎을까봐. 정한을 바라보던 기세나, 결혼하자 말하던 단호함과는 달리 질문에 대한 답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마주치고 있던 시선이 테이블로 내려가는 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가도 다시 마주쳐 오는 것에 요란히 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서 롤코 타는 기분을 다 느끼네. 긴장으로 팽팽한 대치에 숨도 못 쉬다시피 하던 정한은 입을 여는 석민의 귀끝을 보고 말았다.
“…너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면 짜증날 거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정한은 또 튀어나올 것같은 비명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개멋있어. 와. 이석민. 반했어. 미쳤어. 정한의 주접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와…. 나 심장 멎을 거 같애.”
석민도 꼭 같은 심정이었다. 전에도 윤정한이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은데. 왜 몰랐을까. 석민은 정말로 자신의 눈치없음이 놀라웠다. 저렇게 티가 나는데.
“있지, 그럼 석민아.”
응.
이번엔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너 나랑 뽀뽀도 할 수 있겠어?
정한의 물음에 석민은 눈 앞에 놓인 마카로니를 하나 집어 정한을 향해 던졌다.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지, 소꿉장난 하자고 했냐? 석민의 타박에도 정한은 광대가 한껏 올라간 채 히히 웃었다. 아니, 혹시 몰라서. 석민아 그럼-
스킨십 얘기 흐즈 므르.
아니 부부 관계에서 이건 굉장히 중요-
석민이 숟가락을 드는 걸 본 정한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래 그건 내가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지. 흐흐흐. 고개를 끄덕인 정한이 바보같이 웃었다.
“끄랭. 결혼하자.”
To 그츠
From 일먹
“결혼할래?”
눈앞에 놓인 치킨 다리를 입에 무는 순간 귀에 박힌 말에 석민은 으? 하며 정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는데, 결혼하자. 입에 넣은 치킨은 아주 바삭하고 고소해서 현실감이 넘치는데 귀로 흘러들어온 언어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 나머지 석민은 치킨 다리를 집었던 손가락을 닦지도 않은 채 제 귓구녕을 쑤셨다.
“어라거?”
입안 가득 들어찬 튀김옷과 닭다리살 덕분에 발음은 완전 뭉개져버린 뭐라고,는 윤정한이 아까 지 손 닦은 물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주는 데에 완전히 닦여나가 버렸다. 석민의 어이와 함께.
배고팠어?
이 또라이 새끼가……. 폭탄도 그냥 폭탄이 아닌 핵폭탄 같은 말을 지금 던져놓고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다. 입안에 들어찬 살을 윤정한 씹듯 우적우적 씹은 석민이 삼키다시피 입안의 것들을 넘기고서야 말 같은 말을 뱉을 여유가 생겼다.
“미친놈아 니 뭐라고 했냐.”
터헣.. 우리 석미니, 터프하구 머싯기두 하지. 박력이써 역시 역시, 내가 고른 남자는 머가 달라두 다르다. 말꼬리까지 늘려가며 헛소리를 싸대는 게 아 오늘이 그날인가보다 싶었다. 몇 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윤정한 타작하는 날.
씹던 닭다리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석민이 새 숟가락을 들고 팔을 마구 휘둘렀다. 멀찍이 물러 앉은 정한이 얄밉게도 아 왜-, 하며 잉잉 염병을 떤다. 아 왜애? 아왜애? 왜 소리가 나와?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또! 또! 그놈의 주둥이 딱 대!
“주둥이는 댈 수 있는데 그걸루 때리면 나 이빨 몽창 나갈걸? 우리 석민이 돈 많니?”
“에라이 미친놈아!”
기어코 석민의 손에 든 숟가락이 정한의 마빡으로 날아갔다.
“아악! 지쨔루 때리는 게 어디써! 아퍼!”
하나님 아버지, 제가 당신을 안 믿은 죄를 이제 받는가봐요. 석민이 초딩 때조차 단 한순간도 믿어본 적 없는 남의 아버지를 찾으며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나 진쨔 아픈데……. 숟가락에 정통으로 때려 맞은 마빡을 문지르며 정한이 울상을 하는 통에 석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진짠가? 쇠숟가락으로 빡 소리나게 맞았는데 안 아프겠어? 덧붙이는 말에는 그렇게 세게 때렸나… 하는 걱정이 따르며 석민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팔자로.
“어디봐봐. 글게 왜 이상한 소릴 하고 그래애….”
“요기. 아포.”
혀짧은 소리를 기깔나게 내며 시뻘개진 이마를 들이대는데 진짜 당장이라도 멍들 모양새로 붉어진 이마에 석민의 입꼬리마저 추욱 처졌다. 아이고… 손으로 때릴걸. 백번 다시 생각해도 안 때릴 멘트는 아니었던 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를 슥슥 문질렀다. 멍들지 마라. 들어도 금방 빠져라.
맨질한 이마를 몇 번 문지른 석민이 마무리로 가볍게 이마를 톡 치고는 손을 떼어냈다.
“그래서, 개소리 사유는?”
“나 농담한 거 아니야.”
“또, 또, 또. 내가 윤정한 너를 하루 이틀 봅니까?”
젓가락으로 치킨무를 집어먹은 석민이 정한의 얼굴을 살피는데, 테이블에 팔을 괴고 마카로니만 주워 먹는 정한의 입이 한치는 튀어나와 있었다. 삔또가 상했다? 진짜라고? 입맛이 딱 떨어진 석민이 제가 한입 딱 베어문 것 말고는 손도 대지 않은 치킨을 바라보며 넋을 놨다. 정확히는 넋을 놓은 척했다. 시발 지금 눈 마주치면 쟤가 하자는 대로 할 것 같단 말이야……!
“석민아.”
하지마.
“나랑 결혼하자.”
윤정한의 목소리는 아주 산뜻했다. 석민이 울고 싶을 정도로.
100% 연애결혼
경영학과 1x학번 이석민, 조소과 1x-2학번 윤정한. 접점이곤 교양강의를 제외하곤 없어야 정상일 조합의 그들은 뜬금없게도 학교 대표로 나가는 투자대회의 같은 팀으로 만났다. 주어지는 과제만으로도 삶이 벅찬 자과생들과는 다른 세상 사람인 양 윤정한은 홀로 투자대회에 나서 당당하게 대표 출전권을 따냈고, 석민은 경영학도답게 전공 수업의 조별 과제로 강제 동원되어 대회에 나갔다 출전권을 부여당했다. 아 좀만 대충할 걸. 석민은 에이쁠을 받는 기쁨보다 그 이후의 번거로움이 더 괴로웠다. 그 번거로운 와중 조 과제로 이루어진 팀 내에 두 커플이 생기고 또 박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석민과 정한이 만날 일은 없었을는지도 몰랐다.
문준휘, 김민규, 전원우, 최한솔, 그리고 윤정한과 이석민. 보통 투자대회는 경제학과나 경영학과에서 대충 뽑혀 나간다고 들었는데, 조소과, 컴공과, 호조과, 국문과, 그리고 법학과의 조합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상경계, 아니 하다못해 사과대 출신이 나 하나뿐일 수 있냐고요. 학과와 전공을 이유로 교수님이 나이 짬밥 다 제쳐놓고 석민에게 조장을 떠넘긴 완벽한 환장의 조합이었다.
교수님의 기대라곤 1도 닿지 않은 떨거지 그룹의 수장, 한국대 경영학과 2학년 이석민. 석민의 눈앞은 캄캄했으나 석민이 눈을 감고 있든 말든 하드캐리한 조원들(특히 조소과) 덕분에 떡하니 전국대회에서 일등까지 먹고 말았다. 고학번들이 대거 포진해 교수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경영 선배들의 참담한 예선 탈락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 후로 무리는 대회도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모였다. 처음엔 상금을 나눈단 핑계로 모였고, 이후론 그 상금을 같이 쓰자는 핑계였다. 그럭저럭 잘 생겨 먹은 낯짝들이 아깝게도 자타의적으로 다양한 이유를 품고 아싸처럼 살고있는 그들은 그럭저럭 통하는 바가 있었다. 석민은 그들 중에서는 초 인싸에 속했으나, 반이 나뉘고 선후배가 어쩌구 하는 학과 생활보다는 이 모임이 쪽에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입맛이 똑 떨어졌지만 치킨이 아까워 입에 밀어 넣다 보니 잘 먹는 석민과 제게 할당된 닭날개를 두 입 씹어먹다 말고 맥주만 들이켜는 윤정한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정한은 태연자약했다. 아닌 척 정한의 눈치를 살피는 석민과는 달리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이 짜증스러워 마카로니 하나를 집어 던졌다.
우리 석민이 뭐하는 짓이지?
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한 얼굴로 저와 눈을 똑바로 맞추는 윤정한에 석민은 할말을 딱 잃었다. 나 너랑 안 놀아. 삐치는 건 덤이었다.
윤정한의 뜬금없는 결혼 타령은 없던 결혼에 대한 로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거나, 없던 석민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만개하여 참을 수 없어져서는 아니었다. 후자는 좀 그럴 수도 있다 싶은 일이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할아부지가 자꾸 결혼하래자너…….”
가정사였다. 뭐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오늘 내일 하시는 건 아니고(정한이 이렇게 말했다.) 그저 집구석에 가둬키운 손주들이 죄 커서 결혼을 했으니, 드디어 다섯째 정한이 그 타겟이 된 것 뿐이었다. 근데 그 정도가 정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범위였다.
선자리 몇 번 나가면 될 줄 알았더니, 호텔이니 한정식집이니 하는 델 돌아가며 한 번씩 무려 열 번. 정한은 그 지긋지긋한 선자리에 진력이 나기도 했거니와, 그깟 결혼 해주지 뭐 하는 마음이 또 약간, 그리고 그게 죄 할아버지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하는 마음이 조금 많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이석민을 좀 가지게 되면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어간 결과였다.
그 대답에 석민의 속은 터져나갔다.
“그래서 왜 나냐고!”
그 물음에 정한은 굉장히 섭섭한 얼굴을 했다. 아랫 입술을 반 치쯤 내밀고 한껏 억울하단 얼굴을 하는 양에 이젠 아예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거짓말.
나 너랑 진짜, 안 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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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이 치킨 반 마리를 흡입하는 것으로 쫑난 야식 자리는 그 후 석민의 일방적인 카톡 단답으로 인해 더는 성립되지 않았다. 무려 일주일. 윤정한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단단히 뿔이 난 얼굴이 되어 책상을 탁탁 두드리는 손길에 사무실 인원들은 괜히 정한의 눈치를 살폈다. 다섯시 반 땡하면 퇴근하던 사람이 어제부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섯 시가 넘도록 저러고 있대? 대표가 회사에 너무 오래 남아있으면 좀 부담스럽지-. 프로젝트의 마무리나 급한 일이 아니라면 모두의 정시 퇴근을 위한다며 시간이 되기 무섭게 훌쩍 일어나 나가버리던 정한이 하는 일도 없이 다리를 달달 떨어대는 꼴에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한 게 무려 이틀째였다.
서른 넘은 직장인이 허구한 날 만나는 게 당연하냐, 묻는다면 누구든 당연하지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석민과 정한은 좀 달랐다. 퇴근해봐야 할 일도 없고, 집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또 다음날이 밝으니 그 시간을 좀 더 즐겁게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살림에 젬병인 정한과 맛있는 거 찾아 먹는 것이 인생의 큰 낙인 석민의 니즈가 맞아 저녁 식사 메이트가 된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게으름과 귀찮음을 뒤로하고 정한이 석민을 만나는 게 즐거워서였다. 우리 석민이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양쪽으로 기운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석미나 오늘 저녁은 머 머글꺼야? 내가 갈까?
놉. 니 알바냐.
다소 싸가지 없는 답이긴 했으나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있으니 감내할만했고, 그 와중에 읽씹이나 안읽씹이라는 선택지는 없는지 보는 족족 이응이응, 니은니은. 어, 아니. 싫어. 하며 꼬박꼬박 답장을 하는 석민은 아주 귀여웠다.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가 다시 추욱 처졌다. 혈중 이석민 농도 바닥임. 조졌어요.
석민의 카톡 답장에 진동을 멈추었던 오른쪽 다리가 다시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각박한 세계는 나를 채울 수 없으셈.
안되겠어.
정한의 안광이 이마만큼 빛나고 있었다.
6시 25분, 마지막 직원이 저 퇴근해보겠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정한이 바람처럼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예. 퇴근하겠습니다. 의미 없는 인사가 허공을 떠돌았다. 부리나케 뛰쳐나간 정한이 선택한 것은 전원우였다. 석민 대신은 아니었고, 일종의 미끼 상품인 동시에 상담 상대였다. 너무 단어 단위로 반박을 하거나 이해를 하려 드는 김민규나 너무 다정하게 위로하는 문준휘는 안타깝게도 지금의 정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충 흘려들으며 적당히 대안을 제시할 사람. 그건 전원우지.
대학 시절만 하더라도 한번 자취방으로 박히면 밖으로 소환하기가 어려웠던 전원우는 나이가 먹을수록 집 밖으로 불러내기 쉬워져 요샌 곧잘 부르는 대로 나오곤 했다. 대충 언으랑 1차 때리구 2차로 문준휘, 김민규네 가게 가서 최한솔까지 부르면 자기 보기 싫다고 안 나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석민이 그 정도로 매정한 타입은 못 되었다. 한껏 삐쳐 만나주지도 않으면서도 카톡에 답장은 꼬박꼬박 해주는 만큼이나.
낡고 지친 얼굴의 전원우는 윤정한만큼이나 입이 짧고 먹기 번거로운 것을 싫어했다. 그런 원우에게 정한이 고른 죽집은 제법 괜찮은 선택지였다. 숟가락만 써도 되고, 뭐 발라내거나 할 필요도 없고. 요새 일이 많아 속이 더부룩하기도 했다. 죽으로 속 달래고 2차로 술 마시면 되겠구먼. 역시 윤정한 쓸만해. 누구에게라도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될것같은 상황 속에 원우의 니즈를 고려하여 고른 정한의 초이스는 딱 먹혀들었다.
“메뉴 괜찮네.”
“그치-. 우리 워눙이 마니 머거?”
“톤까지 빼면 더 좋겠고.”
헤헤.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에 원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밥 나오기 전에 본론부터 말해라. 정한은 부담스러울만큼 예쁜 얼굴을 연출하고 눈을 깜빡였다. 10년 전이면 몰라도 그 얼굴을 마르고 닳고 본 입장에서 전원우는 한 대 칠까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작작해라. 죽는다.”
“나 석민이한테 까였어.”
정한이 가게에 들어오기 무섭게 쪼르르 떠다 놓은 냉수를 마시려던 전원우는 손을 멈춘 채 흔들리는 눈으로 윤정한을 봤다. 이 자식이 또 사기를 치나 싶다가도 그 내용 앞에선 멈칫하게 됐다.
“……고백했다고?”
드디어? 라는 물음은 꼭꼭 입안에 가둬놓은 채 겨우 묻고 싶은 말만을 꺼낸 전원우는 슬며시 올라가는 윤정한의 입꼬리가 불안했다. 아니. 결혼하자고 했어.
“에라이, 미친 놈아. 야 나 간다.”
“노노, 노노- 어딜가 워눙이-.”
“야, 놔라.”
원우의 자켓 소매를 쥐고 늘어지는 정한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정한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저건 운동도 안하는게 요령만 좋아서는. 결국 테이블로부터 단 일 보도 벗어나지 못한 원우는 눈에서 영혼을 뺀 채 정한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역시 반지부터 준비했어야 했나?”
“흐흫… 미친놈. 그런다고 받아줬겠냐?”
“왜?”
나였다면 한 번 정도는 진지하게 고려해봤을텐데. 나 울 할아부지 아니라도 돈도 많고, 건실한 회사도 있고, 친구도 있고, 거기다 내 친구들 석민이가 다 알기도 하고…….
쫑알쫑알 늘어놓는 정한의 쌉소리에 전원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니 조건이야 좋지. 너는 알파고, 니 말마따나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다른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이석민 좋아하고. 근데 걔 입장에서는 목욕탕 같이 가는 거 빼고 다 같이하던 친구가 갑자기, 뜬금없이 결혼하자는데. 진지하게 생각이 되겠냐?”
“그런가아…?”
눈썹이 팔자가 된 채 전혀 모르겠단 얼굴을 하는 윤정한을 보며 원우가 혀를 찼다. 편하고 좋은 거랑 결혼하고 싶은 건 다른 거 아닐까?
“결혼하고 싶은 거?”
응. 왜, 결혼한 사람들이 가끔 하는 말 있잖아. 이 사람이랑은 결혼하겠다는 확신,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 그 결혼이라는 거에 이르는 결심 같은 거. 윤정한 너는 몰라도 이석민한텐 그게 없는 거지.
“계기가 없다는 거네?”
“그렇지.”
계기. 조건? 이유? 아무래도 좋았다.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 정한의 안광이 쓸어넘긴 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만큼이나 반짝거렸다.
본 투 비 알파.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알파였고, 심지어는 네 명의 형 누나, 그리고 한 명의 여동생마저도 알파로 태어난 알파 집안의 다섯째가 정한이었다. 장남도, 차남도, 하물며 장녀조차 아닌 삼남에 다섯째. 정한은 눈에 띄기엔 다소 아쉬운 조건이었으나, 타고난 것의 때깔이 다른 나머지 아주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장육부가 자존심으로 들어찬 알파 족속들 사이에서도 정한은 빛이났다. 9살이 되기 무섭게 일곱 살 쯤부터 할아버지와 두던 접바둑은 맞바둑이 되었고, 10살 겨울에는 더 이상 할아버지가 정한을 이기는 일이 없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던 해 시작한 주식은 덩치를 불려 오바 조금 보태서 잘잘이 쪼개질 할아버지의 유산 따위가 부럽지 않은 정도가 되었고, 대학 때 말도 안되는 전공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막학기에 시작한 사업이 대박 나 몇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중견기업 이상의 가치를 품게 되었다. 정한은 완전히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겠구나 싶은 즈음, 정한의 회사가 상장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정한은 규모가 너무 커져 이젠 번거롭고 귀찮다는 납득 불가능한 이유로 회사를 아주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정한을 이해하는 이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알파들의 소유욕은 대단하다던데, 어째서? 과연 그랬다. 정한의 할아버지는 제 식구들을 제 수족으로 두고 하나하나 제 뜻대로 꾸려가길 원했고 실제 그렇게 했으나 정한만큼은 자신의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지 못했다. 너무 잘난 탓이었다. 유산이든 가업이든, 하다못해 기업이라 할지라도 정한을 옭아매진 못했다. 너무 알파다운 나머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한의 선택은 가지치기였다. 쓸데 없는 것은 잘라 버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스스로에 대한 어마무시한 소유욕 앞에 언제든 꾸릴 수 있는 그깟 사업이나 살림 따위는 미련 남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한의 사업이 잘 되던 때 과연 잘난 손주로다, 흐뭇해하던 할아버지는 종잡을 수 없는 정한의 선택들 앞에 쪼그라든 풍선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조차 꺾지 못한 고집과 그 할아버지를 꺾는 대담함. 그런 와중에 의절하는 법도 없이 가족과의 거리도 적당히 지켜나가는 것이 윤정한의 방식이라 정한의 형제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
그들이 보기에 세상은 정한의 발밑에 깔린 것이었다. 툭 차기만 해도 들어가는 골 같은 것. 하고자 한다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인생. 정한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해주는 이는 몇 없었다.
정한은 자신이 석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한 수순 같은 거였다고 생각했다. 윤정한을 안쓰러이 여기는 유일한 사람. 나를 왜? 생각하며 조금 우스워했던 것은 나를 더, 로 바뀌어갔다. 정한이 형은 석민이 앞에서 유독 어리광이 심해지는 거 같다 야. 부정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투정 부릴 일이 아니어도 정한은 석민 앞에서 유독 어린 체했다. 석민은 정한을 과하게 귀여워하지도, 싫어하지도,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가끔 귀여워하고, 윤정한의 알 수 없는 짓거리들을 대개 받아줬으며,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면서 해오는 고민 상담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정한의 편을 들었다. 석민은 정한의 믿는 구석이었다.
윤정한은 아주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 매일매일 붙어 다니는 정한과 석민을 지켜보던 이들도 정한에게서 피어난 감정을 눈치챌 정도였다. 정한이형? 석민이 좋아하는 건 알겠더라. 금세 제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던 윤정한은 이대로가 좋다는 듯 몇 년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사실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한 적도 있었으나 석민이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한의 생떼 같은 고백들 앞에 석민이 눈을 부릅뜨기 시작했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석민에게 더는 시도하지 못했다. 석민은 정한의 믿는 구석인 동시에 두려운 구석이었다.
저 새끼들은 뭐가 문제지?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으나 구경하는 것이 재미없지는 않았으므로, 또 저들이 끼어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침묵했다. 나서다 둘 중 그 누구한테도 미움받는 일은 없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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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싶은 것과 사람이 좋은 건 다른 얘기다. 연애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던 전원우의 말은 정한의 머릿속에 콕 박혔다. 그러니까, 연애를 안해도 결혼은 하고 싶을 수가 있다는 거네? 나랑? 계기, 이유, 조건, 등등 그 중 어떤 게 있기만 하다면. 논리라곤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고였으나 정한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이석민의 강경한 태도에 금을 가게 하고, 제 할아버지 앞으로 저와 이석민을 끌어다 놓는 것. 정한의 목표가 명확해졌다.
정한은 일단 빌었다. 뚱한 얼굴을 하고 저를 쳐다도 안 보는 석민의 시선이 제게 닿기 무섭게. 석민은 그런 정한의 태도에 꽤 누그러진 얼굴을 했으나 여전히 뿔난 마음이 없지는 않아서 묘하게 태도가 냉랭했다.
“석미나-, 나랑 그렇게 결혼하기가 싫으니?”
술이 올라 목까지 시뻘겋게 변한 정한이 석민을 향해 잔뜩 몸을 기울인 채 물었다. 속이 제법 상한 얼굴로 눈썹을 한껏 팔자로 만든 정한의 얼굴은 꽤 귀여웠으나, 그 자리에서 그걸 귀여워할만한 인간은 평소의 석민 정도뿐이었다. 한심함이 80%, 애잔함이 0.1% 그리고 그 나머지 19.9%의 귀여움. 윤정한의 진상 짓에 귀여움을 느낀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글러 먹은 것이었으나, 석민은 그 상황과 제 취향의 이상함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너 아니믄…… 모르는 아무 여자랑 겨론 해야할지두 모르는데에… 니가 싫으면…, 아니 그래두 싫은데.
정한의 노림수 가득한 취한 척에 전원우는 올라가려는 한쪽 입꼬리를 누르기 바빴고 김민규를 위시한 다른 이들은 당장에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 됐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결혼? 윤정한이랑 이석민이? 짧은 사이에 테이블 위로 오가는 시선에 윤정한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석민이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냅다 내저었다.
“야, 아니다. 아니야. 나 윤정한이랑 결혼한다고 한 적 없어!”
“그치이. 우리 석미니는 나 싫다고 했어…….”
개 아련한 표정을 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윤정한을 보던 문준휘의 손이 절로 올라가 관자놀이께에서 움직거렸다. 저 새끼 돌았냐는 뜻이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는 전말이었다. 윤정한이 윤정한 했네. 민규가 간단하게 정의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 되니 당사자가 아닌 본인들에게는 별 중요한 일 같지도 않고 전원우가 그렇게 느꼈듯 좀 재밌어지는 것이었다.
“그냥 하는 건 어때? 결혼.”
“그래, 해라!”
말을 꺼낸 것은 한솔이었고 거든 것은 민규였다. 딱히 원우가 뭘 부채질하지 않아도(그런 재주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분위기는 장작에 휘발유라도 들이부은 양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자기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네? 나도 인생 있거든?!”
“야야, 이석민. 잘 생각해보라고. 정한이 형 잘생겼어 안생겼어.”
“내 취향 아니라고!”
자기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다 싶으니 입을 꾹 닫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정한이 석민의 단호한 호불호 표현에 그대로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와중에 정한이 이마를 그대로 테이블에 때려 박을까 걱정이 된 석민은 제 손을 테이블과 그 널찍한 이마 사이에 밀어 넣었다. 역시 석미니 뿌니야…. 이석민이 때린 말에 맞고 쓰러지던 주제에 또 저를 챙기는 손길에 감동이라며 잉잉 매달리는 건 우습지도 않았다.
“아니 얼굴 빼고도 생각을 해봐봐 좀.”
논리 나잇이 시작되었다.
“조건으로 따지면 윤정한만한 게 어딨어.”
“너는 결혼을 조건 보고 하니?”
“아니 들어나 보라고. 니 윤정한 니 취향 아니랬지만 맨날 귀여워하잖아. 아냐? 그리고 저 형이 집안이 나빠, 아님 돈이 없냐? 돈 진짜 야 그것만 보고 결혼해도…….”
정한의 가치를 매기는 가차 없는 민규의 표현에 석민은 귀가 썩을 것 같다고 느꼈으나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정한이 성격도, 자기 취향은 아니지만 얼굴도, 가정 환경도, 금력도 어디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을 넘어 제법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 석민의 결혼관은 그랬다. 얼레벌레 학교 다니느라 연애랑은 담쌓고 살았으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확신을 갖고 가정을 꾸리게 될 거라고. 그러니 정한은 석민에게 결혼 상대가 못 되었다.
분위기를 보던 전원우가 입을 뗐다.
“굳이 결혼까지 안하더라도 좀 도와줄 순 있지 않나?”
“뭐를?”
“어떻게?”
한껏 흥미가 오른 이들이 머리를 모으는 게 부담스러운 원우가 고개를 뒤로 빼며 테이블 위의 제 잔을 들었다.
“연애한다고 하면, 당장 결혼하라고 하시진 않을 거 아니야. 선보라고도 안 하실 테고. 인사만 한번 드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솔의 손에서 박수가 먼저 터져 나왔다. 와 역시 법학과. 아니지 이제 변호사지. 원우형이 제일 똑똑하네.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는 것에 민규와 준휘도 박수를 거들었다. 그래서 그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마땅했으나 술이 조금 들어간 석민의 두뇌는 그런가? 하고 말았다.
원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계획의 출처는 모두 정한이었다. 일단 진행 시켜! 뭐라도 하다보면 제 뜻대로 되어있으리라는 원대하고 알맹이 없는 계획. 정한의 전문 분야였다. 여전히 이마를 박은 채인 정한이 테이블 아래로 원우에게 백만 원의 금액을 이체했다. 아 전원우 많이 늘었네, 생각하는 건 덤이었다. 역시 변호사는 달라.
교과서에서나 몇 번, 학교에서 멀찍이 몇 번, 위인전에 누구는 알파였다더라 하는 한 줄짜리 형질에 대한 설명 같은 것을 제외하고 알파라는 개념과 마주할 일이 없었던 석민에게 형질의 영향이라는 것은 도무지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뛰어나다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여겼을 뿐이었다. 그저 좀 가오 잡는 스타일의 사람들이 아닌지 생각하거나, 금수저 같은 건가? 그런 건 다른 형질에도 꽤 있지 않아? 하는 정도의 시선. 그런 석민이 형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윤정한의 생떼 같은 결혼 타령이 연애하는 척, 조건부 ‘연애’라는 상황으로 바뀌며 그 장단에 어떻게 맞춰줘야 할까 하는 진지한 고민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정한의 편을 들고 나섰던 김민규나 최한솔은 우스갯소리로 한 것이었으나, 결국 석민은 정한의 애인 노릇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형은 알파지?”
“그렇지.”
“맞선 상대는 그 오메가인 거야?”
“지금까지는 그랬지?”
“흐음…….”
정한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일단 화를 다 푼 석민이 저를 거들어 주겠다는 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생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뜻을 꺾었던 날보다 더 큰 만족감. 오메가인 척을 해야 하나? 걱정스런 얼굴로 작은 머리통을 박박 굴리는 석민과는 아주 대조되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티 안 내고 잘해야 형한테 좋은 거잖아.”
자기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저를 걱정하는 석민이 기특하고 애틋해서 정한은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애의 저를 향한 정성 앞에 가슴이 뻐렁치는 와중에 들키지 않겠다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석민에게는 꼭 을이 되어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석민은 자신을 조금 희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는 베타고, 별로 형질 같은건 상관 없으니까.
“그럼 내가 오메가인 척 할게. 그 뭐, 열성 오메가 그런 것도 있다며? 거의 베타나 다름 없다던데. 그럼 들키지도 않을 거구.”
응응. 다르긴 아주 다르지만, 그런 게 있긴 하지. 정한은 또 고개를 한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없다. 쓸데없는 소릴 해대다 석민이 안 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단 약간의 착각이 곁들여 지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편이 정한에게는 좋았다.
결국 석민은 정한의 가족들 앞에서 열성 오메가인 척하기로 했다. 아주 형질이 약한 오메가 롤을 스스로 정한 석민은 단단한 얼굴로 정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안 들키도록 해 볼게. 또 한번 감격한 정한은 석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석미니 뿐이야… 진짜 고마워. 사랑해.”
진심 999%의 말이었다.
내가 형이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우정 가득한 청춘물을 찍는 석민과 그 옆의 정한이 추구하는 장르는 조금 많이 달랐다. 어쨌거나 사랑이잖아?
정한은 곧장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결혼할 사람, 아니 결혼하고 싶은 사람 데려올게요. 선자리 마다 애프터신청은커녕 퇴짜를 놓는 통에 당장 드러누워 시위라도 할 기세였던 정한의 할아버지는 일단 기립박수를 쳤다. 정한에게 선자리를 권한 이래로 냉랭하기 짝이 없던 식사 시간의 분위기도 한껏 풀렸다. 정한만큼 간덩이가 크지 않은 다른 식구들은 풀린 회장님(할아버지)의 표정 앞에 조금 안심 된 얼굴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떠들어댔다.
애인이 있었으면 진작 데려오지. 선자리를 열 번이나 나가고서야 겨우 그걸 말해?
딱봐도 정한을 떠보는 멘트였다. 니가 방금 지껄인 그 말이 구라는 아니겠지? 라는 의심. 물론 당연하게도 구라였지만 현실로 만들 테니 별 상관없지 않나? 정한에게는 그런 류의 양심은 없었다. 그건 가풍이니 언젠가 할아버지가 알게 되더라도 이해하시겠지.
애인한테 동의는 구해야 맞잖아요. 오래 친구로 지내다가 애인 된 지 오래되진 않았어요. 근데 갑자기 인사드리잔 얘길 어떻게 해요. 그것도 결혼 타령하시는 할아버지한테. 그러니까 그냥 결혼 전제, 이런 거 없이 인사만 드리러 올 거예요. 애한테 부담줄 순 없잖아. 결혼이 어디 쉬워요? 할아버지한테나 쉽지 우리한텐 아니야.
마치 한껏 스윗한 애인인 양, 건실한 체 떠드는 정한의 버르장머리라곤 없는 말에 의심하던 할아버지의 기세도 약간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하니 데려오는 이를 살펴보면 알겠지. 열 길 물속보다 수만 배는 어려운 제 다섯째 손주의 속보다는 전혀 모르는 젊은이의 속내를 살피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었다.
어차피 니네 둘은 지금 당장 사귀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 안 할 걸? 누가 너네처럼 자주 만나고 밥 먹고 그러냐?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하긴, 우리가 특이하긴 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저와 정한이 특별한 관계라는 것쯤은 석민도 알고는 있었다. 근데 뭐, 사이 좋은 게 나쁜 것도 아닌데. 심심함을 달래고, 또 별 이유없이 같이 있어도 편안하고, 소식을 못 들으면 섭섭하거나 아쉬운. 가끔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 당시 친구들과의 관계처럼 매일 얼굴을 보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는 복이 아닌가 싶었다. 김민규나 문준휘도 사업을 같이하는 탓이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정한과 석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나. 역시 친구도 이럴 수 있는 거임.
정한이 뭐라고 떠들든 윤정한이 자신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있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가져본 적 없는 석민이었으나, 자신과 정한 사이에 구축된 애정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늙어서 외로우면 윤정한이랑 같이 살 수 있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고, 또 연애나 결혼이라는 사회적 형태도 아니었던 것뿐이다.
김민규의 말대로 사귀는 ‘척’하는 생활과 이전의 생활의 다른 점은 없었다. 평소처럼 퇴근 후 같이 저녁을 먹고, 시간을 때우고 적당히 정한이 석민을 데려다주거나, 석민의 자취방에서 죽치다 제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 가끔은 둘이 게임에 불이 붙어 밤새 게임을 달리거나.
오랜만에 연락한 누나에게 뜬금없이 물은 누나, 연애하면 애인이랑 뭐 해? 하는 물음에 너 애인 생겼니? 하는 물음을 듣고, 눈을 굴리다 아 어, 뭐 그렇지. 해버린 것, 그리고 누나로부터 들은 온갖 데이트 코스나 평일 데이트는 죄 제가 정한과 해온 것 그 자체였다. 우정과 사랑은 별 차이가 없구나. 그래서 엄마 아빠가 결혼하면 의리로 산다는 말을 한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 설정은 이랬다. 친구로 잘 지내다 반년 전쯤부터 만나고 있다. 친구로 지낼 때랑 지금이랑 데이트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 진실이 80 퍼센트 이상 섞인 거짓말. 주말이며 평일이며 둘이 칠렐레 팔렐레 국내로 국외로 쏘다닌 기록이며 서로의 SNS 게재용 사진들까지 하면 그야말로 티라고는 1도 나지 않을 완벽히 준비된 거짓말이었다.
약속에 늦는 법이 잘 없는 석민을 10분째 기다리던 정한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드리웠다. 당장에 석민의 자취방에 올라가 확인을 하고 데려오면 될 일이었으나 또 할아버지에게 인사까지 시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기가 좀. 체면이나 염치 따위는 없이 살던 윤정한치고는 섬세하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다. 차 프레임이 달달 떨릴 정도로 다리를 떨던 정한은 석민의 빌라 공동현관이 열리며 수트를 차려입은 석민이 튀어나오는 걸 보기 무섭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달달 떨던 다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멎은 채였다.
“형, 미안! 넥타이가 너무 안 매져가지고-”
허헣. 광대가 한껏 올라온 정한은 아유 괜찮아 괜찮아, 니가 고생이 많다. 하며 석민의 옷매무새를 살펴주었다. 아이고 내 새끼, 면접 볼 때 말곤 수트니 넥타이니 하는 꼴을 못 봤는데 오늘 보는구나. 할아버지 ㄱㅅㄱㅅ. 주접이 풍년이었다.
“오늘 너무 멋있다. 울 할부지가 너한테 반하면 어떡해?”
정한의 헛소리는 늘 석민에게 잘 먹혀들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인 주제에 던지는 농담에는 웃었다. 인사를 가기로 결정된 이후 석민은 계속 할아버지와 가족들에 대해 물었다. 큰누나가 어디 계열사에 계신다고 하셨지? 나 모르는데? 형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동생 다니는 학교밖에 몰라. 허헣.
“내 빤스는 색깔이랑 개수까지 다 알면서, 지네 가족은 어디서 일하는지도 모르네. 그것도 할아버지 회사에서 다들 일하시는데.”
“안궁금한데 어떡해?”
“내 빤스 색깔은 궁금했던 거냐고!”
당연하지. 라고 말하면 한 대 맞을 분위기라 아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대답하고 넘겼다. 솔직히 할아부지나 형 누나들이나 엄빠보다 널 더 자주 보거든? 난 토요일 아침 밥먹으러 갔을때 말곤 그 사람들 안 봐. 너는 뭐 너네 누나랑 통화 자주하냐. 아니잖어-. 그래도 어디서 일하는 진 알거든? 무슨 부서인지도 알아? 뭐랬더라, 영업인가? 아니거든 니네 누나 SCM팀에서 일한다고 하셨어. 넌 그걸 어떻게 아냐? 저번에 너랑 누나랑 통화할 때 옆에 있었잖아. 기억력도 좋네….
언제 긴장했냐는 듯 평소처럼 주거니 받거니 투닥거리던 석민은 정한의 차가 큰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동네로 들어서자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와, 드라마에서나 보던 거 같애.
“그나저나 괜찮은가? 형네랑 우리 집이랑 집안 같은 거 차이 너무 나지 않아?”
“우리 석민이, 형이랑 결혼해주려구?”
“아니…, 애인으로도 할아버지가 탐탁지 않아 하시면 어떡해.”
“그런 건 신경 안써도 돼. 그리고 너네 집이 뭐 어떤데. 너두 알잖아. 우리 둘째 형 결혼만 세번했고, 둘째 누나는 사고쳐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적도 있고, 우리 막내는 영어는 1등급인데 국어가 7등급이래. 거기다가 울 할아부지는…….”
“아 그만. 귀 썩을 거 같애.”
정한이 줄줄 늘어놓는 자기 가족들 뒷담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석민이 제 귀를 문질렀다. 아니 자기 누나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흠은 왜 저렇게 줄줄 꿰고 있어?
“그치? 그니까 신경쓰지 마. 내가 다 이겨.”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다 이길 것 같아 든든한 동시에 두렵기까지 한 장담이었다.
인사부터 식사까지 흐름은 자연스러웠다. 애나 어른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하고 애살 있는 석민은 정한의 식구들에게는 유독 더 살갑게 굴었다. 말로만 듣던, 전에 들은 적 있는, 정한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 속 인물들을 만나는 것은 긴장되는 동시에 꽤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막연히 무거운 분위기일 것이다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의 표정이 밝은 탓이었다. 중간중간 그들 모두가 정한을 흘긋흘긋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뭐 그럴 수 있지. 낯을 가리시나? 하긴 정한이 형이 낯을 좀 가리긴 하니까.
식구들은 정말로 낯을 가리고 있었다. 귀엽게 웃으며 말을 살갑게 붙여오는 석민이 아닌 쉴 새 없이 웃으며 혀짧은 소리를 곧잘 내는 정한에게였다. 엄마 저거 우리집 아들 맞아? 둘째의 물음에 정한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불여시가 윤정한 탈이라도 쓰고 기어 들어온 거 아니야? 하는 말에는 부정 조차 못했다.
정한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하던 석민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가 어찌 됐든 새로 들어 올 손주며느리는 누구보다 살갑고, 인상도 좋은 데다 정한을 꽉 잡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한의 감정은 너무도 티가 났다. 제 속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정한이 날것으로 까보이는 애정 앞에 식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거 윤정한 아냐. 그나마 가족 중 어머니를 포함해 정한의 호의를 한껏 받고 있다고 여겨지던 막내가 단언했다.
상황이 적응 되니 놀림거리가 생겼다 싶어 입을 열려던 넷째는 마주친 정한의 웃는 눈에서 빔이 나오는 것을 목도하고 시선을 밥상으로 다시 처박았다. 깝치지 말자. 얌전히 보내드리자.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그 할아버지를 뛰어넘고 사회적 경제적 자유를 쟁취해낸 윤정한의 광기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그래서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냐.”
정한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동시에 나온 말에 석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얘기 없었잖아?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친 정한의 얼굴도 놀란 토끼라 아, 얘도 못들은 얘기구나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시발 들킬뻔했네.
석민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는 걸 본 정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혼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왜 결혼 얘기를 하고 그래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정한이 반항적으로 제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끼어들어서 말 보태기만 해. 니네 주식 내가 다 털어간다. 시퍼렇게 도는 정한의 안광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무슨 결혼이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석민이랑 저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았다구요. 시간도 많고 저희 아직 어려요.”
석민은 그다지 들어본 적 없는 정한의 단호한 말투였다. 아니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저런 식은 아니었지. 석민의 당황을 달래줄 겸 아까부터 잡고 싶었던 손을 이때다 싶어 잡은 정한에 석민이 조금 놀랐다. 얘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의지하게 해주는구나. 생각보다 믿음직스럽잖아? 하긴 평소에도 애처럼 굴다가도 어떤 땐 또 완벽하게 의지하기 좋은 형처럼 굴긴 했다. 석민의 손길이 정한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 괜찮아, 어차피 하기로 한 연기. 잘해보지 뭐.
사심 원헌드레드 퍼센트의 욕망 그 자체인 스킨십 앞에 대단한 착각을 한 석민이 어른들을 향해 말했다.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결혼.”
정한이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석민의 손을 잡은 채였다. >.< 이석민 개쩔어. 느므느므 멋있어.
식구들 또한 비명을 지를 기세였다. 윤정한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정한의 양친은 당장이라도 석민을 포켓볼에 넣어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싹싹하고 예의바른 데다 웃으며 정한을 달래는 아량에 그를 휘어잡는 것까지 완벽한 손주 며느리 상이었다.
“…고맙다.”
정한과 할아버지가 동시에 석민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달랐으나 고맙다는 내용만큼은 둘 다 진심 그 자체였다. 그 속내들을 조금도 읽지 못한 석민은 또 예의 바르게 웃으며 저야말로 감사하죠, 하고 말았다. 제 발목을 감아 당기던 윤정한의 늪에 제가 허리까지 빠진 줄도 모르는 채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싶을 즈음엔 이미 마치 석민이 당장 다음 달에라도 정한과 결혼을 할 것같은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윤정한은 제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입술을 감쳐물고 올라가는 광대를 누르기에 바빴다. 이렇게까지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평생 식구들을 잘 잡도리해온 덕분에 얻은 쾌거였다. 친구들이 곧잘 저를 운정한, 운정한 불렀지만 이토록 운이 좋다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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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갈 때 연락해 데리러 갈게
아 뭘 택시타고 가면됨ㅎㅎ
데리러 간다고 전화 꼭해 안하면 삐침
몇 년만의 고등학교 동창회였다. 통화목록까지 다다르는 데만 해도 몇 번을 헛손질 할 만큼 석민은 머리 꼭대기까지 취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정한과 대화를 나눈 카톡방을 들여다봤다. 안 하면 삐친다니까 전화해야지. 몇 번의 시도 끝에 정하니형♥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누른 석민은 울렁거리는 도로를 보며 3차 장소 앞 보도블록 한켠에 구겨져 앉았다.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혀엉-”
“아이고 우리 석민이. 잔뜩 취했네. 지금 어디야? 다들 집에갔어?”
“아니이- 잠깐 나왔어, 바람- 푸우- 쐬는데, 집에 가야 될거 가터.”
뚝 뚝, 의식이 끊어지듯 나오는 말에 정한이 작게 웃었다. 응 가게 이름 뭐야? 거기 1차 장소에서 별로 안멀지? 응 바로 옆인데…. 일단 출발하께. 통화 계속 하면서 가까? 너 전화 끊으면 자는 거 아냐? 아니야아. 그래그래 쪼끔만 기다려어. 으응-. 기우뚱 기우뚱 알콜이 몸을 타고 흐르는 대로 흔들리던 석민이 술기운을 좀 날려보겠다고 푸우- 푸우- 숨을 내쉬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소주를 몇 병이나 퍼 마신 건지. 2차 때 섞어 먹은 막걸리가 문제일지도 몰랐다. 막걸리 먹고 취하면 엄마 아빠도 못알아본댔는데.
“아이고오. 어뜩해.”
언제 시간이 갔나 싶은데 어느새 정한이 제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봐요. 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저를 흔드는 정한에 나 안자! 당당하게 외친 석민이 손을 뻗었다. 일단 일으켜 봐라 애비야. 예예 아버님. 쿵짝은 잘도 맞았다.
정한의 손에 일으켜져 조수석에 뉘인 석민은 제가 숨을 쉴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많이도 먹었네. 숙취해소제랑 아이스크림 사왔으니까 이거부터 먹구 자.”
“……안 잘건데.”
“그럼 이거 먹구 있자.”
석민이 제일 좋아하는 트로피칼 맛이 나는 숙취해소제의 뚜껑까지 따서 건네는 정성에 석민은 꾸벅 인사까지 했다. 뭐야,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터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말 안해두 잘 아네. 역시 똑똑한 인간은 뭐가 달라두 다르다.
“언능 쭈욱 마셔.”
석민이 숙취해소제 병을 비우기 무섭게 병은 사라지고, 손에 아이스크림 콘이 쥐여졌다.
“민트초코니까 안심하고 드십쇼.”
“감삼다. 감삼다.”
한참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우겨 넣던 석민이 몸을 돌려 정한을 바라봤다. 밤마다 빛번짐이 심하다며 운전할 때 끼는 동그란 안경은 역시 안 어울렸다. 왜애. 흘긋 석민을 돌아본 정한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 취향은 아닌데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 윤정한. 게을러서 침대에서 몸도 잘 안 일으키는 주제에 저 만나러는 꼬박꼬박 들르고, 제 퇴근길이나 술마신 날에도 매번 픽업까지 오고.
“다른 애들보다 내가 더 친해서 데리러 오는 건가?”
뜬금없는 석민의 물음에 정한이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니, 너 좋아서.”
“맨날 하는 소리. 형이 나 좋아하는 거야…, 나도오 알지.”
“너 잘 모르는 듯.”
“에이. 형처럼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어딨다구 내가 몰라.”
정한의 시선이 석민을 스쳤다. 너 내 말 잘 안 믿잖아. 믿어 왜! 그리구 그거는 형이 맨날 장난치니까 그러지. 너 좋다는 건 장난 아니라고 백번 말해도 한 번도 안 믿더라. 나긋한 웃음 섞인 말투가 정말 장난 같았다. 또 장난치지? 석민의 물음에 정한은 답하지 않았다. 뭐야. 대답도 안 해.
“장난 아니니까 그러지.”
석민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졸려? 졸리면 자. 정한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톤이었지만 석민의 귀에 달리 들렸다. 장난이 아니면 뭔데? 술기운에조차 눈치껏 튀어 나가지 않은 말이 석민의 목구멍에 걸렸다.
“형 김민규 좋아해?”
개 뜬금없는 물음 앞에 정한이 뭐? 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손님 진상 짓 장난 아니시네. 윤정한 대답.
“민규 좋아하지.”
“전원우는?”
“워눙이 좋지.”
“최한솔은?”
“좋으니까 얼굴보고 살지.”
“문준휘는?”
“요새 너무 웃기더라. 그거 아니더라도 좋아하지만.”
“나는?”
당연히 나올 것 같은 물음 앞에 정한이 좀 이상하다는 듯 석민을 돌아봤다. 우는 거 아니지? 오늘 감수성 좀 이상한데 우리 석민이? 야, 대답이나 해.
“너무너무 좋아하지.”
대답과 함께 마주친 윤정한의 눈 때문에 석민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와 씨발 내가 뭘 본거지? 나 어떡해? 석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석미나 잘자-
이석민은 비상에 걸렸다. 그 놀라운 깨달음 앞에 잠이 다 깨버리진 않았고, 정말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잠이 들어버리긴 했지만 기억과 정신은 불행히도 다음날 온전했다. 석민은 말 그대로 저와 윤정한 사이의 10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위장이 4개라도 된 듯한 되새김질 과정에서 어라? 싶었던 순간들이 수없이 떠올랐다. 아니 이게 진짜라고? 윤정한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돼.
이석민 치고는 오래 고뇌했으나, 애초에 석민은 뭔가를 오래 고민하는 타입이 못 되었다. 고민을 좀 하다가 그냥 적당히 지르고 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담받고 의지하는 게 석민의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상담 대상인 윤정한에게 상담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전김문최 들에게 상담을 받자니 너무 정한의 감정을 까발려 놓는 것 같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자니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일전에 데이트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은 이후 누나와는 통화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돌고돌아 전김문최였다. 그런데 그 반응이 모두 한결같았다.
“ㅎㅎ이석민 너는 등신 아니니? 그걸 이제 알았니?”
당연했다. 윤정한은 대학시절부터 쭉- 이석민을 좋아했고, 그건 잡으면 잡힐것처럼 선명히 눈에 보이는 감정이었다. 애초에 대우부터 달라요. 윤정한은 밥 생각들면 너 찾지만, 우리는 안 찾고요, 너랑은 같이 있지만 우리랑 있을 땐 금방 기 빨려서 혼자 있고 싶어 하고요, 너는 데리러 가지만 우리는 어쩌다 태워주는 것 말곤 데리러 오는 일이 없어요, 인간아. 그리고 보통 친구끼리는 이 정도 나이 처먹고 너네처럼 허구한 날 만나지도 않아요.
“그럼 나랑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무래도 그런 것도 좀 있지 않을까? 우리랑 할 바에는 선봐서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이석민 너는 어때. 만약에 니가 윤정한 포함해서 우리 중에 한명이랑 결혼하거나 그게 아니면 선봐서 결혼 해야한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을 택할 거임?”
“그거야…,”
윤정한이었다. 전김문최..는 좀, 징그럽지 않나?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랑 선보기는 싫고. 그나마 산다고 하면 윤….
“아니 그건 좀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예, 다르지 않아요 선생님. 윤정한이 딱, 그렇게 했거든요.”
김민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둘이 비밀연애 하는데 티 다 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대학 때 진짜 그렇게 생각했었지.”
한솔과 원우의 덧붙임까지.
“그래서 지금은 연애 하는 거야? 그 뭐 인사도 갔다 왔다며.”
“그거야 가짜니까.”
석민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 새끼들 연애질 하네. 띠거워라. ‘ㅎㅎㅎㅎ’ 얘네 좀 더러운 거 같아요.
“안 가짜 같아?”
“응. 진짜 같아.”
고민을 해소하려 진행한 상담은 석민의 고민만 는 채 끝이 났다. 그날, 윤정한은 영문도 모른채 김민규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묘하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어딘가 소극적이 된듯한 석민의 태도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도대체 뭔데? 내가 모르는 게 뭐야. 답답한 건 참을 수 없는 정한의 인내가 코끝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단언컨대 생김새만으로 따진다면 석민은 결코 정한의 취향이 아니었다. 첫 만남에도 외양에 대한 인상은 0에 수렴할 정도였다. 투자대회 이후 친해지는 과정에서 보인 석민의 바보 같은 착한 성정에는 빠지지 않을 수 없던 것뿐이었다. 석민은 정한과 다른 점이 많았다. 편견이 없는 것이나, 시간과 정이 쌓이지 않은 타인에 대한,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고 대단하더니 종래에는 좋아지고 말았다.
워낙에 지밖에 모르는 인류인 윤정한이 나만큼 얘가 좋은데? 하는 생각을 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정한과 석민의 관계는 단단하고 공고해진 상태였다. 정한은 그걸 깨트리면서까지 제 감정을 강요하거나 석민과 연애로 나아가야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여러 가지 욕구들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정한은 짐승이 아니니까. 그리고 지가 진데 지질하고 구차하게 굴 생각도 없었고, 석민이 제 애정을 그야말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싫지 않았다. 10년, 구구절절 눈물로 얼룩진 남들의 짝사랑과는 다른 결의 세월이었다.
10년.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운 세월이었다. 내내 나를 좋아했다는 말이야?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니 윤정한이 대단한 건가. 어떻게 고백을 안해? 아니 했는데 내가 안 믿었나? 이것도 맞지 저것도 맞고….
자각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연애감정은 0이라고 생각했던 석민이 정한을 연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해서였다. 나 재고 따지는 거 못하는데, 연애 안 해봤는데. 어떡해? 진짜 어떡해? 하면서도 윤정한과 저녁을 먹는 것은 그만두지 못했다. 존나 미안한데 어떡해. 그리고 안 싫은데 어떡해.
석민은 알고는 있었지만 완전하게 언어로서 인정했다. 나도 쟤가 필요해. 그리고 결심했다.
형, 나 할말 있어.
카톡으로 날아온 석민의 메시지에 정한이 벌떡 일어났다. 띄어쓰기에 쉼표와 온점까지. 이건 분명 진지한 이야길 하겠다는 징조였다.
어 그래, 석민아. 드디어! 정한은 자신의 코끝에서 달랑거리는 답답함을 드디어 해소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응응, 오늘 저녁은 조용한 데서 같이 먹을까? 아니, 부어치킨 가자. 에? 정한은 과거 숟가락으로 때려 맞은 기억이 있는 치킨 프랜차이즈의 이름 앞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좋지. 거기 치킨이 맛있긴 해? 지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주제에 맛을 운운하는 게 웃겼다. 생맥은 좀 썼던 거 같은데. 쓰읍… 뭘 눈치채거나 제 수작질이 들킨 게 아닌지 불안해진 정한의 다리가 책상 밑으로 달달 떨렸다.
분명 오전 11시까지 쏜살같이 달리던 시간이 이후로 1초당 20분씩을 소모하며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말이었다. 다섯시 반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5시 15분에 사무실을 나섰다.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저는 먼저갑니다. 오늘도 눈썹 휘날리며 칼퇴를 갈긴 윤대표에 직원들의 눈이 도르륵 굴렀다. 평소보다 일찍 가시네.
월요일이라 그런 건지, 월요일인데도 그런 건지 5시가 넘었음에도 막히지 않는 길 앞에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석민의 회사 앞에 도착한 정한이 석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나지금 너네회사앞ㅎㅎ 끝나면천천히나와여
저지른 죄가 많아 쫄린 윤씨와 미래가 캄캄한 이씨가 또 다시 치킨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다리 하나를 집어 제 앞접시에 놔주는 석민의 손길이, 자백을 앞둔 범인에게 국밥 한 그릇 때려 먹이는 형사처럼 느껴졌다. ㅎㅎ나 사기는 못치려나바여.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못 들었으니 뭐.
“잘머그께.”
석민이 놓아준 닭다리를 정한이 한입 물었다.
“형, 결혼하자.”
툭, 정한이 들고 있던 닭다리가 접시 위로 추락했다. 어라거? 눈이 깜빡깜빡. 이거 무슨 감독 영화에서 봤던 장면 같은데. 판단이 되지 않아 멍청하게 바라보는 정한에게 석민이 다시 한번 말했다.
“결혼하자고.”
자깐만. 자깐만 석미나. 우물거리며 말을 뱉은 정한이 빠르게 몇 번 제 입속의 치킨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혹시, 너도 집에서 선보라시니?”
“아니.”
석민의 얼굴은 진지해서 조금 귀여웠고, 정한은 그 진지한 대답에 얼굴이 굳었다. 그럼 뭔데??? 비명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가슴이 두근두근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저 부정맥 올 것 같아요. 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정한은 정신이 없었다.
“싫어?”
“아니!”
정한은 바로 이 순간을 자신이 올해 가장 잘한 짓 넘버 원으로 꼽을 수 있었다. 단 일 초의 지체도 없는 대답. 석민이 결혼하자는 말에 자신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정신머리가 없는 순간에도 발휘되는 판단력.
“석미나,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제 눈을 똑똑이 바라보는 석민의 대답에 정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진짠가. 실화인가. 리얼인가.
“왜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싫다고 했었잖아.”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과는 달리, 차분한 음성이었다. 정한은 본인의 사회생활 짬바를 이런 데서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괜히 분위기 깼다가 안 한다고 엎을까봐. 정한을 바라보던 기세나, 결혼하자 말하던 단호함과는 달리 질문에 대한 답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마주치고 있던 시선이 테이블로 내려가는 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가도 다시 마주쳐 오는 것에 요란히 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서 롤코 타는 기분을 다 느끼네. 긴장으로 팽팽한 대치에 숨도 못 쉬다시피 하던 정한은 입을 여는 석민의 귀끝을 보고 말았다.
“…너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면 짜증날 거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정한은 또 튀어나올 것같은 비명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개멋있어. 와. 이석민. 반했어. 미쳤어. 정한의 주접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와…. 나 심장 멎을 거 같애.”
석민도 꼭 같은 심정이었다. 전에도 윤정한이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은데. 왜 몰랐을까. 석민은 정말로 자신의 눈치없음이 놀라웠다. 저렇게 티가 나는데.
“있지, 그럼 석민아.”
응.
이번엔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너 나랑 뽀뽀도 할 수 있겠어?
정한의 물음에 석민은 눈 앞에 놓인 마카로니를 하나 집어 정한을 향해 던졌다.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지, 소꿉장난 하자고 했냐? 석민의 타박에도 정한은 광대가 한껏 올라간 채 히히 웃었다. 아니, 혹시 몰라서. 석민아 그럼-
스킨십 얘기 흐즈 므르.
아니 부부 관계에서 이건 굉장히 중요-
석민이 숟가락을 드는 걸 본 정한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래 그건 내가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지. 흐흐흐. 고개를 끄덕인 정한이 바보같이 웃었다.
“끄랭. 결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