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그건 승철이 내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너 그러다가 쓰러져 죽으면 아무도 발견 못할 거 같다고. 너 죽으면 알 수라도 있게 뭐라도 필요하지 않겠냐고. 승철이 구구절절 덧붙이기에 별다른 반문은 하지 않았다. 그니까 얘가 따지자면 그런 역할이라는 거지? 방범용? 내 되도 않는 말에 승철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니 알람용.
—
막막하다. 의도야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다짜고짜 들이닥쳐서 살아있는 생명체를 키우라니. 날 정말 믿고 맡기는 건가? 그러다 나보다 얘가 먼저 죽으면 어쩌려고. 최승철은 믿음직했지만 이따금 될 대로 되라 식으로 굴 때마다 친구는 친구다 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거고 널 정말 어떡하니. 내 마음도 모르고 걔는 왕! 하고 해맑게 짖을 뿐이었다.
정 붙이지 않기 위해 죽어도 이름은 지어주지 말자고 결심한 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무참히 실패했다. 내가 그냥 혼잣말을 할 때마다 자기 이름인 줄 알고 몇 번이나 짖어대는 녀석 덕에 빠르게 포기했다. 리모콘 어디 있지. 왕! 물이 없네. 왕! 전화 오네. 왕! 너 부르는 거 아니라고 설명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왕! 한 마디였다. 이름, 이름을 짓자. 동물한테 사람 지어주면 오래 산다고들 하던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되니까. 피골이 상접한 사람보다 털 윤기 반지르르한 애가 훨씬 건강해 보이는데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됐다… 라는 건 찝찝하니까 말이다.
도겸아.
왕!
많은 길을 겸하라. 음 급히 생각한 것 치고 괜찮은 이름이었다. 어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듯? 크게 신경 쓸 새도 없이 개가 그러니까 도겸이 내 다리 사이를 살랑살랑 지나갔다. 왜 배고파? 정말로 신기하게도 짓지 않았다. 무슨 말만 하면 짓던 녀석이 그게 제 이름이 더는 아니란 걸 안 양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도겸아.
왕!
똑똑하네….
혀를 길게 빼고 헥헥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게 감촉이 좋았다. 볼따구는 말랑말랑. 잡으면 잡히는 대로 쭉쭉 늘어나는 게 찹쌀떡 같기도 했다. 심지어는 지 얼굴을 어떻게 쪼물딱거리던 얌전히 앉아 촉촉한 코만 벌름대는 얘가 제법 귀엽게 보였다. 동물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키우는 건 내 팔자에 절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얘면 괜찮을 거 같았다. 잘 키울 수 있을 거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음 근데 개는 뭘 먹더라?
—
현관에 마저 배달된 4kg 사료까지 낑낑대며 옮기니 어느새 하루가 다 갔다. 밥그릇, 식수대, 방석, 집, 울타리, 배변패드, 리드줄… 준비하자니 끝이 없었다. 진짜 승철이 얘는 뭐 이렇게 대책 없이 주고 갔담. 내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다 이 지랄을 할 동안 도겸이는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며 주위를 왔다갔다 거렸다. 수많은 택배가 초인종을 누를 동안 짖지 않았다는 건 기특한 일이었지만 그 꼬순내 나는 발은 영 쓸모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다음 생엔 개로 태어날래.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어주곤 도겸이를 불렀다.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만 갸웃거린다. 네 밥이라는 뜻으로 밥그릇을 툭툭 쳐도 무반응이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만 빛낼 뿐 사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그래도 좋다는 거 먹이려고 유기농으로 시킨 거야 너. 쫑알쫑알 이 사료의 장점을 늘어뜨려도 요지부동이었다. 한 알을 입에 가져가도 냄새만 맡을 뿐이었다.
몰라 너 마음대로 해.
역시 나에게 동물을 키우는 건 맞지 않았다. 난 그리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얘가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은 사양이었다. 도겸이 일어서는 내 행동에 뭔가 불안을 느낀 건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다다 부엌으로 뛰어가서는 서랍장을 마구 할퀴었다.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기도 잠시 문을 열어주니 안에서 시리얼 한 봉지를 입으로 물어 꺼내는 것이 아닌가. 설마 하는 마음과 동시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설핏 들었다. 고작해야 개일 뿐인데.
나 먹으라고?
왕!
기특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개가 이래. 가족도 친구도 안 챙기는 내 식사를 개가 챙겨주는 경험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개 코는 개 코인가 봐. 거기 있는 줄은 또 어떻게 알았대. 도겸이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시리얼을 받아들었다. 냉장고에 우유는 당연히 있을 리 없고 새 봉지를 뜯어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자니 이게 개 사료인지 사람 밥인지. 도겸이는 내가 돌덩이라도 먹고 있는 양 하는 걸 보면서도 뭐가 만족스러운지 지 자리로 가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꼴에 주인이라고 챙겨주는 건가 싶어 웃음이 살풋 났다.
나보다 네가 더 비싼 거 먹는 거야 인마. 알아둬.
—
개 키우면 체력도 같이 키울 수 있다고 누가 그랬냐. 하마터면 산책 한 번에 조상님 얼굴을 뵙고 올 뻔 했다. 아침 8시에 공원을 네 바퀴 뛰는 건 진짜 사람이 할 짓이 안 됐다. 한 달에 다섯 번이라도 밖에 나갈까 말까 한 인간에겐 더더욱. 집에 돌아오자마자 외투는 둘째 치고 신발도 못 벗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에 반해 도겸이는 그렇게 뛰고 오고도 뭐가 부족한지 하네스를 찬 상태로 거실을 우다다 뛰어다녔다. 오늘 인터넷 쇼핑 목록에 소음방지매트를 추가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도겸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래 뭐 개는 해맑고 좋은 게 좋은 거지. 근데 하루 한 번 산책은 무리. 절대 무리.
너는 내가 진짜 왕년에 돈 좀 많이 벌어놓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시킨 간식들을 종류별로 늘어놓았다. 간식을 하나 꺼내 좌우로 움직이자 그에 따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가 따라오는 모습이 바보 같고 귀여워서 괜히 더 골려 먹고 싶었다. 손. 하면 손도 착 주고. 돌아. 하면 한 바퀴 뱅글 돌고. 엎드려. 하면 납작 엎드려선 나만 바라봤다. 정확힌 내 손에 들린 간식을 보는 거겠지만. 고작 육포 하난데 그렇게 좋을까. 상으로 육포를 건네주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작은 거 하나에도 좋다고 느낄 수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까.
장난감을 물고 왔을 때 던져주면 안 됐던 건데. 지금 삑삑 소리가 나는 인형을 던진 지 104번째 슬슬 팔에 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는 눈이 왜 그렇게 맑니? 아니 애 자체가 왜 이렇게 해맑니? 이제 그만 던져줄 거야. 제법 근엄하게 말해도 저 큰 꼬리가 눈치도 없이 붕붕 활개를 쳤다. 애초에 개니까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끼잉. 내가 장난감을 든 상태로 멈추자 이젠 아주 내 무릎에 몸을 비비적대고 난리가 났다. 단순한 반복 행동에 불과한데 그걸 왜 그렇게 행복해 해? 정말 행복한 건 맞는 거지?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던지려던 손이 멈췄다. 도겸이 그걸 보더니 잠시 날 바라보다 내 손에 코를 콕콕 부딪쳤다. 105번째 장난감이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도겸이 우다다 달려가서는 장난감을 물고 다시 달려왔다. 삑삑— 맑은 소리와 더불어 얼굴 구겨지게 웃고 있는 도겸이 보였다. 내 불안을 달래듯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하릴없이 져버렸다.
알았어 또 던져줄게.
왕!
너 사실 다 알아듣는 거지. 그동안 모르는 척 한 거지? 따지듯 묻고 있는 주제에 크게 웃고 있는 자신이 모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의자에 의욕 없이 앉아있던 나를 끌어내린 건 결국 너였다. 힘들어도 며칠에 한 번은 산책 나가줄게. 웃어만 주면 장난감은 몇 번이고 던져줄게. 그러니까 같이 있자. 진심과는 별개로 체력의 한계를 맞이해 몸이 무슨 걸레짝처럼 널브러졌다. 마지막 장난감을 물고 온 도겸이 기특하게도 더 던져달란 표시도 하지 않고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너 진짜 따뜻하다.
—
“너 요즘도 불면증이냐?”
“글쎄?”
“네가 그런 건데 왜 네가 몰라.”
“그러게.”
승철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자니 딱히 또 못 잔 날은 없는 듯했다. 요새 들어 멍하니 텅 빈 집 안만 바라본 적이 있던가. 늦은 새벽 빛도 들어오지 않는 한가운데서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란 적이 있던가. 가만히 있는 날 기다리다 지친 건지 핸드폰 너머에서 닦달하는 승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은 거 맞냐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진짜 나 지금 괜찮을지도?
“괜찮아 나,”
왕!
아 벌써 밥시간인가. 바짓가랑이를 끌며 재촉하는 도겸이를 대충 두드려주며 진정시켜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괜찮은 거 맞냐고 되묻는 승철의 말에 어어 흘리듯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사료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내 다리 사이를 도겸이 마찬가지로 묘기처럼 지나다녔다. 밥그릇 앞에 도착하니 다 비워져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득 채워져 있는 편이었는데 뭘 또 기다리고 있는 건지. 으이구 욕심만 많아가지구. 그러면서도 사료를 부어주는 내 탓도 좀 있으니 선처해주기로 했다.
승철이에게 괜찮다고 말했던 게 무색하게 새벽에 잠에서 깼다. 창문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고 적막이 감돌고 홀로 남겨졌다는 기분이 끔찍하게 잘 느껴지는 시간. 굳이 시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잠에서 깰 때는 항상 이랬다. 아침이 오기까지 앞으로 몇 시간은 더 남았을 터였다. 햇빛이 다시 들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혼자인 채로. 전혀 잠에 다시 들 자신이 없을 만큼 정신도 말짱해서 이 긴 새벽을 또 홀로 어떻게 보내야할 지 막막할 즈음 옆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도겸이?
끼잉.
너도 깼어?
그릉그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 파고드는 도겸이와 눈이 마주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이래서 사람은 새벽을 조심해야한다니까. 괜히 센치해지잖아 사람이. 그래도 진짜 다행이다. 네가 있어서 하나도 외롭지 않아. 이제는. 한창 도겸이의 털을 따라 손가락을 놀리다 장난삼아 손! 하고 내밀었다. 도겸이 버둥거리며 엎드리더니 착 발을 얹어왔다. 반대 손. 마찬가지로 잘 따라오는 걸 보니 자꾸만 웃음이 새나왔다.
도겸아 어떡해 형 간식 없는데?
빈 양 손을 흔드는데 도겸이 실망한 표정은커녕 만족했다는 듯 빵끗 웃는 양하며 얼굴을 부볐다. 그거면 충분한 건지 금세 내 품에 제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잔다. 코고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고 따스한 온기가 지속됐다. 도겸이 개만 아니라면 묻고 싶었다. 왜? 왜 그런 거야? 답 없는 생명체 대신 내린 결론은 단순하고 매우 자기중심적이었다. 넌 간식을 보고 좋아하던 게 아니라 널 보고 웃고 있던 날 보고 좋아하고 있었던 거구나.
네가 사람 말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전할 게 한 가지 있었다. 너는 이제 내게 단순히 개가 아니고 알람용은 더더욱 아니며 나의 고질적인 외로움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준 이라고. 길게 말해봤자 알아들을 수 없을 테니 진짜로 하고팠던 말은, 내 곁을 절대 떠나지 말라는 거였다.
—
“도겸아!”
“도겸아!”
“어디야!”
“어디 갔어!”
왜.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지. 산책을 나가지 말 걸. 날씨가 좋다고 나가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왜 했지. 하필이면 도겸이를 잡은 끈이 엉성했을까. 어째서 놓쳤을까. 도겸아 라고 부를 새도 없이 눈앞이 깜깜해졌다. 줄을 놓치는 동시에 고꾸라져 쓰러졌다. 완전한 암전. 내 몸의 스위치가 픽 꺼져버렸다. 한동안 그러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도겸이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도로 한복판에 그렇게 혼자 쓰러진 모습 그대로 남겨졌다. 얼른 내 곁으로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부르면 당장 달려와야지. 내가 외롭지 않게.
애초에 왜 나를 두고 달려간 거야?
—
“제발 승철아 도와줘. 내가 잃어버렸어. 놓쳐버렸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줬잖아. 근데 잃어버리고 말았어. 내가 줄을 놓쳤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왜 그랬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아니 정한아 진정 좀 해봐. 뭘 잃어버렸는데. 내가 너한테 뭘 줘?”
“도겸이.”
—
“여기 왜 온 거야? 도겸이 만나러 가자며. 도겸이 찾은 거 아니야?”
“여기가 맞아.”
“여긴 도겸이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잖아.”
“정한아 제발.”
도겸이를 보러 가자며 승철이 날 끌고 온 곳은 이상했다. 말 그대로 이상한 곳이었다. 온통 하얗고 기이할 만큼 깨끗하고 불쾌하리만치 눈물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승철은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내 손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 어느 한 벽면에서 멈췄다.
“자 도겸이 여기 있어.”
유리로 된 벽면들. 사람이 비치는 것보다 안의 내용물을 더 잘 보이게 만든 구조. 소름끼치게 간격이 정확히 맞은 칸칸마다 들어있는 무형의 물질들. 휑하니 비어있기도 알록달록한 것들로 채워지기도 한. 허나 공통적으로는 더는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진. 그러니까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도겸이가 어떻게 있어?”
“여기 있잖아 도겸이.”
“뭐가 도겸이라는 건데.”
“윤정한 이거 읽어 봐.”
“뭘 읽어 봐.”
“여기 적힌 이름 읽어보라고!”
“이… 석민.”
“그래 도겸이 여기 있잖아. 제발 정한아. 이제 좀 정신 차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고. 나 진짜 무섭다 이제.”
“승철아 너야 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게 왜 도겸이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거리던 승철이 내 말을 듣는 순간 전에 없던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뭐라고 했어? 물어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서 그만 으하하 웃음이 터졌다. 와 최승철 그런 목소리 처음 들어봐. 공포영화를 볼 때도 귀신의 집에 들어갔을 때도 듣지 못했던 것에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피실피실 웃음이 샜다. 꺼져버린 화면과 같은 승철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 승철아,
“도겸이는… 그냥… 개잖아.”
—
집에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승철도 함께였다. 내가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다. 대체 왜? 잃어버린 도겸이를 더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었다가 승철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에 그만뒀다. 집안까지 들어올 땐 소스라치게 놀라 이제 더는 도겸이를 찾지 않을 것이라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승철을 달래려 한 말이었지만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개 한 마리였을 뿐이었다. 원래부터 있지 않았고 언제든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 정도인 존재였다. 설사 내가 걔 때문에 밥을 먹게 됐고, 밖을 나가게 됐고, 웃을 수 있게 됐고, 잠을 잘 수 있게 됐더라도 말이다. 이젠 걔가 없으니 나는 다시 밥을 먹지 않을 것이고,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웃지 못 할 것이고,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도. 이제 어쩔 수 없게 돼버린 일이었다.
“야 윤정한 저게 다 뭐야?”
“자기는 성 붙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아까부터 뭐냐.”
“제발 장난 하지 말고 저것들 뭐냐고!”
“도겸이 거.”
사료가 수북이 쌓여 밖으로 넘쳐흐르는 밥그릇. 메마른 물그릇. 털 한 톨 묻어있지 않은 쿠션과 집. 사용된 흔적 없는 배변패드. 거실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먼지 쌓인 간식들. 마찬가지로 너질러진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 인형과 장난감. 새로 주문한 소음방지 매트. 쓰레기가 된 강아지 용품. 기타 등등. 엎어진 시리얼. 아직도 우유가 없는 냉장고. 옆에 너랑 같이 산 컵. 그 앞에 네가 앉아있던 의자. 뒤에 네가 즐겨 듣던 LP판이 정리된 선반. 위에 함께 찍은 사진들. 이 모든 게 다 도겸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승철아 그만 울어. 이번엔 진짜 거짓말 안 했어.
—
또 다시 잠에서 깼다. 사늘한 밤기운이 이불도 덥지 못한 몸뚱이 위로 지나갔다. 창에선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어둡고 답답할 만큼 추웠으며 무섭도록 혼자였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더듬거렸다. 분명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었던 거 같은데 아무리 헤집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결국 몸을 조금 일으켜 보는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중앙에 존재하는 무언가. 그리고 손에 닿는,
있을 리 없는 하네스 끈.
새빨간.
줄.
내 손에 잡혀있는.
아직.
도겸아 돌아온 거야?
왕!