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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광인
From 람겸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긴 투어 일정에 마침표를 찍으러 자카르타로 가는 길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이지만 추위를 잘 못 느끼고 있다. 옆에서 색색 자는 이 형 덕분에.
형과 연애하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이나 됐다. 아직도 내가 고백할 때 형 표정이 눈앞에 그려질 듯 선명한데.
데뷔 초, 이제 막 인터넷으로라도 방송을 하며 내 생각을 필터 없이 뱉을 시절에는 이상형이니 뭐니 하는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 그 시절 남자애들이 말하는 그런 이상형들을 거리낌 없이 죽죽 말했던 것 같다. 긴 생머리니 섹시한 여자니 한번 뱉은 말이 아직도 돌아다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다. 나도 내가 이 형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
처음엔 새로 들어온 형이니 잘 챙겨주자 하는 마음이었다. 엄청 긴장해서 꼭 만화에 나오는 다람쥐마냥 연습실을 둘러보더라. 연상인 남자한테 귀엽다는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저 형은 군대도 보내면 안될 것 같애. 지켜줘야 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도 연습생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능청이나 장난같이 본래 성격들도 조금씩 나오는 게 보였다. 웃으면서 몸통 박치기하는 건 원래 습관인 건지 지금도 그 표정은 변함이 없다. 연습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장난도 곧잘 치더라.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겠지. 안무 연습하다가 뜻대로 잘 안되는지 화장실 가서 울고... 보컬 연습실에 둘이 들어가서 따로 연습도 하고 연습생들끼리 따로 방에 들어가 인터뷰 같은 것도 서로 많이 했던것같다. 이땐 단둘이 한 방에 있어도 별 느낌 없었는데..
데뷔를 하고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천성인지 형은 모두를 잘 챙기고 특히 동생들을 예뻐해 주는 게 보였다. 동생들도 유독 정한이형을 더 찾는 것 같고. 갑작스레 형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데뷔 전에도 성인이었는데 지금은 진짜로 어른. 똑같이 잘해줘도 형이 챙겨주면 뭔가 괜히 설레서(이 땐 멍청하게 형이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하고 넘겼는데) 뚝딱대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애교 부리고 눈에 들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가? 정한이형이 예뻐하는 동생 포지션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자주 붙어있으니까 뚝딱대는 게 영상으로 다 담겨있다.
'도겨마 너 이때 왤케 어색해?'
맨날 어깨 안고 허리 안고 손 잡고... 친한 멤버 사이니까 하며 나도 맞잡고 껴안고. 저 형은 아무 생각 없을텐데 혼자 설레니까 현타도 왔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형이 먼저 잘못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속으로 운명이라 생각했지만) 팀이나 자리가 계속 겹쳤다. 유닛도 보컬팀에 홀짝으로 나눠도 같은 팀이고.. 겹치는 게 당연한가? 옆에 없어도 생각나는데 계속 붙어있으니깐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붙어있기만 하면 다행이게.유독 나를 더 챙기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게 이게 맞나.
'도겸이 오이 안 먹잖아'
'도겸이 누구 바보?'
'얘들아 도겸이 할 말 있대'
'도겸아 요즘 힘든 거 없어?'
'내가 좋아 승관이가 좋아?'
'도겸씨도 소감 한 말씀해주세요'
형이 잘못한 거다.
왜 나는 형을 좋아하게 돼서 이 고생을 하는가???
어..?
좋아해?
아니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좋아하는 게 맞나?
...맞는거같애.
헐.
이석민 정한이형이랑 뽀뽀도 할 수 있어?
아씨 근데 될 거 같은데? 갑자기 덥다.
나 정한이형 좋아하는구나.
내가? 남자를? 한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 게이 라는 거잖아.
나 그럼 게이 된 건가??
완전 게이까지는 아니고 정한이형만 좋아하는 거 아닌가?
이 상태로 한달은 고민한 것 같다. 나는 정한이형이 좋은 건 알았지만... 정한이형이 남자라는 걸 생각 못했다. 이게 연애 감정인지도. 생각해오던 '보통'과 멀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인정하게 됐지만 형에게도 이런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내가 좋은 게, 그니까 멤버 동생 말고 남자로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도 예민할 바쁜 시기에 혼란스럽게 할 순 없었다.안그래도 멤버들이 힘든 거 스트레스받는 거 다 신경 쓰고 기대게 해주느라 바쁜데.. 휴식기가 생기면 그때 물어봐야지.
어떻게 보면 감사하게도 세븐틴은 휴식기라는 게 없었다. 앨범 준비하고, 발매하고, 활동하면서 동시에 앨범 준비하고, 공연 준비하고, 활동 끝내고 나서 공연하고,공연 중에도 앨범 준비 하고,발매하고 를 반복했다. 물론 그 중에서 하루 이틀은 쉬는 날이 생겼지만 나는 한달을 고민했는데 하루 이틀 새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예민하다면 예민한 성정에 나까지 부담을 주면 안되지..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형이 누군가에게 특별히 연애 감정을 비춘 적이 없다는 것. 형은 혹시 연애세포가 없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이 형이 날 좋아하나?? 김칫국 마시다가도 아냐 정한이형이 왜 날... 하며 넘길 수 있었다. 산책하러 가자고 하는것도,자기랑 놀아줘서 고맙다는 것도, 가끔 헉 싶을 정도로 붙어오는 것도,착한 사람 좋다면서 맨날 나 착하다고 하는 것도, 눈에 설탕 발린 것 처럼 보는 것도 나한테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동생좋아 인간..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면서 형이 머리를 잘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 좋았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형이 머리가 길어서 내가 착각했던 거면 어쩌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외모 때문에 설렜던 적은 드물었다. 왜 좋아하지? 하고 생각해 보면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다. 컴백이 12월이라 컴백 준비도 하면서 연말 무대에 커버도 준비하고 스케줄이 다 차 있었다. 1년 중 적어도 360일 하루에 12시간은 붙어있으니 마음을 숨기는 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숨기려 했더니 말이랑 행동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게 조심해왔지만 이러다 눈치챌지도 몰라. 형도 요새 95들끼리 더 얘기 많이 하는 것 같고..
수고하셨습니다-
"야 민규야."
안무 연습이 끝나고 그나마 말하기 편할 것 같은 민규를 불러 세웠다. 옆에 정한이형 없지? 여긴 좀 그렇고...
"우리 내일 오전에 뭐 없지?"
"엉."
"나 할 말 있는데 숙소가면 내 방으로 잠깐만 와봐."
도저히 혼자서는 안될 것 같다. 이런 건 항상 정한이형한테 얘기했지만, 형을 좋아하는 걸 형한테 말할 순 없잖아. 민규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불안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내가 민규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민규는 이해해 주겠지.
"민규야 듣고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줘."
"뭐길래 이렇게 각 잡고 얘기해?"
"..."
"나 사실 정한이형 좋아해."
"??"
"너무 갑자기라 놀랐을 수도 있는데 장난 아니고 진짜야. 너한테는 그래도 말해도 될 것 같아서. 나도 알게 된 지 오래되진 않았는데 그래도 확실해."
"???아니 잠깐만."
민규 표정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예상하긴 했는데 좀 속상하다.
"그니까 니가 정한이형을 좋아하는데 그걸 얼마전에 알았다고?"
"어"
"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고백하고싶어?"
"근데 정한이형은 남자끼리 좋아하고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잖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털어놓기만 한 건데도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표정을 살피니 걱정한 것보다 민규 반응이 괜찮다.
"같은 그룹 동생으로 계속 남으면 다시 그냥 형 동생으로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생각엔"
"응"
"정한이 형도 너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뭐?!"
"야 조용히 해! 다 불러올거야??"
헙
"아니 들어봐. 정한이 형 너한테 평소에 하는거 기억안나? 썸녀한테도 그렇게 안 해줘."
"형 썸녀있어???"
"아니 형이 있다는 게 아니라 보통 썸녀한테도 그렇게 안한다고"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남이 그렇게 말해주면. 댐이 무너지듯 생각이 넘쳐난다. 솔직히 이건 안좋아하면 불법 아냐?
민규랑 고백 대작전을 세우기로 했다.이제 새 활동 들어가고 연말에 뭐 다 하다보면 좀 풀어지는 시기가..적어도 1월 중순은 지나야 될 것 같은데.
형은,, 산책 가는 거 좋아하니까 한강에 산책하러 가서 고백할까?? 아냐 1월이면 개추워 한강 가면 얼어 죽을 듯. 밥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해볼까? 야 잘못했다가 체하면 어떡해.
"이거 쉽지 않네.. 형이 뭐 좋다 하고 그런 거 없어?"
"형은 날 좋아하지."
".."
"표정 풀어라."
계획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세우기로 하고 민규를 보냈다. 마음이 편해지니 정한이형이 보고싶었다.
.
.
.
"혀엉"
"어엉 도겨마 안추워? 괜찮아?"
"형이 더 추울 것 같은데,,, 이렇게 추운데 코트를 입으면 어떡해!"
"아이 괜찮아."
"..."
"..."
"음 그래서.. 할 얘기 있다구?"
"어어.."
"좀 걸으면서 얘기하까?"
"으응"
".." ".."
"형 좋아해" "도겸아 내가 잘못한거 있어?"
".."
"어?" "어??"
뭐지뭐지뭐지뭐지뭐지뭐지
"무슨 소리야?"
"도겸이 너가 두 달 넘게 나랑 말도 예전처럼 안하구.. 민규랑만 붙어 다니구.."
"!"
"나 볼 때마다 표정이 굳어져서.."
"그거는"
"그거는 내가 형 옆에 가면 떨리니까.. 좋아하는 게 너무 티날까봐..."
"!!!"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솟더니 확 끌어안는다. 어떡해, 형도 나 좋아하나 봐!!
"도겸아 나도 너 좋아해"
형은 겨울냄새가 섞여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얼떨떨하게 마주 안았다. 이게 진짜인지 믿기지 않았다. 꿈인거 아니야?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제자리로 해주시고......]
어?
"깨울려고 했는데 딱 일어났네? 내릴 준비해."
옆을 보니 명호가. 저 옆엔 민규가. 진짜 꿈이라고?
내려서 호텔로 가야 하는데.. 힘이 쭉 빠졌다. 공항까지 오는 길에 자는 형을 보면서 옛날 생각을 해서 그런가.꿈이 너무 선명해서 눈을 떴을 때 그날의 형이 사라진 줄 알았다. 내리자마자 옆으로 붙어오는 형이 있어서 안심했다.
"혀엉 나 아까 예전 꿈꿨어."
"어떤 꿈인데?"
"호텔 가서 알려줄게."
항상 룸메이트를 해왔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각자 방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예전엔 매번 같이 쓰다가 하루 떨어졌을 때도 혼자 써보니 어떠냔 말에 형이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보고 싶은 건 여전하지만. 방을 12개 잡을 순 없는 거잖아.
"형 나 형한테 고백한 날 꿈꿨다?"
"앟ㅎㅎㅎㅎㅎ그날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잖아."
"깼는데 비행기라서 그게 다 꿈인 줄 알고 놀랐어"
"놀라써~"
손을 잡아온다. 기억났다. 난 형의 이 다정으로 시작했지.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사진 찍는 걸 좋아했으면 좋았을텐데.그날의 형의 얼굴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지만 좀 더 선명히 간직하고 싶다.사진을 보면 그때의 온도, 향, 감정들이 다 떠오른다. 혹시라도 내가 바보라서 잊어버릴까 전부 남겨두고 싶은데. 그날의 온도도 오늘과 비슷했던 것 같다
"쫌만 쉬다가 산책 나갈까?"
"으웅 좋아"
문득 궁금해진다.
"형은 내가 언제부터 좋았어?"
"나??"
"나는.. 나 들어오고 나서 여름쯤에."
"뭐??"
"그때 너가.. 연습실에서 해줬던 말이 있는데 그게 많이 힘이 됐어."
연습실에서? 떠올리려 해봐도 연습실에 둘이 있었던 적이 너무 많은데.. 여름이면 형이 적응해가면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간단한 인터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대화도 많이 늘고 어색한게 줄어서 꽤나 많이 붙어있었는데. 우울해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괜찮다고, 너는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는 게 큰 힘이 됐었다. 나도 형한테 힘이 됐다니 내심 기대했지만 말로 들으니 더 기분이 좋았다.
형이 날 처음 좋아하게 된 순간은 어땠을까? 가끔 이럴 땐 연습실에서부터 카메라에 찍혀왔던게 참 뿌듯했다.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 산책하고 돌아오면 찾아봐야겠다.
분명 찾아보려고 했는데.
긴 투어 일정에 마침표를 찍으러 자카르타로 가는 길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이지만 추위를 잘 못 느끼고 있다. 옆에서 색색 자는 이 형 덕분에.
형과 연애하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이나 됐다. 아직도 내가 고백할 때 형 표정이 눈앞에 그려질 듯 선명한데.
데뷔 초, 이제 막 인터넷으로라도 방송을 하며 내 생각을 필터 없이 뱉을 시절에는 이상형이니 뭐니 하는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 그 시절 남자애들이 말하는 그런 이상형들을 거리낌 없이 죽죽 말했던 것 같다. 긴 생머리니 섹시한 여자니 한번 뱉은 말이 아직도 돌아다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다. 나도 내가 이 형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
처음엔 새로 들어온 형이니 잘 챙겨주자 하는 마음이었다. 엄청 긴장해서 꼭 만화에 나오는 다람쥐마냥 연습실을 둘러보더라. 연상인 남자한테 귀엽다는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저 형은 군대도 보내면 안될 것 같애. 지켜줘야 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도 연습생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능청이나 장난같이 본래 성격들도 조금씩 나오는 게 보였다. 웃으면서 몸통 박치기하는 건 원래 습관인 건지 지금도 그 표정은 변함이 없다. 연습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장난도 곧잘 치더라.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겠지. 안무 연습하다가 뜻대로 잘 안되는지 화장실 가서 울고... 보컬 연습실에 둘이 들어가서 따로 연습도 하고 연습생들끼리 따로 방에 들어가 인터뷰 같은 것도 서로 많이 했던것같다. 이땐 단둘이 한 방에 있어도 별 느낌 없었는데..
데뷔를 하고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천성인지 형은 모두를 잘 챙기고 특히 동생들을 예뻐해 주는 게 보였다. 동생들도 유독 정한이형을 더 찾는 것 같고. 갑작스레 형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데뷔 전에도 성인이었는데 지금은 진짜로 어른. 똑같이 잘해줘도 형이 챙겨주면 뭔가 괜히 설레서(이 땐 멍청하게 형이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하고 넘겼는데) 뚝딱대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애교 부리고 눈에 들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가? 정한이형이 예뻐하는 동생 포지션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자주 붙어있으니까 뚝딱대는 게 영상으로 다 담겨있다.
'도겨마 너 이때 왤케 어색해?'
맨날 어깨 안고 허리 안고 손 잡고... 친한 멤버 사이니까 하며 나도 맞잡고 껴안고. 저 형은 아무 생각 없을텐데 혼자 설레니까 현타도 왔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형이 먼저 잘못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속으로 운명이라 생각했지만) 팀이나 자리가 계속 겹쳤다. 유닛도 보컬팀에 홀짝으로 나눠도 같은 팀이고.. 겹치는 게 당연한가? 옆에 없어도 생각나는데 계속 붙어있으니깐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붙어있기만 하면 다행이게.유독 나를 더 챙기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게 이게 맞나.
'도겸이 오이 안 먹잖아'
'도겸이 누구 바보?'
'얘들아 도겸이 할 말 있대'
'도겸아 요즘 힘든 거 없어?'
'내가 좋아 승관이가 좋아?'
'도겸씨도 소감 한 말씀해주세요'
형이 잘못한 거다.
왜 나는 형을 좋아하게 돼서 이 고생을 하는가???
어..?
좋아해?
아니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좋아하는 게 맞나?
...맞는거같애.
헐.
이석민 정한이형이랑 뽀뽀도 할 수 있어?
아씨 근데 될 거 같은데? 갑자기 덥다.
나 정한이형 좋아하는구나.
내가? 남자를? 한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 게이 라는 거잖아.
나 그럼 게이 된 건가??
완전 게이까지는 아니고 정한이형만 좋아하는 거 아닌가?
이 상태로 한달은 고민한 것 같다. 나는 정한이형이 좋은 건 알았지만... 정한이형이 남자라는 걸 생각 못했다. 이게 연애 감정인지도. 생각해오던 '보통'과 멀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인정하게 됐지만 형에게도 이런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내가 좋은 게, 그니까 멤버 동생 말고 남자로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도 예민할 바쁜 시기에 혼란스럽게 할 순 없었다.안그래도 멤버들이 힘든 거 스트레스받는 거 다 신경 쓰고 기대게 해주느라 바쁜데.. 휴식기가 생기면 그때 물어봐야지.
어떻게 보면 감사하게도 세븐틴은 휴식기라는 게 없었다. 앨범 준비하고, 발매하고, 활동하면서 동시에 앨범 준비하고, 공연 준비하고, 활동 끝내고 나서 공연하고,공연 중에도 앨범 준비 하고,발매하고 를 반복했다. 물론 그 중에서 하루 이틀은 쉬는 날이 생겼지만 나는 한달을 고민했는데 하루 이틀 새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예민하다면 예민한 성정에 나까지 부담을 주면 안되지..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형이 누군가에게 특별히 연애 감정을 비춘 적이 없다는 것. 형은 혹시 연애세포가 없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이 형이 날 좋아하나?? 김칫국 마시다가도 아냐 정한이형이 왜 날... 하며 넘길 수 있었다. 산책하러 가자고 하는것도,자기랑 놀아줘서 고맙다는 것도, 가끔 헉 싶을 정도로 붙어오는 것도,착한 사람 좋다면서 맨날 나 착하다고 하는 것도, 눈에 설탕 발린 것 처럼 보는 것도 나한테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동생좋아 인간..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면서 형이 머리를 잘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 좋았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형이 머리가 길어서 내가 착각했던 거면 어쩌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외모 때문에 설렜던 적은 드물었다. 왜 좋아하지? 하고 생각해 보면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다. 컴백이 12월이라 컴백 준비도 하면서 연말 무대에 커버도 준비하고 스케줄이 다 차 있었다. 1년 중 적어도 360일 하루에 12시간은 붙어있으니 마음을 숨기는 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숨기려 했더니 말이랑 행동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게 조심해왔지만 이러다 눈치챌지도 몰라. 형도 요새 95들끼리 더 얘기 많이 하는 것 같고..
수고하셨습니다-
"야 민규야."
안무 연습이 끝나고 그나마 말하기 편할 것 같은 민규를 불러 세웠다. 옆에 정한이형 없지? 여긴 좀 그렇고...
"우리 내일 오전에 뭐 없지?"
"엉."
"나 할 말 있는데 숙소가면 내 방으로 잠깐만 와봐."
도저히 혼자서는 안될 것 같다. 이런 건 항상 정한이형한테 얘기했지만, 형을 좋아하는 걸 형한테 말할 순 없잖아. 민규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불안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내가 민규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민규는 이해해 주겠지.
"민규야 듣고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줘."
"뭐길래 이렇게 각 잡고 얘기해?"
"..."
"나 사실 정한이형 좋아해."
"??"
"너무 갑자기라 놀랐을 수도 있는데 장난 아니고 진짜야. 너한테는 그래도 말해도 될 것 같아서. 나도 알게 된 지 오래되진 않았는데 그래도 확실해."
"???아니 잠깐만."
민규 표정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예상하긴 했는데 좀 속상하다.
"그니까 니가 정한이형을 좋아하는데 그걸 얼마전에 알았다고?"
"어"
"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고백하고싶어?"
"근데 정한이형은 남자끼리 좋아하고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잖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털어놓기만 한 건데도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표정을 살피니 걱정한 것보다 민규 반응이 괜찮다.
"같은 그룹 동생으로 계속 남으면 다시 그냥 형 동생으로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생각엔"
"응"
"정한이 형도 너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뭐?!"
"야 조용히 해! 다 불러올거야??"
헙
"아니 들어봐. 정한이 형 너한테 평소에 하는거 기억안나? 썸녀한테도 그렇게 안 해줘."
"형 썸녀있어???"
"아니 형이 있다는 게 아니라 보통 썸녀한테도 그렇게 안한다고"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남이 그렇게 말해주면. 댐이 무너지듯 생각이 넘쳐난다. 솔직히 이건 안좋아하면 불법 아냐?
민규랑 고백 대작전을 세우기로 했다.이제 새 활동 들어가고 연말에 뭐 다 하다보면 좀 풀어지는 시기가..적어도 1월 중순은 지나야 될 것 같은데.
형은,, 산책 가는 거 좋아하니까 한강에 산책하러 가서 고백할까?? 아냐 1월이면 개추워 한강 가면 얼어 죽을 듯. 밥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해볼까? 야 잘못했다가 체하면 어떡해.
"이거 쉽지 않네.. 형이 뭐 좋다 하고 그런 거 없어?"
"형은 날 좋아하지."
".."
"표정 풀어라."
계획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세우기로 하고 민규를 보냈다. 마음이 편해지니 정한이형이 보고싶었다.
.
.
.
"혀엉"
"어엉 도겨마 안추워? 괜찮아?"
"형이 더 추울 것 같은데,,, 이렇게 추운데 코트를 입으면 어떡해!"
"아이 괜찮아."
"..."
"..."
"음 그래서.. 할 얘기 있다구?"
"어어.."
"좀 걸으면서 얘기하까?"
"으응"
".." ".."
"형 좋아해" "도겸아 내가 잘못한거 있어?"
".."
"어?" "어??"
뭐지뭐지뭐지뭐지뭐지뭐지
"무슨 소리야?"
"도겸이 너가 두 달 넘게 나랑 말도 예전처럼 안하구.. 민규랑만 붙어 다니구.."
"!"
"나 볼 때마다 표정이 굳어져서.."
"그거는"
"그거는 내가 형 옆에 가면 떨리니까.. 좋아하는 게 너무 티날까봐..."
"!!!"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솟더니 확 끌어안는다. 어떡해, 형도 나 좋아하나 봐!!
"도겸아 나도 너 좋아해"
형은 겨울냄새가 섞여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얼떨떨하게 마주 안았다. 이게 진짜인지 믿기지 않았다. 꿈인거 아니야?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제자리로 해주시고......]
어?
"깨울려고 했는데 딱 일어났네? 내릴 준비해."
옆을 보니 명호가. 저 옆엔 민규가. 진짜 꿈이라고?
내려서 호텔로 가야 하는데.. 힘이 쭉 빠졌다. 공항까지 오는 길에 자는 형을 보면서 옛날 생각을 해서 그런가.꿈이 너무 선명해서 눈을 떴을 때 그날의 형이 사라진 줄 알았다. 내리자마자 옆으로 붙어오는 형이 있어서 안심했다.
"혀엉 나 아까 예전 꿈꿨어."
"어떤 꿈인데?"
"호텔 가서 알려줄게."
항상 룸메이트를 해왔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각자 방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예전엔 매번 같이 쓰다가 하루 떨어졌을 때도 혼자 써보니 어떠냔 말에 형이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보고 싶은 건 여전하지만. 방을 12개 잡을 순 없는 거잖아.
"형 나 형한테 고백한 날 꿈꿨다?"
"앟ㅎㅎㅎㅎㅎ그날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잖아."
"깼는데 비행기라서 그게 다 꿈인 줄 알고 놀랐어"
"놀라써~"
손을 잡아온다. 기억났다. 난 형의 이 다정으로 시작했지.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사진 찍는 걸 좋아했으면 좋았을텐데.그날의 형의 얼굴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지만 좀 더 선명히 간직하고 싶다.사진을 보면 그때의 온도, 향, 감정들이 다 떠오른다. 혹시라도 내가 바보라서 잊어버릴까 전부 남겨두고 싶은데. 그날의 온도도 오늘과 비슷했던 것 같다
"쫌만 쉬다가 산책 나갈까?"
"으웅 좋아"
문득 궁금해진다.
"형은 내가 언제부터 좋았어?"
"나??"
"나는.. 나 들어오고 나서 여름쯤에."
"뭐??"
"그때 너가.. 연습실에서 해줬던 말이 있는데 그게 많이 힘이 됐어."
연습실에서? 떠올리려 해봐도 연습실에 둘이 있었던 적이 너무 많은데.. 여름이면 형이 적응해가면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간단한 인터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대화도 많이 늘고 어색한게 줄어서 꽤나 많이 붙어있었는데. 우울해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괜찮다고, 너는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는 게 큰 힘이 됐었다. 나도 형한테 힘이 됐다니 내심 기대했지만 말로 들으니 더 기분이 좋았다.
형이 날 처음 좋아하게 된 순간은 어땠을까? 가끔 이럴 땐 연습실에서부터 카메라에 찍혀왔던게 참 뿌듯했다.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 산책하고 돌아오면 찾아봐야겠다.
분명 찾아보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