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의 인턴 기간 그리고 입사하고도 두어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런 데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들 눈에 안 띄는 저 복도 끝 자료실 앞에 선 석민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고 돌리자 달칵하며 문이 열렸다. 반쯤 정도 열린 문 사이로 텁텁한 먼지 냄새가 불어왔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석민은 한숨을 푹 내쉬고 결심한 듯 자켓을 벗어 와이셔츠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겉보기엔 덤덤해 보였지만 속으로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디지털화를 안 해놓은 자료가 있냐며 울분을 토했다.
서류 더미에 파묻힌 석민이 엉망으로 정리된 종이를 들춰보자 오랜 시간 소복이 쌓여있던 먼지들이 하나둘 다시 떠다니기 시작하며 석민의 눈과 코를 괴롭혔다. 따끔거리는 눈과 목구멍에 잠깐 환기라도 시켜야겠다 싶어 몸을 일으키던 중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인지 먼지인지 모를 시뿌연 안개 뒤로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석민은 소리를 지르려다 지갑 분실에 지각까지 오늘 연달아 했던 실수들이 떠올라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더 이상 일 키우지 말자 석민아 속으로 다짐한 석민이 안개 뒤 사람에게 조심히 물었다.
"···누구세요? 여기 일반인 출입 금지인데"
낯선 사람은 도통 대답이 없었다. 석민의 심장은 조금씩 더 빠르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석민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형체에 다가가자 안개 뒤로 가려졌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파란빛이 은근히 도는 은발에 하얀 얼굴, 프릴이 여기저기 잔뜩 달린 파란색 원피스에 리본으로 꽉 조여 맨 허리, 단정한 구두와 요술봉까지.
미친놈인가? 정적뿐인 이곳에 점점 더 빨라지는 석민의 심장 소리만이 가득했다. 오만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왠지 석민은 신입사원의 패기로 이 상황을 어엿이 혼자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으며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이목구비에 석민이 눈을 찌푸렸다. 어?
"윤대리님?"
익숙한 얼굴에 놀라 석민이 다급히 뒷걸음을 치자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석민에게 다가왔다. 아니 잠시만!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석민의 질색하는 표정에 남자가 억울한 듯 외치며 조그만 자료실 내부를 살폈다. 석민이 문고리를 두 손으로 쥐고 문 앞에 바짝 붙어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윤대리님 염색 어, 언제 하셨어요…?
남자는 석민의 말에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잠깐 멈칫하더니 찬찬히 석민을 살폈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빨개진 남자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와 석민을 껴안았다. 도겸아!! 웬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석민의 품으로 안겨들어 온 남자에 석민은 당황하며 두 팔을 어설프게 들어 올렸다. 윤대리님의 얼굴을 한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더욱 석민의 품으로 안겼다. 석민이 위로라도 해줘야 하나 싶어 팔을 슬쩍 내리자 서로 맞닿는 맨살의 느낌이 이상해 다시 어설프게 팔을 들어 올린 채로 물었다. 근데 대리님… 도겸이가 누군데요? 남자는 코를 킁킁 먹으며 웅얼거렸다. 아직도 날 못 알아보는 거야?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석민이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리자 그제야 정반대 방향에 아까 자신이 들어왔던 문과 똑같은 또 하나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석민은 그 순간 이 남자가 제 사수 윤대리가 아님을 확신했다.
사랑은 우주를 타고
"그러니까 당신은 제가 아는 윤대리님이 아니고 다른 지구에서 온 또 다른 윤정한인 거고, 활동명은 하니인데 그 지구는 호크모스라는 나쁜 놈이 사람들을 악당으로 물들이고… 그리고 그다음에 뭐라고 하셨죠?"
"그걸 정화하는 게 제 역할이라구요."
"아, 네… 그래서 지금 직종이 히어로…시라는 거죠?"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석민은 머리가 복잡해져 손을 허리에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빙글빙글 자료실 문 앞을 돌아다녔다. 아니 이 세계관은 대체 뭐야? 흔히 알던 마블이랑은 영 장르가 다른 하니의 설명에 석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하니는 자료실 문에 기대앉아 그런 석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석민은 하니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벗어두었던 자켓을 건넸다.
"윤대리님 얼굴로 그렇게 계시니까 제가 너무 적응이 안 돼요…"
"여기서 저는 어떤 사람인데요?"
하니씨는요… 석민이 대답하려던 찰나 누가 자료실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석민씨 여기 있어요?
윤정한! 윤정한이다! 갑작스러운 정한의 등장에 석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니를 숨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다시 한번 들리는 노크 소리에 손을 뻗어 하니를 일으켜 세웠다. 하니도 처음에는 석민의 반응에 당황하다 상황을 금방 눈치채고는 책장 뒤로 숨었다. 잠금장치를 풀자 문을 연 정한이 석민에게 물었다. 자료 찾았어요? 하니를 숨기려 어깨를 쫙 펴고 문틈과 문을 양손으로 잡은 석민이 대답했다. 자료가 다 뒤죽박죽이라 다시 정리하다 보니… 수상한 석민의 행동에 정한이 석민 뒤로 널린 박스들을 쳐다보다 책장 너머 흐릿한 사람의 형상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어요? 아뇨!!! 정한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석민을 빤히 쳐다보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 석민씨 아까까지는 복도에 있었으면서.. 지금 과장님 화나셨어요."
정한이 허리를 휙 숙여 석민의 팔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부를 이리저리 살피던 정한은 책장 뒤에 숨어있던 하니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정한은 고개를 돌려 석민에게 물었다.
"석민씨… 이런 취향이셨어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 석민은 급히 정한을 자료실로 밀어 넣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정한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다 점점 막장으로 다다르는 설명에 점차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어떡하죠…? 석민의 질문에 셋은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러다 고심하던 석민의 눈에 하니의 손에 들린 요술봉이 들어왔다. 마법! 그걸로 마법도 돼요? 석민이 급하게 묻자 하니가 당황하며 요술봉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서는 아직 안 써봐서… 하니의 요술봉을 쳐다본 정한이 결심한 듯 일어섰다.
"그걸로 마법을 쓰든 기절을 시키든 일단 석민씨는 조퇴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옷이랑 모자는 여분 있으니까 가져다줄게요. 하니…씨는 그걸로 얼굴 잘 가려서 같이 나가시고."
정한이 손목시계를 슬쩍 쳐다보고는 석민의 어깨를 토닥이고 조급하게 자료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곧바로 들어와 하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원피스 꼭 갈아입고 가요. 석민은 다시 돌아가는 정한의 뒷모습을 가지 말라는 듯 아련히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걸로 절,
♡
석민이 눈을 뜨자 익숙한 침대 위였다. 벌써 저녁인지 주변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하하 그래 그게 개꿈이지 아님 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석민이 몸을 일으키자 하니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요? 힘 조절한다고 했는데… 정한의 옷을 입은 멀쩡한 하니의 등장에 석민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윤대리님인 줄 알았네… 그러고는 잠깐의 생각 정리 후 얼굴을 빼꼼 내밀고 하니에게 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 같이 먹을래요?"
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리님이랑 입맛도 같으려나… 구내식당에 가면 자주 김치짜글이에 생선구이를 외치던 정한을 떠올린 석민은 근처 한식 맛집을 검색했다. 석민이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하니는 은근슬쩍 베개를 끌어안고 와 옆에 누웠다. 그리곤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가 이쪽 지구의 윤정한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잖아요. 그러고 나서 바로 정한씨가 들어오는데 보자마자 조금 부러웠어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회사 다니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그치만 그렇게 사는 거 재밌지 않나요?"
하니의 말에 석민은 고등학생 때를 떠올렸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간 노래방에서 노래 잘 부른다는 친구의 한마디에 석민은 음악을 시작했었다. 뒤늦게 노래를 배우겠다고 여기저기 다니다 결국은 성공도 못 하고 애매한 상태로 애매하게 취업이나 한 자신과 하니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하니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름 할만했어요. 도겸이가 물들기 전까지는요."
"도겸이가 누군데요?"
"저희 지구에 석민씨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 잠시만 그러면 제가 빌런이 됐다는 거예요? 아니 거기에서는 노래도 막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그럴 줄 알았는데!!"
저쪽 지구에서의 정한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꽤 놀라운 사실이긴 했지만 석민에게는 전자의 내용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아니 무슨 후원하던 어린이가 해적이 되었다는 결말 마냥 윤대리는 다른 지구에서 마법소년 윤하니인데 아니 나는 왜!! 아니 히어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우주에서는 하고 싶은 일 정도는 하고 살 줄 알았는데 빌런이 되었다는 사실에 석민은 망연자실했다.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니에게 소리치는 석민을 보고 하니는 조금 웃다가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서는 누구든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히어로 발현되면 진짜 개꿀아니냐? 신호등을 기다리던 남학생들이 맞은편 건물 전광판에 가득 담긴 하니의 전투 리플레이 장면을 보고 말했다. 회색 후드를 둘러쓰고 신호를 기다리던 정한은 남학생들의 대화에 조용히 이어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일부러 그들보다 앞서 걸었다. 시팔 니들도 이 나이 먹고 치마 입고 악당 물리쳐봐라 개꿀소리 나오나. 정한이 속으로 욕을 꾸욱 삼키며 출근했다.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직원인 명호가 저쪽 사무실에서 따라 나왔다. 정한씨 어제 전화는 왜 안 받으셨을까? 연락이 없어서 어제 활동보고서 제출을 못 했거든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꽤 나긋하고 친절한 대화였지만 명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런 명호에 정한이 동문서답으로 물었다.
"명호씨 저 꿀빠는 것처럼 보여요?"
명호는 대답 없이 눈웃음만 지었다. 지금 속으로 응이라고 했죠? 그쵸? 정한의 되물음에 명호가 말없이 회의실로 정한을 밀어 넣었다. 누가 그랬으면 인터뷰에서 해명하면 되겠네요. 하니가 회의실로 들어오자 뭔가 필기를 하고 있던 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후드 차림의 하니를 보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늦게 출근하시는 편이신가 봐요."
"전 인터뷰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퉁명스러운 정한의 대답에 도겸은 예상했다는 듯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볼펜을 내려놓고 정한에게 말했다.
"그러면… 인터뷰 첫 질문은 지금 하시는 일이 정말 개꿀인지부터 물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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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졌네요, 하니씨가. 석민이 밥을 크게 한술 뜨며 말했다. 하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 안 가득 김치와 생선구이를 넣고 웅얼거렸다. 제가 인터뷰 관련해서 한 번 크게 배신당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그날은 제가 먼저 인터뷰 다 끝나고 명함 주면서 자주 보자고 했어요. 하니씨 보기보다 적극적이고 로맨틱하시네.
석민은 김치짜글이와 생선구이가 입에 맞는 듯 잘 먹는 하니와 정한이 자꾸 겹쳐 보였다. 윤대리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할까? 내가 원래 이렇게 윤대리님 생각을 자주 했었나…? 때마침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석민씨 정신은 좀 차렸어요? 정한이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놀란 석민이 문을 열어주면서 정한에게 물었다.
"아니 윤대리님이 저희 집은 어떻게 아세요?"
석민의 질문에 정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석민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슬쩍 웃고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주제를 돌렸다. 거실에 들어서자 정한은 손에 들린 본죽과 김치찌개짜글이를 번갈아보고는 부엌에 본죽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 기절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먹고 있었네요. 정한의 말에 석민이 괜히 민망해 아니 이걸 누구 때문에 시킨건데… 하고 입가를 닦으며 종알거렸다.
하니가 앞선 이야기들을 정한에게 간단히 설명하자 그걸 듣던 정한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러면 도겸씨도 여기에 있나?"
그 순간 석민은 문득 아까 자료실에 들어서며 정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까 나 복도에서 봤다고 했죠!! 그거 혹시… 석민의 말에 정한은 그제야 복도에서의 그 모습이 평소의 석민과는 조금 달랐다는 걸 눈치챘다. 비슷한 정장 차림이긴 했지만, 옷도 조금 달랐던 것 같고 헤어스타일도… 손목시계도 없었는데 차고 있었고… 정한이 차츰차츰 그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잠깐 보셨는데 되게 자세히 기억하시네요. 석민의 말에 정한은 못 들은 척 하니에게 물었다.
"아니 도겸씨는 멀쩡하게 수트입고 있는데 왜 저는,"
"저는 지원금 땡기려면 최대한 눈에 튀어야 하거든요."
하니씨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시는 일 개꿀은 아닌 것 같아요.
♥
제가 복도부터 다시 둘러볼 테니까 둘은 사무실 다니면서 누가 있나 봐주세요. 정한의 말에 석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니와 함께 맞은편으로 사라졌다. 정한은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천천히 걸었다. 내가 새벽 2시에 제 발로 회사에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도겸의 이름을 부르며 자료실 근처에 왔을 때쯤 누가 갑자기 정한의 손목을 붙잡고 자료실로 들어왔다. 쉿. 한 손으로 정한의 입을 막은 도겸이 주변을 살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정한씨 맞죠? 하니씨 말고 정한씨."
정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은 자료실 문을 걸어 잠그고 손을 내렸다. 몇 시간 전 복도에서 볼 때도 조금 불안해 보였는데 낯선 환경에 오랜 시간 혼자 떨어져서인지 도겸은 지친 기색이었다. 그새 사람이 좀 드나들었다고 공중에 날리던 먼지들을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한의 휴대폰에서 나오는 불빛이 이 어두컴컴한 자료실의 유일한 빛이었다. 빌런이니 뭐니 하는 하니의 이야기에 만나자마자 자길 마구 두들겨 패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온순한 도겸의 모습에 정한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악당처럼 보이진 않네요."
소매로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도겸은 정한의 엉뚱한 말에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으로 넘어오고부터 간헐적으로 정신이 돌아오고 있어요."
빌런도 우주는 못 뛰어넘나 봐요. 잠깐 숨을 고르며 농담을 건넨 도겸은 이내 시간이 없다며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하니의 명함을 건넸다. 정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겸을 쳐다보았다.
"나쁜 기운은 가장 소중한 것에 깃들거든요. 이걸 없애면 끝이에요."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도겸씨한테는 중요한 물건이었던 것 같은데 왜 하니씨는 몰랐을까요?"
"원래 남의 마음 알기가 제일 어려운 거죠. 윤정한이 저 정화하겠다고 우리 집에 가서 제가 제일 아끼던 기타 부수는데 저 속 터져 죽을 뻔했어요."
"남의 마음 모르는 건 도겸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정한의 말에 도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하니가 자길 좋아하는지 모르는 눈치라 정한은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남의 마음 알기가 제일 어렵다는 도겸의 말에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하니의 명함을 잠깐 만지작거리다 결심한 듯 여러 번에 걸쳐 천천히 명함을 찢었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도겸은 후련한 듯하면서도 허탈한 눈빛으로 갈가리 찢긴 명함을 바라보았다.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명함 조각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정한은 곧바로 석민에게 연락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도겸은 자료실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정한은 그런 도겸의 앞에 쭈그려 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요.
곧 문이 벌컥 열리고 하니가 먼저 자료실로 뛰어 들어왔다. 하니는 자료실로 들어서자마자 제가 알던 도겸임을 곧바로 알아채고 달려가 끌어안았다. 나 땀냄새 나요. 도겸이 하니를 밀어내자 하니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도겸을 더욱 끌어안았다. 둘의 만남에 맞은편 자료실 문이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석민은 여전히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자료실 열쇠를 떠올렸다. 천천히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자 달칵하며 천천히 열리는 자료실 문 너머로 새벽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문 너머의 다른 우주는 생각보다 다를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한 옥상 사무실이었다.
히어로다운 로맨틱한 재회네요. 석민의 말에 하니는 빙긋 웃었다. 고마웠어요. 하니가 석민과 정한에게 손을 내밀었고 셋은 차례로 악수했다. 하니가 자료실 구석에 숨겨두었던 옷을 들고 먼저 문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주변을 확인한 뒤 하니가 괜찮은 것 같다며 도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겸은 멈칫하며 고민하는 듯싶다 이내 하니의 손을 잡고 우주의 경계선을 넘었다. 안녕. 석민과 정한이 도겸과 하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꼭 마주 본 거울 같아 오묘한 기분을 뒤로 하고 석민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구멍에 다시 열쇠를 넣고 잠그자 문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민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오늘 정말 다사다난했네요…"
"그러게요. ···아! 석민씨 이거.”
정한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자켓 안주머니에서 석민의 지갑을 꺼냈다. 뭐야? 그게 왜 거기서 나와요? 평소답지 않게 늦잠을 잔 데다 지갑까지 잃어버려 고난이었던 아침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석민의 물음에도 정한은 대답 없이 석민보다 앞서 걷다 뒤를 슬쩍 돌아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어제 개인적으로는 말 놓자고 하지 않았나?"
"네…? 우리가요? 왜요?"
"와 석민씨 정말 다 까먹으셨구나… 석민씨도 어제 술이라는 악당한테 당하셨나 보네 어제 잔뜩 취해서 회식 끝나고 저한테 고백한 것도 기억 못 하고~ 내 차에서 키스하다가 지갑 떨어뜨린 것도 기억 못 하고~ 집에 데려다준 것도 기억 못 하고~ 와 진짜 서운하다~"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정한에 석민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네??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에 당황한 석민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복기되는 기억에 석민은 카드를 손에 꼭 쥐고 새빨개진 얼굴로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하니씨 제발 다시 와서 저 좀 데려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