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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람겸
From 그츠


띠릭-띠딕-

현관문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석민은 왠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스케줄  일찍 끝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기다리다 먼저 자겠다고 했지, 라고 잠결의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뜨려는 눈을 감았다. 바깥의 찬 기운을 잔뜩 묻히고 온 그는 행여 석민이 깰 세라 겉옷을 벗어 방바닥에 조심스럽게 놓아두고 벽을 보고 누운 석민의 침대 이불을 들추고 슬그머니 들어왔다. 이내 그의 차디 찬 손이 석민의 허리를 끌어안아 당기고, 뒤통수에 짧게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석민아 자?”
...
“미안. 오늘도 너무 늦게 끝나서.”
...
“잘 자. 우리 석민이.”

사실 잠 다 깼어, 형. 하고 뒤돌아 안아줄 수도 있었지만 꽁한 마음은 어째 그의 품 안에서도 녹을 줄 몰라서, 석민은 겨우 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손을 쓸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짧은 숨소리가 섞인 웃음과 함께 뒷목에 쪽-쪽-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석민은 끝까지 뒤돌지 않았다. 그냥, 그 날의 마음이 그랬다.
어두운 방 안, 정한이 미처 보지 못한 책상 위엔 오늘 컴백한 정한이 속한 그룹 나인틴의 앨범이 올려져 있었다.



- 별의 반대쪽에서 -


야 이석민, 밥 먹자고. 귓구멍 막혔냐?
어제 새벽에 잠깐 들어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정한을 생각하느라 수업이 끝난 줄도 모르고 멍 때리고 있었던 석민의 등짝을 냅다 후려 갈긴 건 치우였다. 야 넌 여자애가 왜 이렇게 손이 맵냐, 따가운 등을 쓱쓱 쓸며 고개를 들자 눈을 부라리던 치우가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게 누가 정신 빠지게 폰만 보고 있으래?

“내가 그랬어?”
“어~ 그랬어. 마치 일주일째 연락 없는 여친 기다리는 그런 모양새. 그거 딱 너야.”

석민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일어나 치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치우와 같은 과 같은 조이고 새터에서부터 친해진 제일 친한 여사친이지만 그렇다고 나인틴의 윤정한이 내 애인인데 거의 한달 째 목소리만 듣거나 잠결에 얼굴만 보는 게 다여서 너무 힘들다는 걸 차마 어떻게 말하겠느냔 말이다. 석민은 중식 메뉴를 꼼꼼히 고르는 치우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쉬며 할 말을 대신했다. 뭘 먹을꺼냐는 물음에도 그냥 너 먹는 거 같이, 라고 대충 결정한 뒤 자리에 앉았다.


오랜 연습생 생활 끝이 데뷔라고 누가 말했던가. 적어도 석민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라커가 되고 싶었고, 가수가 되고 싶어 참여한 오디션에서 5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면 뭐하냐고. 그 곳에는 그만큼 하는 사람들이 수십명은 더 있었고, 매일 매일 새로운 연습생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석민은 정글같은 그곳에서 3년을 버텼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한을 만났다. 정한은 본인과 다르게 길거리 캐스팅이라는 금수저 급 라인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대우가 달랐다. 어린 석민에게 그것은 꽤나 마음이 상하고 힘든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윤정한은 이석민의 약한 마음을 파고 들었다. 이를 테면 연습이 안 된다고 운다던가, 힘들고 나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던가. 정작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그런 약한 모습들 덕분에 석민은 정한이 본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석민의 옆을 꾸준히 독차지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데뷔조 발표날, 그렇게 힘들고 못하겠다던 정한은 데뷔조에 들어갔고 석민은 밀려났다. 머리는 알았지만 마음은 죽고 싶었다. 그리고 본인보다 더 엉엉 우는 정한 때문에 석민은 더 울 수도 없었다. 팀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어줍잖은 변명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앞으로 뭘 해야 되나 고민이나 했다. 그때 정한이 석민을 회사 옥상으로 불러서 뭐라고 했었더라.

‘석민아, 나 데뷔해도 만나 줄 거지?’
‘무슨 소리야. 이제 형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 바빠서.’
‘그럼 나 데뷔 안할래.’
‘형 그게 내 앞에서 지금 할 소리냐?’
‘그니까 나랑 만나주라고. 내가 더 열심히 너 만나러 가면 되잖아. 새벽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 날 때마다 너 만나러 가면 되잖아.’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나고 싶은 이유가 뭔데?’
‘...좋아해.’
‘뭐?’
‘좋아해 내가 너 많이. 그니까 그냥 얼굴만 보여줘. 다른 거 안 바랄게. 그냥 보기만 하자. 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욕해. 나한테 형이 매달리는 꼴이 얼마나 코미디인 지 알아? 석민은 울음보가 터진 정한의 두 볼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늘 아주 크리티컬 히트를 몇 번이나 맞는 거야, 나. 석민은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데뷔조를 탈락하고,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윤정한한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우는 거야. 석민은 눈물콧물 쏟으며 고백하는 정한이 그냥 귀엽고 예뻤다. 미쳤지, 고백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나 쉬운 남자였잖아?

그래서 울고 있는 정한의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알았어, 만나 줄 테니까 그만 울어. 그러다 쓰러지겠다.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석민의 손길에 정한은 끅끅 거리는 울음을 겨우 멈췄다. 그리고 석민의 허리를 끌어 안고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석민은 그것이 내심 싫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는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남들처럼 시작했었다. 분명히 시작은 그랬는데.


“밥 앞에 놓고 자꾸 고사 지낼래? 숟가락 꽂아 줘?”

또 다시 차가운 현실.
석민은 치우의 말에 다시 숟가락을 들어 열심히 밥을 퍼 입에 구겨 넣었다. 뭘 시켰는 지 몰랐는데 눈 앞에 제육볶음이 있었다. 한치우 제육볶음에 미쳤네 아주. 일주일 째 그녀와 밥 먹으면서 메뉴가 매번 똑같다는 사실을 간과할 정도로 정신 빠진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한숨 그만 쉬어야지 하면서도 제육볶음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올 거 같았다.

“우리 오늘 조별과제 하러 가기 전에 핫트 한번만 들렸다 가자.”
“거긴 왜.”
“왜긴 왜야 우리 원우 포카 아직 못 뽑았어.”
“그냥 사라 인터넷에서.”
“야! 사는 거랑 뽑는 거랑 같아? 내 손으로 직접 뽑아야 된다고. 하여간 넌 뭘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나도 어제 윤정한 포카 안 나와서 속상했다고. 덧붙이고 싶은 말은 된장국과 함께 후룩 삼켰다.
치우는 나인틴의 팬이었는데, 일반인 코스프레를 잘 하고 다니더니 별안간 석민에게 원우형-같은 연습생이었어서 친했다. 그녀는 절대 모르는 일이지만- 배경의 애플워치를 들키더니 그때부터 일코 해제와 함께 신나게 나인틴 이야기를 해댔다. 덕분에 석민도 정한이 하지 않았던 나인틴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사실 별로 듣고 싶진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골이 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치우에게 끌려온 석민은 나인틴 노래가 빵빵하게 울려 퍼지는 음반 매장 안에서 나인틴 멤버들의 얼빡 포스터가 걸린 매대 앞에 섰다. 요즘은 멤버마다 커버가 다르구나. 바글바글한 팬들 사이에서 석민은 정한의 커버 앨범을 들었다 놨다 했다. 치우는 벌써 원우형의 커버 앨범과 정한의 커버 앨범을 들고 카운터로 가고 있었다. 석민도 고민하는 듯 하더니, 결국 정한의 커버 앨범을 한 장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이것은 마치 중력과도 같은 힘이었다.

치우가 볼 세라 정한의 앨범을 가방 속에 넣은 석민은 그녀와 함께 조별 과제 모임 장소에 일찍 도착해 앉았다. 앨범깡을 하겠다고 기어이 석민에게 카메라를 맡긴 그녀는 원우의 커버를 뜯었고 포토카드는.

“어? 정한이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뭐야 너 정한이 알아?”
“아, 아니, 예쁘게 생겨서 섹시한 표정 하길래. 그냥.”
“오- 보는 눈이 좀 있네. 정한이 팀에서 섹시 포지션이야. 근데 성격 완전 장꾸라 짱 귀여움.”
“...그래?”
“관심 있냐? 너 줄까?”
“아 뭐가. 됐어.”
“완전 갖고 싶은 표정이야 지금.”
“아니거든.”
“줄 거거든?”

그러고서 치우는 석민의 앞에 정한의 포카를 밀었다. 얼른 가방에 넣어. 그래야 과제 시작함! 치우의 으름장에 석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포카를 가방에 넣었다. 물론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치우는 그걸 보고 또 놀렸지만 석민은 얼른 과제나 하자며 노트북을 켰다. 아무래도 빨개진 귓가는 숨길 수 없었지만.



-


[나 오늘은 좀 일찍 끝난다여~ 같이 야식 먹자^^]
[석민아 뭐 먹고 싶어? 내가 시켜 놓을게 ㅎㅎ]
[우리 석민이 오늘 내 힘 따라오려면 장어라도 시켜놔야 되나?ㅋㅋ]
[오늘은 석민이 안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히히]
[보고싶어어 오늘은 얼굴 보여줘야 돼 알았지!]

이 형이 정말 섹시 포지션이라고? 이런 문자 보내는 인간이?
조별 과제를 늦게 마치고 저녁까지 간단하게 먹고 들어가는 길에 여러 개 와 있는 정한의 카톡을 확인하면서 석민은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포카를 꺼내 들었다. 한달 새에 하얗게 탈색했던 머리를 검은 색으로 덮은 그는 여느 아이돌처럼 그윽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보고 찍은 셀카였다. 옷이 어디까지 파진 거야, 운동도 안하면서. 괜히 짜증나서 손가락으로 가슴께를 가렸다가 뭐하는 건가 싶어서 침대 위로 던졌다. 그러다 다시 주워서 지갑에 고이 넣고는 정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응, 나는 곱창 먹을래.


정확히 11시가 넘은 시각, 배달이 왔다 싶어서 문을 여니 마스크에 모자까지 장착하신 아이돌 윤정한씨가 곱창세트를 흔들며 서 있었다. 나 왔어 석민아아- 마스크 안으로 웃고 있는 게 명백한 듯 히히, 하는 웃음 소리도 들렸다. 석민은 한달 만에 보는 그의 몸이 한껏 말라 수척해 보이는 것도, 피곤에 찌들어 눈가에 다크서클이 어마어마한 것도 다 속상했다. 이게 뭐야 진짜. 석민은 괜한 마음에 정한의 손에 들린 곱창 세트를 낚아채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먼저 펴놓은 상에 내려놓으며 불퉁한 마음에 자꾸 잔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내가 형 잘 먹고 다니라고 그랬지. 맨날 삐쩍 꼴아가지고 그게 뭐냐. 그러니까 감기 달고 다니잖아. 도라지즙 사서 보내면서 비타민이랑 프로폴리스랑 사서 보냈는데 잘 챙겨먹고 있는 거지? 제발 좀 까먹지 말고...”
“석민아.”
“왜.”
“나 안 봐줄 거야?”
“못생겨서 안 볼래.”

그 말에 정한은 말 없이 신발을 쓱 벗더니 석민 앞에 놓인 밥상을 TV 쪽으로 밀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뭐해, 형. 석민이 묻자 정한은 별 말 없이 모자도 벗고 마스크도 벗었다. 그리고 석민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더니 석민의 뺨을 가져와 입을 맞췄다. 잘게 입을 맞추던 게 길어지면서 정한이 석민의 무릎 위로 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석민의 손이 정한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정한은 석민의 입술을 깨물고 핥고 빨았다. 호흡이 힘들 때마다 살짝씩 떨어졌다가도, 이내 다시 맞붙었다.

“석민아. 나한테 등 돌리지 마.”
“... 응.”
“한달만에 보는데 너 이러면 진짜 속상해.”
“형도 너무 마르지 마. 나도 속상해.”
“근데 석민아.”
“음?”
“우리 곱창 못 먹겠다.”
“왜.”
“니가 너무 고파.”
“야 윤정ㅎ,”

정한은 석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민의 입술을 물었다. 몸을 비비면서 석민의 티셔츠 안에 손을 집어넣는 게 조급하고 달떴다. 석민도 질 세라 정한의 옷을 끌어 올리며 귓가와 목덜미, 쇄골에 입술을 부볐다. 체온이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맨살이 비벼지며 열기를 뿜어냈다. 아, 석민아- 귓불을 타고 흐르는 신음같은 이름에 흥분이 더해져 머리가 뜨거웠다. 예쁜 얼굴로 섹시하게 부르는 그 이름이 석민이라서, 속된 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핥고 빨리고 쓰다듬어지고 잔뜩 끌어안고, 안에 들어갔다. 추삽질을 하며 리듬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채 방바닥과 온 방을 누비며 잔뜩 끌어 안았다. 사랑은 그렇게 석민의 집 온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겼다.

체력을 바닥낸 채 침대에 겨우 누운 게 새벽 2시쯤이던가. 석민은 누워 있던 정한을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가방에서 아직 뜯지도 않은 정한의 커버 앨범을 꺼내 들었다. 정한은 석민의 손에 들린 앨범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앨범 샀어?”
“아니 치우가 산다길래 따라 갔다가 샀지.”
“근데 왜 새거야.”
“그냥, 뜯는 것도 아까워서. 형 보고 싶을 때 뜯어 보려고 했지.”

정한은 석민의 말에 또 울상을 하더니 석민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 슬퍼지니까. 그리고서 본인 손으로 앨범 비닐을 북북 찢어 뜯었다. 다양한 구성품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데 정한의 커버여서 그런 지 정한의 구성품들이 와다다 쏟아졌다. 포카는 원우가 나오자 석민은 포카를 집어 들었다. 원우형 잘 나왔네. 멋있다.

“너는 내가 앞에 있는 데 원우 잘 나왔다고 하고 싶어?”
“아니이- 사진이 잘 나왔잖아.”

석민의 손에서 포카를 낚아챈 정한은 얼른 본인의 옷 주머니에 포카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석민의 두뺨을 딱 잡고 그랬다. 너 나만 보라고 그랬지. 누가 딴 놈한테 자꾸 눈길 주래.

아니 무슨 눈길을 준다고 그래 이 형이이. 말꼬리를 늘리는 석민이 맘에 안드는 지 노려보다 이불을 팍 쓰고 엉엉 우는 척 하는 정한에 기가 막혔다. 우는 척 하지 말고 일어나라. 석민이가 뽀뽀해주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또 이렇게 잘 들리는 지, 석민은 웃으며 이불 안의 정한을 끌어 안았다. 뽀뽀 백번도 천번도 해줄 수 있으니까 일어나자. 형 진짜 나가야 돼, 이제. 새벽에 출발해야 된다며. 석민의 다독이는 목소리에 정한은 슬그머니 일어나 한숨을 푹 쉬며 허리께를 끌어안고 배에 얼굴을 비비적 거렸다. 간지럽다는 말도 안통하는 걸 아는 석민이라 그저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제 얼굴 보면 또 언제 볼 줄 알고. 활동 끝나면 바로 일본투어 갈거고, 연습할 거고, 또 연락은 뜸해질 것이다. 석민도 알고 정한도 아는, 그들의 미래 일들. 함께 일 줄 알았던 그 모든 일들이 이제 오롯이 정한만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 또 서럽기까지 했다. 원래 간절하면 더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잖아.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왔던 그 날, 누군가가 위로한답시고 말했던 그 말이 왜 지금 또 생각나는 지. 석민은 정한의 뺨에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그때 내가 데뷔조로 뽑혔다면, 내가 형의 고백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석민아, 내가 매일 매일 전화할게. 진짜, 1분이라도 꼭 전화할 테니까 받아야 돼. 알았지?”
“알았어. 알잖아, 나 형 5분 대기조인거.”
“나는 1초 대기조야. 너 부르면 내가 어디든 가. 니가 안 불러도 너가 필요할 때 내가 가있을 거야. 진짜야.”
“빈말은 하지 말고.”

의지가 담긴 눈빛을 외면하고 석민은 힘을 써 정한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우리 형 머리 까치집 된 거 정리도 좀 하고, 숙소 주변에 팬들 있는 지 없는 지 잘 보고, 이왕이면 매니저형한테 연락해서 방송국으로 바로 갈 수 있게 픽업 해달라고 부탁도 하고. 응? 이제는 정한보다 정한의 사정을 더 잘 아는 석민이 정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한은 그 말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주워 입었다.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다.




-




정한이 그렇게 가고 난 뒤 석민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연영과 답게 –배운 게 이것 뿐이라고 연기학원으로 빠져 결국 연영과에 합격했다- 공연 준비도 하고 극작 수업도 듣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사이 정한은 앨범 활동을 성공리에 마치고 일본 데뷔를 발표했다. 이미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그룹이 일본으로 데뷔한다는 건 큰 의미를 시사했다. 즉, 지금도 바쁜데 더욱 더 바빠질 것이라는 것. 얼굴 보기 힘든 애인이 향후 3개월은 더 못 보게 생겼다는 것. 석민은 못 봐서 어뜩하냐는 정한의 전화에 그저 웃었다.

-형 몰랐어? 그래서 아이돌은 연애 오래 못한대. 우리가 진짜 특이한 거야.
-야 너 그런 말 하지 마
-왜에
-오래 못한다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우리가 그렇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암튼 짜증나니까 그런 말 말고 사랑한다고나 해
-윤정한
-아 빨리
-사랑해. 진짜 많이.
-내가 더 사랑해. 까먹지 마.

내가 어떻게 까먹어, 윤정한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눈빛 한번에도 이렇게 설레는데.
석민은 자주 연락이나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연락을 자주 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본인도 4년 동안 뼈져리게 느끼고 배웠던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에 그저 정한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한의 그룹은 일본 데뷔를 앞두고 미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만드는 자체 컨텐츠를 매 주마다 찍었고, 연습 영상에서도 카메라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온갖 SNS에 사진을 올리고 팬들과 소통을 해야 했고, 가끔 라이브 방송을 켜서 소식을 전해야 했다. 석민의 예상대로, 정말 숙소에 가면 자기 바빴고 일어나면 준비해서 연습하고 촬영하기 바빴다. 하루에 1분 전화는커녕 문자도 힘들었다. 석민이 아침에 카톡을 보내면, 정한은 저녁에나 대답했다. 대기실에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폰 보는 게 눈치 보였기 때문이다. 행여나 석민의 카톡이 카메라에 잡힐 까봐 무서워서 카톡은 열지도 못했다. 뭐라고 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하릴없이 게임이나 켰다. 그런 자신이 너무 짜증나고 미안한 정한이었다.

정한이 그러는 동안 석민에게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아주 큰 대형 뮤지컬에 가장 작은 역할의 오디션이 들어온 것이었다. 교수님이 수업을 듣고 나가는 석민을 불러 내민 종이가 바로 오디션 모집 안내문이었다. 석민은 이게 시작일 수도 있다고, 너의 첫 시작이 이 뮤지컬이었으면 좋겠다는 교수의 말에 오랜만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매번 실패의 경험만 끌어안고 있던 석민에게 어쩌면 이 도전이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줄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뮤지컬 오디션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정한에게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해봤자 걱정만 할 것 같아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무지하게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근데 정한이 더 힘드니까. 석민은 그저 정한에게 오늘도 별 일 없이, 무사히 잘 보냈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석민은 정한의 소식을 그의 입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더 많이 보았고, 그의 SNS 계정에서 사진을 저장했다. 따로 정한이 사진을 보내줄 때도 있었지만 날것의 그 사진들보다 어쩐지 아이돌 정한의 사진을 저장하고 싶었다. 흔들린 사진 말고 더 예쁜 사진을 갖고 싶은 욕심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석민이 고생한 만큼 뮤지컬 오디션은 좋은 결과를 낳았다. 아주 작은 역이고, 뮤지컬 예매 사이트에 사진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귀퉁이에 써 있을 이름이지만 어쨌든 합격하고야 말았다. 작은 역할인 만큼 행인 2도 했다가, 춤추는 광대도 했다가, 마지막 한 소절의 노래를 깔아주는, 그런 아주 조그마한 역할. 이름도 주어지지 않는 그 역할에 합격하고서 석민은 엉엉 울었다. 합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희열은 이렇게 달았다. 정한에게 합격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서, 그냥 대본 사진이나 찍어 보냈다. 무슨 뮤지컬인지도 모르고, 어떤 역할인지도 모르지만, 제 목소리가 담길 그 한소절이 담긴 대사만 찍어서. 정한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석민은 그냥 ㅋㅋㅋㅋ 만 쳤다. 요즘 꽂히는 대사라서 찍어 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아〉 라는 대사 어디에도 꽂힐 만한 부분이 없는 대도.

정한은 석민의 사진 한 장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별 일 없어 보이는 말투에 걱정을 관두었다. 일본 데뷔 후 계속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는 스케줄에 도저히 중간에 빠져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석민을 보지 못한 채 두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 이러다 석민이 못 보면 죽을 것 같아.”


그리고 한달이 더 지난 시점. 정한은 눈물방울을 매달고 원우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원우는 언제부터 그렇게 둘이 애틋했냐고 웃었지만 웃고 있지 않은 정한의 얼굴을 보자 안경을 추켜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하긴, 연습생 때부터 둘이 특별하긴 했지. 그래도 데뷔 후에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정도면 좀 심각하다 싶었다. 원우는 죽겠다며 제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정한을 다독이며 폰에 들었을 석민의 전화번호가 바뀌진 않았을지 생각했다. 우리가 못 가면, 석민을 부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본인도 얼굴 본 지 너무 오래 됐으니까, 일본 여행 올 겸 공연 보러 오라고 하면 너무 나쁜 사람일까. 원래 같이 데뷔했어야 할 팀의 일본 무대를 보러 오라는 게 맞는 걸까. 근데 또 옆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석민이 이름만 부르고 있는 정한을 보자니 고민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일단 같은 멤버인 윤정한이 먼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석민아 잘 지내니?]
[나 원우형이야.]

단 두 문장에 석민은 연습에 지쳐 떨리는 손으로 당장 답장을 했다. 원우 형이 무슨 일이야? 나를 다 찾고? 너무 보고 싶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던지라 석민의 손가락도 춤추듯 자판을 눌렀다.

[혀엉- 잘 지내? 형 너무 보고싶어ㅠㅠ 나는 요즘 뮤지컬 연습하느라 바빠]

뮤지컬, 까지 쓰고 답장을 보내고 난 다음에야 헉! 하고 생각이 났다. 맞다, 이 형 윤정한이랑 같은 팀이지. 놀래서 말을 덧붙였다. 형 근데 정한이형한테는 비밀이야. 나 뮤지컬하는 거 몰라.

원우는 석민의 대답에 왜 뮤지컬을 비밀로 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그리고 정한이 너 보고 싶다고 옆에서 울고 있다니까 ㅋㅋㅋ 하며 곧장 정한의 폰으로 전화를 했다. 뭐야, 이렇게 쉽게 전화할 수 있으면서 나한테 왜? 라는 원우의 물음에는 정한이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웃으니 됐다 싶었다. 나중에 석민의 뮤지컬이나 같이 보러 가면 되겠다,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결국 일본에 석민을 초대하겠다는 원우의 생각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반대로 석민을 추궁하여 뮤지컬 이름만 알아낸 그는 석민 몰래 티켓을 두 장 구했다. 자신도 간만에 석민을 보고 정한도 데리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구한 티켓인데 속도 모르는 정한은 왜 갑자기 뮤지컬 바람이 났냐며 놀려대기 바빴다.

과연 형 니가 무대 위 석민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까.
원우는 도대체 누굴 보러 가길래 꽃다발까지 손수 사냐며 놀리는 데 여념이 없는 정한을 웃음으로 대꾸했다. 속을 알 길 없는 원우의 얼굴을 보고 정한도 더 이상 놀리기를 그치고 공연장으로 들어서 사진을 찍었다. 분명 여기에도 있을 팬들에게 목격담이 올라 올테니 사진 찍어서 인증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근데 원우는 이상하게 캐스팅 보드 제일 끝 구석을 두리번 거리더니 거기만 계속 찍고 있었다. 정한은 도대체 누구 이름이 있냐고 기웃거렸지만 원우는 끝까지 정한을 밀어내 캐스팅 보드의 구석은 가지도 못하게 했다. 너가 이름 봐봤자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신경 쓰지마, 원우의 말에 정한은 입만 삐죽거렸다. 끝까지 안 알려주는 나쁜 놈아. 행여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릴 새라 속으로 꿍시렁 거리던 그는 곧 극이 시작한다는 알림에 원우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지인찬스를 썼는 지 초대석에 편안히 앉은 둘은 주변에서 술렁거리는 느낌에 익숙한 듯 앉아서 무대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아더왕 이야기라는 조금은 고루한 스토리를 꽤 재밌게 풀어낸 뮤지컬이었다. 원우는 시시때때로 고개를 빼내고 두리번 거리면서 누군가를 찾는 모양새였지만, 정한은 그게 누군 지 알 길이 없어 마스크 사이로 하품이나 했다. 나 진짜 뮤지컬 이런 거에 취미 없는데. 보이지 않는 입모양으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때 원우가 정한의 팔을 툭툭 치며 무대를 손가락질 했다.

“형, 보여? 저기 행인.”
“어디.”
“저기 허름한 옷 입고 있는 남자.”
“....어...?”
“석민이야.”


석민이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내 애인.
정한은 원우가 옆에서 잘 컷다느니, 멋있다느니, 저런 옷을 입어도 태가 난다느니, 하는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석민의 표정, 손짓, 눈빛까지 전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석민이, 이런 뮤지컬에, 무대에 섰다는 거잖아. 당당하게 배우로.

“윤정한 울어?”

석민이 놀래줄 생각에 신나하던 원우가 옆을 돌아보다 깜짝 놀란 건 정한 때문이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그래도 무대 잘 볼 거라고 눈물 벅벅 닦아가며 보고 있는 정한이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만 좀 울어라.”
“닥쳐. 카메라 들어서 찍고 싶은 거 참고 있는 중이거든.”

정한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원우는 그제야 민망한 지 사과를 건넸지만, 아니 너 말고 쟤. 라는 말로 입을 막았다. 원우는 그저 꽃다발만 끌어안고 극이 빨리 끝나서 둘이 재회하거든 숙소로 먼저 튀어갈 생각을 했다.

- 죽음 앞에 당당하게 싸우리라. 함께라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아.

충성의 맹세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기사들에 섞여있던, 그래서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던 그 한소절의 노래에서 정한은 분명히 들었다. 석민의 목소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해 마다않던 그 목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운 듯 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자체 뮤트되어 석민의 노래만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정한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떨렸다. 손에 무언갈 잡고 있지않으면 안될 정도로 안정이 되지 않아서 옆에 있는 원우 팔을 잡아 끌었다. 원우는 울고 있는 정한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자신도 석민의 한소절이 이렇게 벅찬데 정한은 오죽할까. 그래서 그만 울라는 말도 그만 두었다.

뮤지컬이 끝나자 커튼콜이 시작되었고, 으레 그렇듯 먼저 자리를 빠져줘야 되는 사람들임에도 정한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무대 구석에서 박수를 치며 행복해하는 석민의 모습을 눈에 조금이라도 더 담기 위해서였지만, 원우는 미련 남은 정한의 팔을 끌어 당겼다. 형 여기 계속 있으면 사람들한테 더 밀려서 못 나가. 빨리 가자. 원우의 말에도 정한은 끝까지 움직이질 못하다가 결국 원우의 힘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갔다. 석민이 봐야 되는데, 정한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닦으며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정한은 왜 원우가 캐스팅보드 구석을 찍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캐스팅보드 쪽으로 걸어가 기어코 석민의 이름을 찾아낸 정한은 몇 번이나 사진을 찍으며 이름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석민, 반듯한 글체로 써진 이름을 보니 또 눈물이 차올랐다. 원우는 정한의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형이 주는 게 더 좋겠다.”
“그래도 돼?”
“아니라는 말은 안하네. 가자. 석민이 보러.”

정한은 원우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꽉 쥐고 대기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주인공도 아니고 주조연급도 아니어서 변변한 대기실도 없을 테고, 정신 없는 무대 뒤쪽에 가서 찾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오늘 석민을 보지 못한 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원우는 지인을 찾는다는 말로 스텝에게 대기실 쪽 길을 열었다.

“석민아!”
“....형? 여긴 어떻, 정한이 형?”
“야 이석민!”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문 한쪽 구석에서 더러워진 장화를 벗고 있던 땀 범벅의 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원우는 반갑게 석민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뒤로 보이는 정한의 목소리에 석민은 신발을 벗던 그대로 얼어 붙었다. 정한은 울먹거리던 얼굴로 석민에게 꽃다발을 던지듯 가슴팍에 전해주고 다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어어? 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원우도 당황스러워 하는 사이, 석민은 원우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깨를 두드렸다. 형, 진짜 미안한데 정한이 형 좀 데리고 올게. 형 차 가지고 왔으면 차에 있을래? 내가 정한이형 데리고 갈게. 미안. 그 와중에도 다정하게 말하는 석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원우는 장난스레 사랑싸움 그만 하라며 웃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에 씁쓸히 웃은 석민은 한번 더 어깨를 두드리며 정한이 나간 쪽으로 뛰쳐 나갔다.

“형! 거기 서봐, 좀!”
“싫어!”
“야 윤정한! 나 발 시렵다고!”
“너...! 왜 그러고 나왔어!”
“형이 냅다 뛰잖아!”

한쪽은 장화를 신고 한쪽은 맨발이 된 석민이 지하주차장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정한을 잡아챘다. 형, 진짜 좀 가만히 있어. 내가 잡을 수 있게 멀리 달아나지 말라고. 석민의 손에 잡힌 정한은 씩씩거리며 석민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뮤지컬 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럴 수가 있냐? 그것도 원우가 먼저 알아서 나 여기 와서 너 보기 전까지 뭔지도 몰랐어. 너 맨날 바쁘다고 하니까, 나는 대학교 안다녀본 사람이니까 바쁜가보다 했지. 근데 이게 뭐야. 너 뮤지컬 하는 거 이제 알아서, 나는 준비도 못하고 와서는,”
“형. 그런 거 아니야. 형이 걱정하고 신경쓸까봐 그랬어. 형 바쁘잖아.”
“내가 바쁜 게 무슨 상관이야? 너 뮤지컬 한다는 것도 지금 안 내가 너무 싫은데!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거 없게 하란 말야.”
“알았어, 미안해. 말 안한 거.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내가 말 안해도 형이 와줘서 나는 너무 좋은데.”
“진짜아 왜 원우가 먼저 아냐고. 너 무대 서는 거 알았으면 나 첫 공연부터 왔을텐데, 이제야 왔잖아.”
“첫 공연때 형 왔으면 나 떨려서 아무것도 못했을 걸. 이제 와서 다행이야. 형한테 그래도 괜찮은 모습 보여줘서.”
“그걸 말이라고 하냐아!”

정한은 석민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울었다. 너 이 나쁜 새끼 무대에서 존나 멋있어서 짜증나, 내가 동영상 못 찍는 게 천추의 한이라고, 이석민 등장부터 퇴장까지 내가 찍었어야 했는데! 석민은 정한의 말에 웃으며 그를 끌어 안았다. 그랬어? 내가 그렇게 멋있었어? 다행이다. 형한테 멋있는 애인이 돼서.

“넌 언제나 나한테 최고였어. 처음 볼때부터 그랬어. 한번도 찌질한 적 없었다고.”
“맞아. 형도 나한테 매일 그랬어. 예쁘고, 빛나고, 특별했어.”

그리고 정한의 뺨을 쓸며 키스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입술로 지우면서 석민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정한은 그런 석민의 목을 끌어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석민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 예쁜 정한이 형, 내가 제일 사랑하는 정한이 형, 이 세상에서 나를 1순위로 생각해주는 내 윤정한. 사랑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