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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물안개
From 다슬
윤정한은 처음 이석민을 보고 생각했다. 얘는 진짜… 뭐지. 그리고 만난지 한참 된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얜 진짜… 뭐지? 정한은 센티넬청에서 근무하면서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봤다고 자부한다. 자기와 같은 센티넬들이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 그런 센티넬에게 달라붙는 가이드들이 얼마나 재수없게 구는지. 연구원이란 작자들이 상냥한 미소 뒤에 얼마나 파렴치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정한은 늘상 지켜보며 몸소 겪어왔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석민의 경우는… 뭐랄까, 특이 케이스다. 욕은 아닌데… 칭찬도 아니다. 그냥 이상했다. 가이드가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정한이 멀리서 저를 보고 뛰어오는 석민을 보며 생각한다. 해맑게 달려오는 꼬라지가 우습다. 저러다 또 넘어지지. 다 큰 애가 칠칠치 못하게… 암만 가이드라 해도 셀프 가이딩은 안 될 텐데 걱정도 안 되나. 핀잔 위주의 생각들이 연이어 흘러나오는 와중에 제 앞에 당도한 석민이 활짝 웃었다.
“넌 덥지도 않니… 뛰길 왜 뛰어.”
“하하. 형 보니까 반가워서.”
“매일 보는데 무슨…”
정한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석민을 지나쳐 걸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검게 덮은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숨이 찬 듯 잠시 고개를 숙였던 석민은 이내 몸을 일으켜 금방 정한 옆으로 달라붙었다. 같이 가요. 정한은 멈춰서지 않는 대신 슬며시 발걸음을 늦춘다. 날이 왜 이렇게 추워. 괜스레 툴툴대면서.

센티넬들이 예민하다고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윤정한 만큼은 아니다. 야 이 예민덩어리야. 본부 직원인 부승관은 틈만 나면 정한을 그렇게 부르며 형은 제발 그 성질 좀 죽이라고 종알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한은 남들에게 가시를 더 바짝 세웠다.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게 센티넬청인데, 무디게 해서 여기서 살아남겠니. 그러고 보면 승관이 너도 참 순진하다. 사근사근 말하는 것 같아도 내심 가시돋친 말투에 승관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 형 너 알아서 살어. 그럴 때마다 정한은 싱긋 웃었다. 응 나 알아서 살게. 그 미소가 지나치게 반짝반짝 빛나고 슬퍼 보여서 승관은 속이 쓰렸다. 너무 데인 적이 많은 사람에게 생긴 자기방어 기질인 걸 알아서.
“그래도 언젠가는 형이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가 생기면 좋겠다.”
그 말에 정한은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지. 그런 걸 누구한테 하지. 센티넬은 결국 운명적으로 고독하기 마련이다. 의지하려고 할 수록 무너지기가 쉬울 텐데. 이미 잃은 사람이 많았던 정한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움이 제일 싫었던 바람에 나서서 먼저 외로워지기를 택했다. 그러면 적어도 누군가를 마음에 뒀다가 그 빈 자리로 고통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석민은 변수다.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는 윤정한 앞에 자꾸만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성가시게… 정한이 흐려지는 눈앞을 보면서 생각했다. 움켜쥐고 있는 코밑에서 뜨끈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이석민의 얼굴이 눈앞에서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한다. 눈물 흘리면 체력 떨어져서 가이딩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얘는 그런 기본도 모르나. 다그치고 싶어도 턱에 힘이 안 들어가서 말도 안 나왔다. 석민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정한의 손을 잡았다.
“아프죠. 어떡해…”
정말 쓸데없는 소리다. 윤정한이 아픈 건 일하다 보면 당연히 발생하게 되는 일이고, 이석민은 가이드로서 제때 가이딩만 잘하면 된다. 피 좀 흘린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구는 게 정말이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이딩이나… 똑바로 해… 너는 기본도 몰라?”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정한이 까칠하게 말해도 석민은 입만 샐쭉이면서 손을 고쳐잡았다. 그래도 잡고 있는 와중에 피는 멎었으니 된 건가. 정한이 코에서 손을 떼고 피 흐르는 얼굴을 훔쳤다. 그러자 석민이 정한을 가까이로 끌어당기더니 이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야, 너 뭐…”
“원래 가이딩 면적 늘리면 가이딩 더 잘 들거든요? 똑바로 하라면서요.”
퉁명스러운 투로 말해봤자 울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얘는 정말 뭐가 겁나서 우는 거지. 현장? 부상? 정한이 가늠하지 못하는 사이 석민은 마른 어깨를 품 안 가득 안는다. 너무 바짝 껴안아서 상대의 심장 고동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쿵 쿵.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듣던 정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파. 지쳐. 힘들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냥 안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건 가이딩이니까, 나는 지금 안정이 필요해서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일할 때는 그렇다 치자. 이렇게까지 하루 종일 붙어다녀야 하는 이유는 뭐지? 정한이 제 앞에서 돈가스를 먹고 있는 석민을 보면서 생각했다. 심지어 숙소까지 같은 방으로 배정 받았다. 상식적으로 누가 센티넬과 가이드를 룸메이트로 배정하냐는 항의에 지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우리 윤 센티넬은 상부에서 내려온 특별 조치입니다.”
“그니까 나는 독방이 좋다니깐.”
“어이구. 퍽이나요.”
윤정한이 독방을요? 컴퓨터만 쳐다보던 지훈이 시선을 돌려 정한을 바라봤다. 외로운 게 싫어서 더 외로워지기 전에 자꾸 선수치는 거 모를 줄 아나.
“수치상… 이석민이랑 지금 상성이 아주 괜찮아요. 근래 매칭 됐던 그 어떤 가이드들보다도. 그냥 이대로 쭈욱 가는 게 나는 맞다고 보는데.”
“이 팀장… 아니 지훈아. 진짜 왜 이래.”
“형. 그냥 걔랑 잘 지내봐요. 애 괜찮잖아.”
그 말에 정한이 짝다리를 선 채로 혀를 찼다. 괜찮다? <괜찮다>의 기준이 과연 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지훈은 잔뜩 뾰족하게 구는 정한을 두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석민이 과연 얼마나 걸릴까… 조용히 가늠하면서.

벤치에 늘어진 정한은 가만히 석민에 대해 떠올렸다. 이석민. 걘 꼭 가이딩 하기 전에 꼭 허둥지둥 손으로 제 옷자락을 더듬는다. 매번 그러길래 하루는 뭐하는 거야? 하고 물어봤더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슬쩍 웃었지…
‘아니 그냥 손 잡았는데 땀이라도 났으면 좀 그러니까…’
상상도 못한 답이 입에서 튀어나와서 어이가 없었는데. 가이딩 때문에 손잡는 와중에 자기 손이 끈적거릴까 봐 신경쓰는 가이드는 처음 봤다. 며칠 전에는 어두침침한 방에서 밥을 먹었다길래 왜 그랬냐고 캐물었더니 자고 있는 사람 두고 불을 켜기가 미안해서 그렇게 했단다.
‘누구. 설마 나 때문에?’
‘제가 형 말고 또 누구랑 방을 써요.’
그리고 때문이란 말은 별로인 것 같다고 중얼대는 얼굴을 보고는 좀 기가 찼다. 허, 진짜… 별 웃기는 애 다 보겠네 싶어서.
그러니까 괜찮다의 기준이 뭔진 몰라도 만약 이석민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라면…
“너무 괜찮아서 문제인 거 아닌가…”
정한은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착하고… 심약하고… 잔정 많고… 암만 생각해도 이 일에 부적합한 것 같은데.
“그것도 나같은 센티넬한테…”
손을 들어 얼굴로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자 손틈 사이로 해가 눈동자를 비췄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그 자리에 있으니까. 이후의 기억으로 덮으려고 해도 과거는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정한은 펼쳤던 손을 말아쥐고 입 가까이로 끌어당겨 숨을 훅 불어넣었다. 그러자 손을 뗀 자리에서 나비 떼가 팔랑거리며 흩어져 내렸다. 과거는 잊고 아주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단 걸 알면서도.

윤정한의 머리가 지금과는 다르게 찰랑이던 금발이던 시절, 윤정한이 속해있던 팀의 팀원 전부가 돌아오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그날 그 작전에 투입됐던 센티넬과 가이드는 전원 사망했다. 단 한 명, 윤정한만 빼고. 피범벅이 된 정한을 두고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운. 이런 것도 운으로 쳐주나. 그 말을 듣자마자 속이 잔뜩 울렁였다. 다 죽고 나만 사는 거면, 운이 비껴간 것 아닌가. 정한은 변기통을 붙잡고 속을 게워내는 내내 생각했다. 이런 게 정말 운이 좋은 거라면, 다시는 행운 따위 인생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정한은 차츰 혼자인 편에 익숙해졌다. 비어버린 방과 옆자리를 볼 때마다 차마 견딜 수가 없는 날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뭐. 이미 잃어버린 것들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또 다시 그리워할 것을 만들지 않는 일 뿐이다. 원래 인간은 기대는 순간 나약해지기 마련이니까. 하물며 윤정한은 앞으로도 해내야 하는 게 많은 센티넬이었다. 그러니 그냥 계속해서 혼자 외로운 게 차라리 나았다.

이후 정한이 까탈스럽게 굴자 가이드들은 견디지 못하고 알아서 나가떨어졌다. 짧으면 삼 일, 길어봤자 한 달. 매번 가이드를 갈아치우며 지내던 와중에 새롭게 배정받은 게 이석민이었다. 매칭 된 가이드 중에서 유일하게 세 달을 넘긴 애. 정한은 석민이 그렇게 오래 버티는 게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다. 혼자가 아닌 일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자꾸만 익숙해질까 봐. 석민은 그런 면에선 너무 위험하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 정한과 석민이 센티넬-가이드로서 함께 합을 맞춘 지도 백 일이 다 된 날이었다.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는 승관을 앞에 두고 정한은 멍하니 생각했다. 백 일? 백 일이라니. 벌써 그렇게 지났단 말이야?
“보통 이런 걸 세지는 않지만, 우리 윤정한 씨의 경우는 이제 또 특별하니까 센터 내에서 저랑 직원들이 이렇게 세어보면서…”
정한은 종알거리는 승관을 지나쳐 걸었다. 저저저 하여간 챙겨줘도…! 황당해진 승관이 씩씩대면서 등 뒤에서 성화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이석민에게 가서 막말을 퍼붓자. 막말을 퍼붓는 센티넬이랑 같이 일하고 싶은 가이드가 어딨어? 내 부탁은 안 들어줘도 이석민이 그만 두겠다고 하면 지훈이도 들어주겠지. 그냥 그런 간절하고도 안일한 생각으로…

그리고 윤정한의 그 작전은 아주 처참히 박살나고 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석민에 의해.

이석민은 처음 윤정한을 보고 생각했다. 우와 되게… 신기하다. 그리고 만난지 한참 된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진짜… 신기한 사람. 정한의 사건은 센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석민도 정한의 사정에 대해 어렴풋이 알았다. 그런데 신기했던 건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점? 그간 석민도 여러 센티넬들과 일해봤지만 윤정한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센티넬들은 보통은 과도하게 의욕이 먼저 앞서거나, 너무 깊은 회의를 느껴 우울감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도취돼서 남들을 무진장 무시한다든가… 균형을 지켜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인데도, 실제로 그걸 할 줄 아는 인재는 많지 않달까. 그런데 윤정한은… 진짜 하기 싫어 죽겠단 얼굴로 세상 열심이니까, 그렇게 결국 자기 할 일을 매번 잘 해내니까. 인상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정한이 꼭 죽으려는 사람처럼 일에 덤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정한이 죽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 같다고 했지만… 글쎄. 그냥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 같은데. 걱정도 많고 한숨도 많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눈에 보였다.

그 정도로 윤정한을 간파한 이석민이니, 어거지로 해대려는 막말 같은 거에 넘어갈 리가. 이석민은 윤정한을 만난 후로 계속해서 윤정한의 평안만을 바라온 사람인데. 현장이나 부상 같은 게 아니라 눈앞의 센티넬의 힘겨움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쏟아내던 사람인데 말이다. 석민은 자기를 찾아와 길길이 악을 쓰는 정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형은 그런 뾰족뾰족한 말들이 적성에 안 맞아요.”
“뭐?”
“자기가 그런 말할 때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죠. 모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무신경한 사람처럼 굴려고 암만 애를 써도 예민한 사람은 티가 난다. 센티넬 윤정한이 까탈스럽게 가시를 세우며 산다는 걸 센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예민함 말고.
“형은 사람들을 항상 눈여겨 보고 있잖아요.”
절대 대충 안 보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꾸자꾸 눈길을 주잖아요. 그리고 시선은 거짓말 안 하거든요. 그 말에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목이 메였다.
“뭐래 진짜…”
“지인짜 성격 나쁜 사람들은 말 나쁘게 할 때도 아무렇지 않아 해요. 습관이니까.”
“……근데?”
“형은 그럴 때마다 슬픈 눈을 하잖아요. 자기 말에 자기가 상처 받은 사람처럼.”
뒤에서 쫓아오면 툴툴대면서도 발걸음을 늦춘다. 자기 밥을 다 먹어놓고도 당연하다는 듯 가만히 상대를 기다리고. 별 생각 없이 캔을 따서 제 앞에 놓아준다든가, 길을 걸으면 꼭 상대를 안쪽으로 걷게 한다든가… 하나하나 말 하기에도 너무 사소하지만, 그런 만큼 확실하게 습관으로 남아있는 상냥과 다정이, 전부 눈에 띄는데.
“갑자기 그런 말 한다고 페어 그만 둘 줄 아나. 솔직히 형이 꼬장 부린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꼬장…”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석민은 다시 한 번 정한과 눈을 마주쳤다. 회갈색 눈동자와 고동색 눈동자의 시선이 맞물린다. 정한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리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보는 내내 그런 것까지 다 생각했다고… 원래 너무 예상치 못한 말들을 들었을 때는 한 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는 법이다. 꼭 허를 찔린 사람처럼.
“전 형 가이드인 거 좋아요.”
“뭐가 좋아? 난… 난 싫어.”
“거짓말이라고 해도 자꾸 그러면 저도 상처 받는 거 아시죠.”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는 정한을 두고 석민의 입에선 웃음이 샜다. 저거 봐. 남 상처주는 거 싫어하면서 자기 싫은 짓을 자꾸 해.
“형이 다치면 전 손 잡아줄 수 있어요. 안아줄 수도 있고. 몸에 난 상처 다 없애줄 수 있죠.”
저 이래 봬도 나름 실력도 있고 상성도 좋은 가이드니까, 그 말을 하는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슬쩍 올라갔다. 석민은 정한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제가 형 마음은 어떻게 못하잖아요.”
이석민의 말들이, 윤정한의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자꾸 남 상처 주고 힘들어하고 그러지 좀 마세요.”
힘겹게 쌓아온 그 벽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줄도 모르고.
“그리고… 페어는 안 끊을 거예요.”
“야, 이…”
정한은 또 다시 짜증을 내려다가 석민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푹 떨궜다. 뭐 저런 말을 하면서까지 웃어? 사람이 웃는 거 아니면 우는 거 밖에 못하나? 무슨 화도 안 내? 따지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그 어떤 말도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야… 이석민의 말이 윤정한을 너무 많이 흔들어버렸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곡만 콱콱 찔러버렸으니까.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 봐요.”
차마 그 말을 듣고도 패악을 부릴 수가 없어서. 

그날 이후로 정한은 석민을 대하는 것이 껄끄러워져서 한층 더 삐걱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민은 늘 그랬듯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정한을 대했다. 오히려 더 치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짜증 한 번 부리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매번 귀찮아 하기 직전까지 들이대고는 금세 사라져버려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한은 울상인 얼굴을 하고 하루종일 한숨만 쉬어댈 뿐이었다.
“하… 진짜…”
석민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손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당연한 모든 행동들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제는 페어를 끊자고 말할 자신조차 없었다. 사실은 석민의 말이 맞아서, 적성에 안 맞는 말을 이미 너무 많이 해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모질게 말할 용기가 이미 다 닳아서 남은 게 없었다.
“익숙해지면 안돼…”
정한은 제 눈가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누군가와 계속해서 같이 있기를 바라면 안 된다. 그 생각을 하자 또 습관처럼 예전 생각이 났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얼굴들. 그런 일이 또 생기길 바라지는 않았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바로 그때,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현재 센티넬청에 남아있는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A-21319 지역으로 출동 바랍니다.]

머리 위로 울리는 방송이 끝나자 곧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이렇게 긴급한 경보가 울린 건 3년 전 이후 처음이었다. 지금 몇 팀이나 남아있지? 남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뛰어나왔지만 정한은 그 자리에서 멈춘 채로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형 뭐해요. 가야 돼요.”
석민은 제자리에 서 있는 정한을 붙잡고 함께 수송차에 올랐다. 자리에 앉은 정한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씹어내리는 내내 오한이 들었다. 꼭 그때랑 똑같은 상황. 손이 차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쿵 쿵. 심장이 무섭게 뛴다. 그렇게 도착한 현장은 정말이지 몇 년 전 그날을 재연해 놓은 것처럼 똑같은 풍경이어서.
“센티넬 전원 지금 당장 투입!”
상황을 잠재우기 위해 뛰어드는 센티넬들과 함께 얼결에 차에서 내린 정한은 그들을 쫓아 뛰어가기는 대신 멍하니 서서 하늘을 쳐다봤다. 온통 붉어진 하늘. 이 하늘과 똑같은 색의 피를 뒤집어쓴 날이 있었다. 웅 웅.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폭격이 몰아치는 가운데 귓가가 울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제 곁에서 하나 둘 쓰러지던 동료들의 몸. 아무리 손을 쥐었다 펴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던 그 날에. 윤정한! 뒤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빛이 되어 내리는 폭격.
“정한이 형!”
이거 분명히 아는 목소린데.

석민은 무너진 폐허 더미에서 정한을 끌어당겼다. 폭발하는데 그대로 서 있으면 어떡해. 능력도 안 쓰고 진짜… 건물이 무너져서 쓰러진 잔해들이 동굴처럼 둘을 덮어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둘 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석민은 제 이마에서 흐르는 끈적한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형, 정신 차려요. 정한이 형.”
몸이 꼭 얼음장 같았다. 단순히 방금 폭발 때문이 아님을 직감한 석민은 정한의 몸을 끌어안았다. 폭주할 지도 모른다. 그 상태로 있다가는 분명 둘 다 위험해질 테니까.
“제발…”
석민은 정한의 뺨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가이딩을 할 때면 결국엔 제게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던 윤정한. 온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습관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정한이 무얼 두려워하는지도.
“진짜 바보 같아…”
온통 붉어진 하늘을 보고는 석민도 정한의 안색이 나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고 있구나. 또 곁에 있는 모두가 사라질까 봐 불안한 거다.
“난 안 사라지고 계속 여기 있는데…”
정말이지 마음 쓰이게 한다. 아프고 힘들 때도 지친다는 소리 한 번을 안 하는 센티넬. 누군가 또 자기를 떠날까 봐 주변 사람들한테 마음도 안 붙이려는 사람. 그럼 적어도 좀 잘 해내든가.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서… 석민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웃었다.
“빨리 나가야죠. 평소에 잠도 깊이 못 드는 사람이 여기 계속 이렇게 누워있을 순 없잖아.”
그리고는 정한에게 입을 맞췄다. 이제는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윤정한과 이석민의 매칭률은 78%. 높다면 높고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우길 수 있는 정도의 수치였다. 모든 것이 찰떡 같이 들어맞아 정해진 운명 같이…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절반의 확률을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미지의 가능성조차 열리게 되므로, 78%는 때로 기적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수치임은 분명했다. 석민이 이 상황에서 기적을 믿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이석민은 단 한 번도 윤정한을 죽게 내버려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석민의 세계에서 윤정한은 결코 혼자 남지 않는다. 그 곁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머무를 테니까. 그러니까 이 겁많은 센티넬이 깨어나면 그때는 정말로 말해줘야겠다고 석민은 생각했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이내 눈을 뜬 정한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정한의 시야에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석민의 얼굴이 시야에 점차 들어왔다. 꿈인가. 하지만 저 얼굴이 있으니 꿈일 리가 없지.
“너 얼굴이 그게 뭐야…”
정한은 이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동치던 몸 안의 기운이 그새 안정된 게 느껴졌다. 가이딩을 했나 보다. 그런 것들을 짐작하며 정한은 숨을 들이쉬었다. 자기와 같이 있느라고 또 피를 본 사람이 있다는 점이 끔찍하게 싫었다.
“가이드들은 후방에서 대기하잖아… 왜 여기서…”
“형이 그러고 서 있으니까 당연히-“
“그니까 그게 왜 당연하냐고.”
그러자 석민은 정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정한을 일으켜 끌어당겼다. 갑작스레 얼굴이 붙들린 정한만 깜짝 놀라 눈만 끔뻑거렸다.
“야, 뭔…”
“제가 형 가이드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밉게 말하지 좀 말고요. 지금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생각을 해야죠. 가이딩도 방금 받았는데.
“형. 저는 형을 두고 절대 안 죽어요.”
그 말에 정한의 눈에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얘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하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안 죽겠다고 말한다고 안 죽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정말 자신 있어?”
하지만 가장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는 자신이었다. 정한은 이 상황이 정말이지 웃기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겠다는 다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가장 잘 아는데도, 곧장 그런 답을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도, 그냥 믿고 싶으니까.
누군가는 자기를 혼자 두지 않고 죽지 않는다면… 그래준다면… 기꺼이 그래주겠다고 말해준다면… 어떻게 믿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너 약속한 거야.”
약속 꼭 지켜. 석민은 답을 하는 얼굴에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정한은 손가락을 맞걸면서 말했다.
“이석민 넌 나 두고 절대 죽지 마. 끝까지 살아야 돼. 계속 나랑 있어줘야 돼.”
“형 두고는 안 죽는다니깐. 형이나 조심해요.”
“난 네가 살려줄 거잖아.”
그치?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석민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하여튼 못 말려…
“노력은 해볼게요.”
석민은 그 말을 끝으로 정한을 끌어당겨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이어지는 사이 석민의 손이 정한의 뺨에 늘러붙은 눈물자국을 닦아낸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센티넬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감당하지? 그리고 이제는 설령 누가 감당 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옆자리를 내어줄 생각 따위 없었다. 윤정한 옆에는 이미 내가 있는데 굳이?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둘은 가만히 이마를 맞댔다.
“우리 이제 여기서 나가요.”
그러자 부서진 잔해를 감쌌던 나비 떼가 흩어짐과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의 자재들이 눈이 되어 내렸다. 정한이 불러낸 색색의 나비들이 상황 진압을 위해 빠르게 날기 시작한다. 석민은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나비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정한의 손끝에서 뻗어나온 나비 떼는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날아올랐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낸 세계와 앞으로도 지켜낼 세계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